재중은 입술을 앙다물고 뒤를 돌아, 어쩔줄 모르고 서 있는 윤호를 바라보았다. 쓸쓸한 표정으로 재중을 바라보던 윤호는 재중과 눈이 마주치자 기분좋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재중은 윤호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장난스러운 햇살이 따갑도록 그들을 비추고 있었지만 코끝을 스치는 공기는 어느때보다 상쾌했다. "돌고형님은 좀 괜찮은가?" 계곡에 쭈그려 앉아 물장난을 치던 윤호는 슬슬 저무는 해를 바라보았다. 바지를 걷고 윤호의 장난에 장단을 맞추던 재중도 윤호의 말에 그들이 나온지 꽤 시간이 흘렀음을 깨달았다. 재중은 물에서 나오며 힙쌕에서 손소건을 꺼내 윤호에게 건네주었다. 윤호는 물기가 있는 손과 다리등을 닦은 후 다시 재중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대장도 닦......왜 그래요? 뭐 잃어버렸어요?" 없어. 분명 여기 오기전까진 있었는데.... 반지가, 반지가 없어. 어디에 흘린건가? 어디지? 어디에 흘린거지? 재중은 바닥에 앉아 힙쌕안의 물건을 모조리 쏟아냈다. 지갑과 상비약등 잡다한 것들이 흙위에 뒹굴었지만 그가 찾는것은 없었다. 재중을 감싸는 공기가 급작스레 불안정해지자 윤호는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뭐예요? 내가 찾아올게요. 중요한거예요?" 윤호의 단호한 음성이, 단단한 팔이 순간적으로 재중의 움직임을 멈추게했다. 재중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저를 살피는 윤호를 응시했다. 뭐하는거야, 김재중. 잘된일이잖아. 어차피 버릴거였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필사적으로 찾는거야? 바보같아. 버릴거라고 마음 먹었으면서, '용기가 부족했어'라며 이번에도 안버릴려고 그랬던거야? 그렇게 또 나를 속이면서 그와의 추억에 매달릴려고? 한심해. 한심하다구. 하늘이 도왔다고 생각해. 버릴 용기도 없는 못난 김재중을 하늘이 도왔다고 생각해. 눈앞의 이 아이를 위해 하늘이 대신 그의 흔적을 가져갔다고 생각해. 내 앞의 그가 불안해 하잖아. 나밖에 모르는 그가 걱정하고 있잖아. 재중은 길게 숨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윤호가 미간을 좁히며 재중을 살폈지만 재중은 팔을 뻗어 윤호의 목을 끌어안아버렸다. 그래, 이걸로 됐어. 7. 그의 흔적 "호우-, 이게 뭐야? 완전 맛있겠다아~!" 산에서 내려온 윤호는 마당에서 벌이고 있는 바베큐파티에 목소리를 높였다. 한숨자고 나서 괜찮아진 모양인지 준수도 주인장이 건네주는 고기를 잘도 받아먹고 있었다. "자, 제제 누님도 좀 팍팍 먹어요." 조용히 앉아, 뛰노는 윤호만 쳐다보던 재중에게 유천이 맥주한캔을 들고 다가왔다. 정말 윤호를 보고 있긴 했던건지 의심이 갈만큼 몽롱한 눈빛의 재중은 유천의 등장에 어깨를 흠칫하며 그에게로 시선을 들었다. 유천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준수와 윤호가 투닥거리는 것을 확인한 후 재중의 곁에 바짝 붙어섰다. 차가운 맥주를 한모금 들이킨 그는 재중에게도 한잔 권했다. 재중은 그것을 그저 받아 들고만 있었다. "저기....윤호 말이예요..... 어쩌면." "야-, 박유천!! 뭐해? " 유천이 말을 시작했을때 멀리서 준수가 그를 불렀다. 유천은 크게 손을 휘적거려준 후 나직한 음성으로 묘한 말을 남기고는 자리를 떴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것을 알고 있는지도 몰라요." 재중은 어쩐일인지 그 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듯 명치 안쪽이 순간 적으로 가벼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유천에게 그게 무슨 의미인지 물어보려고 손을 뻗어보았지만 이미 그는 준수와 얼싸안고 다른 분위기 속으로 섞여버렸다. 재중은 주먹을 말아쥐고 입술에 붙였다. 뜨거운 숨이 손가락을 스치자 근원모를 불안감이 손안에 모여들 었다. 불안하게 눈동자를 움직이던 재중은 갑자기 등골이 오싹한 한기가 들었다. 바닥을 향하던 시선을 들어 조금전까지도 뛰어놀던 윤호가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없다. 그가 없어. 말아쥔 주먹이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재중은 입술 안쪽 연한 살을 피가 날만큼 깨물고 펜션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방안으로 들어서자 바뀐것은 없었지만 묘한 위화감이 재중의 발길을 잡았다. 그는 마른 침을 삼키며 자신의 가방을 열었다. "......말도 안돼." 누군가가 뒤진 흔적. 물건들이 흐트러져 있는 모양이 주먹만한 무언가를 찾기위해 급하게 뒤진것 같았다. 재중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가슴이 답답해지며 숨쉬기가 곤란해졌다. "하아.....하아.......아니야..." 무릎이 푹 꺾어져 바닥에 주저앉아 손으로 가슴을 움켜잡았다.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 그 아이가... 알고 있어. 그 아이는 다 알고 있었어. 내가 여기에 무엇을 가지고 왔는지, 그것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그 아이는 전부 알고 있었어. 그래서 여기 들어와서 그것이 있는지 찾아본거야. 아...나...나란 인간을 대체..... 재중은 한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바닥에 머리를 댔다. 눈물이 바닥을 차갑게 적셨다. 저를 밀어내진 않았지만 다른 누군가를 향한 내 뒷모습을 보며 대체 넌 무슨생각을 했니. 너와의 첫 여행에 다른 누군가의 흔적을 품고온 나를 보며 넌 어떻게 웃어줄 수 있었던거니. 생각의 무게가 재중을 짓눌렀다. '내가 찾아올게요, 중요한거예요?' 재중의 뇌리를 스치는 윤호의 목소리에 그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창밖은 완전한 어둠이 깔렸고, 펜션 그 어디에도 윤호의 흔적은 없었다. 재중은 정신나간 사람처럼 달려나갔다. 알면서.... 그게 뭔지 알면서도 그렇게 말했던거야? ** "쓰읍-, 손수건 꺼낼때 빠졌으면 이 어딘가에 있을텐데....." 윤호는 손전등을 이리저리 비추며 오늘 낮 자신들이 올라갔던 길을 다시 오르고 있었다. 그 반지는 보나마나 창민이라는 사람이 준거겠지. 한참을 걷던 윤호는 조금 지쳐버려 평평한 돌 위에 잠시 앉았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총총히 떠 있는 별들이 쏟아질 듯 반짝이고 있었다. 윤호는 코로 깊이 숨을 들이마신후 다시 길게 숨을 내뿜었다. "김재중, 너 정말 나쁜거 아냐?" 자조적인 중얼거림을 해보는 윤호였다. 멍하게 앉아있는 기운빠진 모습의 그가 보기싫어 산으로 올라온 윤호지만 가슴이 답답한건 마찬가지였다. 재중이 웃는 일이라면 뭐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이번일은 많이 망설였었다. 다른사람의 흔적. 자신이 넘볼수도 없는 그의 상처자리. 윤호는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가락으로 조금 시큰대는 코를 문지른 윤호는 옷을 툭툭 털고 계곡쪽으로 손전등을 비추었다. 길게 생각해봤자 결국 상처입는건 혼자였으니, 윤호의 행동이 현명한건 지도 모른다. "어? 저기있다!" 반지케이스가 계곡물에 밀려내려와 돌틈에 아슬하게 걸려있는것이 보였다. 윤호는 반가운 얼굴로 조심 스럽게 다가갔다. 주위가 어두워서 계곡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위험하긴 했지만 윤호는 마음이 급했다. 물살이 생각보다 빨라서 금방이라도 그것은 떠내려 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조금만 기다려라잉~, 오빠가 구해주마." 윤호는 반지케이스에게 말을 건네며 한쪽 팔로 나무가지를 잡고 최대한 그 쪽으로 손을 뻗었다. 조금만 더.... 손가락 한 마디 차이로 손이 닿지 않자 윤호는 다리를 조금더 벌리고 몸을 기울였다. 손끝에 차가운 물방울이 탁탁 튀어올랐고, 윤호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그것을 건져올리기 위해 물속 으로 손을 넣었다. 그 순간, "으아악!" 강한 힘이 윤호를 반대쪽으로 잡아당겼고. 덕분에 반지케이스는 다시 떠내려가버렸다. 산길에 벌렁 나자빠진 윤호는 생각보다 땅바닥이 폭신하다는 생각을 하다가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대, 대장!" 윤호 밑에 깔린 건, 조금전 그를 잡아당겼던 재중이었다. 험한 산길을 손전등도 없이 달려온 모양인지 그는 땀범벅이 되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윤호는 땅에 누워서 숨을 고르는 재중과 계곡을 번갈아가며 쳐다보다가 재중의 등 뒤로 손을 넣어 그를 일으켰다. "조금만 더 하면 잡을 수 있었는데.... 그래도 이 계곡 타고 내려갔으니까 찾을 수 있을거예요. 걱정마요." "정윤호, 너 정말 바보야?!!" 땀이난 재중의 얼굴을 닦아주던 윤호는 답자기 빽 지르는 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재중이 처음으로 불러준 이름에 윤호의 심장은 아플만큼 크게 한번 뛰었다. 재중은 윤호의 멱살을 그러잡고 다시 소리를 질렀다. "이 밤에 여길 왜 올라와?! 내가 됐다고 했잖아! 아무것도 잃어버린거 없다고 그랬잖아!!!" "......대장...." "너 정말 왜그래! 정말 왜.....흐윽.. 저게 뭔지 알면서... 다 알면서 왜 그런건데.....왜!" 재중은 윤호의 가슴에 이마를 대고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못난 자신때문에 윤호마저 해할까봐 산을 오르면서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뭔가를 잡기위해 위험한 자세로 팔을 뻗는 윤호를 보는 순간 재중에게 든 생각은 딱 한가지였다. '저 아이를 잃고 싶지 않다.' 오로지 그 생각 뿐이었다. 윤호는 가슴을 적시는 재중을 품에 안으며 그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들썩이는 몸이, 불규칙한 호흡이 손바닥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 사람의 흔적도.... 네 일부니까-." 한숨과 같은 그 말에 재중은 윤호에게 더욱 안겨들었다. 진짜 천사를 만난것은 나인지도 모른다. 과거에만 매달려 살아도 죽은것처럼 지내던 내게, 넓은 가슴으로 나를 안아줄 너를 보내준 하늘에 감사해. ** 준수는 산 입구 쪽을 살피며 펜션앞 마당을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재중이 미친 사람처럼 달려나간지도 벌써 3시간이 지났다. "경찰에 신고라도 해야하는거 아냐?"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지금 신고한다고 해도 내일 아침에나 수색이 가능하다는것을 준수도 모르고 있진 않았다. 계단에 걸터 앉아있던 유천은 들어가서 손전등을 들고 다시나왔다. "안돼겠어, 우리가 찾아보자." 준수는 유천의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사람이 막 펜션을 벗어나고 있을때 멀리서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유천은 미간을 좁히며 손전등을 그쪽으로 비추어보았다. 비틀거리며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윤호다. 유천아, 저기 윤호 맞지?" 준수가 유천의 손을 잡아당기며 조금 빠르게 걸었다. "임마, 대체 어떻게 된거야........어, 어! 야! 정윤호!" 가까이 다가온 윤호는 탈진해버린 재중을 업고 걷고 있었지만 유천이 질문을 함과 동시에 쓰러져버렸다. 정확하게 유천의 정면으로 쓰러진 윤호를 그는 초인적인 힘으로 받아내 뒤로 넘어지는 불상사는 생기지 않았다. "유천아. 잠깐만 버텨봐." 준수는 윤호에게서 재중을 떼어내 자신이 업었다. "도대체 산에서 뭘한거야? 둘이 레슬링이라도 한판 한거야, 뭐야...." 유천 역시 윤호를 들쳐업으며 투덜거렸다. 유천의 말을 들으며 발걸음을 옮기던 준수는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변태." 자동적으로 레슬링의 여러자세들을 떠올려 버린 준수는 괜히 부끄러워져서 재중을 고쳐업으며 도도도 달려갔다. 쫄랑쫄랑 달려가는 준수의 뒷모습을 멍청하게 보고있던 유천은 그제서야 레슬링과 변태의 상관관계를 떠올리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등에 업은 윤호를 대충 들쳐매고는 준수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야 임마. 사사건건 그런데 대입하는 니가 더 변태아니냐?? 어이~, 야동매니아! 거기 서보시지~!" 기분좋게 휘어진 누군가의 눈꼬리처럼 그들을 지켜보는 밤하늘의 달과 그 곁을 지키는 무수히 많은 별들이 이제부터 시작될 네 남자들의 사랑을 축복했다. 언젠가는 무더운 날의 아이스크림 처럼 녹아버릴 사랑이지만, 영원을 약속하며 그 공간, 그 시간안에 그들은 사랑을 속삭였다. 8. 3 years ago "사랑해." 거짓말처럼 말 한마디에 시작된 그들의 사랑은 그리스의 절반을 태운 산불처럼 꺼지 줄 모르고 타올랐다. 그리고 영원히 타오를것 같던 그 불이 꺼지듯, 그들의 사랑도 그렇게 서서히 사그라져갔다. "창민아, 우리 오늘 수업마치고 영화보러가자." 살갑게 눈꼬리를 접으며 준수가 창민의 팔을 잡았다. 창민은 자기보다 머리하나는 작은 준수에게 어깨 동무를 하며 주위학생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뺨에 살짝 입맞춤을 했다. "어떡하지....오늘은 집에 일찍 가봐야해."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금방 기가 죽어버린 준수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고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자마자 만난 창민과 준수는, 준수의 적극적인 구애로 연애를 하게되었다. 다정하고 따뜻한 창민이 좋았다. 마냥 그가 좋았다. 하지만 준수가 모르는 부분이 있었다. 창민은 준수와 헤어지고 난 후 곧장 집으로 향했다. 교복을 벗고, 옷장에서 가장 어른스러워 보이는 옷을 골라 입었다. 거울에 모습을 비추어본 후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며 창민은 방을 나섰다. "아, 맞다." 현관문은 열려던 그는 깜빡하고 잊은 것이 있는지 급하게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던 반지케이스. 창민은 그것을 꺼내들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그는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창민이 도착한 곳은 분위기 좋은 카페였다. 창가자리에 익숙한 누군가가 턱을 괴고 앉아 있는 것을 확인하자, 창민은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리며 카페안으로 들어갔다. "후아-, 늦었지? 많이 기다렸어?" 새초롬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큰 눈이 매력적인 남자는 창민의 말에 도톰한 입술을 삐죽거렸다. 창민은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그의 손을 잡아 입으로 가져가 손가락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 남자는 한쪽 눈을 야살스레 치켜뜨며 창민을 흘겼다. "한번만 더 늦으면 죽을 줄 알아." 그 말에 창민은 피식 웃었다. 그러면서 그는 잡은 손을 놓지않고 주머니에서 들고왔던 반지케이스를 꺼 냈다. 그 안에는 심플한 디자인의 반지 2개가 빛나고 있었다. 사이즈가 크게 차이나지 않았지만 한치수 정도 작은 반지를 꺼낸 창민은 그의 네번째 손가락에 키스하며 그것을 끼워주었다. "사랑해, 김재중." 재중은 놀란 듯 큰눈을 더 크게 뜨고 창민을 응시하다가 기분좋게 입술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창민의 손에서 나머지 반지를 받아 그의 손가락에도 끼워주었다. "나도 사랑해. 심창민." 고양이 같이 눈을 뜨는 재중을 향해 미소짓던 창민은 재중의 곁으로 옮겨 앉았다. 재중은 기다렸다는듯 어린 연인의 품에 안겨들었다. 포근히 감싸안아주는 품이 안겨있어도 그리웠다. 창민은 품에 안긴 그를 감싸 안고 눈을 감았다. 머리속에 스미는 준수의 웃는 모습이 그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재중의 마음을 얻기위해 노력하던 때 준수를 만났다. 귀여운 얼굴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그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와의 오랜 짝사랑에 지쳤던지도 모르겠다. 나는 준수의 마음과 함께 그날 그를 안았다. 준수의 몸을 탐하며 잘못된것을 알았지만 되돌리기엔 늦었다는것도 함께 깨달았다. 그렇게 준수와의 시간을 키워가고 있을때 기적처럼 재중이 내게 왔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오랫동안 갈망하던 사랑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를 향해 천진하게 미소짓는 준수에게, 내게 모든것을 준 준수에게 차마 이별을 고할 수는 없었다. 결국 위험한 줄타기는 시작되었고, 이제는 정말 끝내야 한다. 창민이 다시 눈을 떴을때 창밖에는 준수가 놀란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심부름이라도 다녀오 는지 간편한 차림의 준수가, 재중을 안고 있는 창민을 경악스레 보고 있었다. 창민은 준수와 시선을 맞 추며 한쪽 입꼬리를 조금 말아올렸다. 미안. 그는 품안의 재중을 떼어내며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창을 등지고 있던 재중은 놀란 듯 어깨를 흠칫 떨었지만 이내 눈을 감으며 농익은 손길로 창민의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창민은 평소보다 더 진하게 입술을 붙여오며 혀를 깊이 밀어넣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쏠렸 지만 크게 상관없다는듯 그는 재중의 허릴 감고, 뒷머릴 당겨 질척하게 타액을 섞었다. ** 재중과의 꿈결같은 데이트를 마친 창민은 그를 집에 데려다준 후 준수의 집으로 갔다. 집 앞 놀이터로 그를 불러내자 오래지 않아 잔뜩 부어버린 얼굴의 준수가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창민아!"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것 같은 표정의 준수가 그를 불렀다. 창민은 깜깜한 밤하늘에 짙은 한숨을 길게 내쉬고 귀에 꽂았던 이어폰을 뺐다. "그동안 즐거웠어. 지금처럼 씩씩하게 잘 살아. 그말...하러왔어." 창민의 손을 잡으려고 뻗어지던 준수의 팔이 허공에 멈추었다. 차가운 공기를 천천히 움켜잡으며 준수는 팔을 내렸다. 뭐라고 말해야하는데....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한 나를 겨우 그따위 말 한마디로 버릴 수 있냐고, 찢어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이라고 욕이라도 해야하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아. 창민은 그 자리에 꽂힌듯 서 있는 준수를 애써 무시하며 그를 지나쳤다. 이렇게 이기적인 나를 잊고 잘 살아. 나보다 더 널 사랑해줄 사람을 만나길 진심으로 빌어줄게. 못난 나를 사랑해줘서 고마워. 미안해. 이렇게 두사람의 인연은 정리되었고, 모든것은 순조로운듯 보였다. "하앙.....하악-, 아....으,읏...." 교태스러운 몸짓과 끈적한 신음이 좁은 방을 가득채웠다. 겨울 방학을 맞이하여 부모님이 여행을 가버린 창민의 방에서 재중은 그의 움직임에 맞추어 마음껏 소리를 내고 있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두사람의 행위가 끝나고 재중은 협탁위에 올려둔 자신의 담배를 찾아 입에 물었다. "먼저 씻고 올게." 창민은 침대에 엎으려 담배를 태우는 재중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욕실로 향했다. 재중은 고개를 끄덕 이고는 그가 욕실로 들어가자 몸을 일으켰다. "고등학생 주제에 너무 잘한단 말이야....후후-." 장난스럽게 중얼거리며 재중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이것저것 클릭해보다가 비밀번호가 있는 폴더를 찾게된 그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재중은 아직 욕실에서 그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음을 확인한 후 그 폴더를 열기위해 노력했다. "일기 같은데.....흐음....생일도 아니고.......후-..." 이번호 저번호를 쳐봤지만 열리지 않던 폴더는 혹시나 해서 쳐본 자신의 주민번호 뒤자리에 싱겁게 모습을 드러냈다. "아싸~!" 재중은 승리의 미소를 띄며 폴더안의 파일을 읽어내려갔다. 대부분 재중과 창민의 이야기가 쓰여있어서 읽는동안 피식피식 웃음만 흘리고 있을때, 낯익은 이름이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 "......준..수?" 최근 애인에게 차였다며 죽고싶다던 자신의 사촌동생이 떠올랐다. 재중은 담배필터부분을 잘근잘근 씹으며 조금 앞쪽의 일기를 살폈다. "........뭐 이런.......말도 안돼..." 준수와 사귀기 시작했을때부터 그를 안았고, 그에 대한 미안함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동명이인일것이라고 수없이 되뇌어보았지만 일기의 끝에 있는 행복했던 순간의 준수사진에 재중은 물고 있던 담배를 떨어트렸다. 떨리는 손으로 자신이 반지를 받았던 그날의 일기를 열었다. 그날은 준수가 실제로 자살을 시도했던 날이었고, 그날의 일기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창민의 이야기가 쓰여있었다. "김재중~, 뭐보고 있어?" 욕실에서 나온 창민은 아직 상황파악이 안된듯 콧소리를 내며 재중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재중은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여기 써있는거, 사실..이야?" "응?" 그제야 창민은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당황스러운 몸짓으로 컴퓨터를 종료시키며, 이미 일어나 옷을 챙 겨입는 재중을 붙잡았다. 재중은 창민의 손을 뿌리쳤다. "놔. 지금은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아." "김재중, 잠깐만. 다 정리했어. 벌써 몇달전에 끝난 일이라고-." 창민은 필사적으로 재중을 붙잡았다. "그런게 문제가 아니야!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재중은 창민을 다시 뿌리치며 악에 받친 소릴 내질렀다. 그래, 그런건 상관없다. 바람을 피웠든, 내가 그 바람이 되었든,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우리가 행복에 취해 살을 섞었던 그날 사랑스러운 동생이 목숨을 버리려고 했다. 아무것도 모른채 그 아이는 내게 위로를 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를 위로했다. 괜찮다고...그런 사람들은 오래가지 못 할 것이라고 그를 위로했다. "그럼 왜 그러는건데?" "준수는! 네가 나 대신 안았던 그 김준수는, 너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그 김준수는....내 동생이야." "......뭐?" 강하게 머리를 맞은것처럼 멍해진 창민은 재중을 잡고있던 손을 놓쳐버렸다. 재중은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빼서 방바닥에 내려두고 돌아섰다. "그동안 즐거웠어." 자신이 누군가에게 했던 말을 다시 듣게된 창민은 그를 잡을 수 없었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도, 지금 잡지않으면 두번다시 보지못할것이라는것을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에는 그를 잡을 수 없었다. ** "김재중! 김재중! 문 좀 열어봐, 재중아! 김재중!!" 그날 밤 늦게 달려온 창민은 재중의 집 문을 두드렸다. 밖에는 사나운 폭우가 내리고 있었지만 창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재중은 방 침대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귀를 틀어막았다. 너를 사랑하지만, 이건 아니야. 나를 잘 따르는 착한 준수가 나때문에 죽을만큼 아프다는걸 믿을 수 없어. 그 사실을 준수가 알게 되는게 두려워. 그러니까.... 제발 가. 피를 나눈 나와 준수를 안은 네가 죄책감으로 아픈것도 보고싶지 않아. 그러니까.... 여기서 그만해, 우리. 창민은 몸을 짓이기는 폭우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점점 정신 흐려졌다. 그는 가쁜 숨을 토해내며 손에 꼭 쥐고 있던 반지케이스를 문앞에 내려두었다. 얼마나 문을 두드렸는지 새끼손가락에선 피가 스미고 있었다. 창민은 덜덜 떨리는 입을 열어 마지막을 고했다. "네가.....죽도록 아팠으면 좋겠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창민은 차가운 바닥에 스륵 무너졌다. 아플만큼 굵은 빗방울이 정신을 잃은 창민을 적셨다. 나 없는 곳에서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으면 해. 죽을힘을 다해 사랑한 나를 이리 쉽게 버리는 너를 용서할 수 없어. ......네 뒷모습까진 사랑하지 못하는 어린 나를 탓해. 김준수, 심창민, 김재중.... 어리고 순수했던 그들의 사랑은 서로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기고 그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3년이 흘렀다. 9. come back home "부모님은 언제 오셔?" 여행을 다녀온 후 유난히 기운이 빠진 모습의 윤호에게 재중이 슬쩍 말을 건넸다. 이상하게 자신을 피하는 듯한 윤호여서 제대로 말붙이기도 힘든 요즘이었다. "네?......아, 뭐......" 가게안을 정리하던 윤호는 화들짝 놀라며 재중을 응시했다. 하지만 이내 시선을 피하며 말을 흐렸다. 재중은 대충 정리가 끝난것 같은 윤호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내일이면 개학이기도 하니까...." 재중은 뭔가를 원하는 손길로 윤호의 등을 손바닥 전체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조금빠르게 내쉬어지는 뜨거운 재중의 숨결이 윤호의 어깨에 닿았다. 아마도 그는 조만간 돌아갈 윤호가 아쉬운 모양이다. "......나갈게요." "응?...." 전혀 예상하지 못한 윤호의 대답에 재중은 행동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윤호는 재중에게서 한발자국 멀어지는가 싶더니 그 길로 달려나가버렸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재중은 한참동안이나 그자리에 서있어야 했다. 달려나간 윤호는 곧장 집으로 갔다. 늦게 퇴근한 아버지와 마주쳤지만 근 한달만에 들어온 아들을 크게 나무라지는 않으셨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모습이 아버지에게 플러스요인으로 작 용했는지도 몰랐다. "으아-! 병신, 개초딩! 이 거지발싸개!" 방에 들어온 윤호는 침대에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자신을 향해 오랜만의 욕짓거리를 해댔다. 양손과 양발을 동동 구르며 중얼거리는 폼이 과히 멋지지만은 않았지만 윤호에게는 엄청난 괴로움의 현장이었다. 지잉-, 지이잉-, 주머니속 핸드폰이 울리자 윤호는 욕짓거리를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 외부액정에 뜨는 '대장천사'라는 이름에 그는 눈을 감고 폰을 베개 밑으로 넣어버렸다. "흐으아앙-, 난 몰라..." 윤호는 안절부절 못하며 세워 양팔로 감싼 무릎에 얼굴을 묻고 짐승같은 울음소리를 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윤호의 귀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포착됐다. 그것은 마치 구원의 소리처럼 윤호를 이끌었다. "박쌤!!!!!" 윤호의 옆방인 여동생의 방에서 이제 수업을 끝낸 유천이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윤호는 문을 벌컥 열어 유천을 자신의 방안으로 잡아 끌었다. 괴력을 발휘한 윤호에게 '악'소리 한번 못해보고 끌려온 유천은 침대위로 내동댕이 쳐졌다. "...야, 초딩. 이게.......어? 야, 야! 너 지금 뭐하는거야?!"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돈하며 몸을 일으키던 유천은 울것 같은, 하지만 좀 이상야릇한 표정으로 방문을 잠그는 윤호를 보고 당황하기 시작했다. 유천이 그 상황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예상이 가능하긴 하지만 그저 인간의 본능이라 해두겠다. 여하튼, 윤호는 당황하여 문고리를 잡는 유천을 힘으로 누르며 그를 다시 침대에 앉혔다. 유천은 마른침을 아프게 삼켰다. "박쌤" "왜, 왜?" 유천은 침대에 앉은 상태로 엉덩이를 슬슬 뒤로 빼며 자신의 앞섶을 꽉 그러쥐었다. "박쌤은...경험이 많으니까 그런건 쉽겠죠?" ".....무, 무슨... 무슨 경험?" 윤호의 진지한 얼굴과 어깨를 감싸는 양손에 유천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유천은 여민 앞섶에 더욱 힘을 주며 윤호에게서 멀어지기위해 몸을 뒤로 뺐다. "그거요." "그,그거라니......" 윤호가 점점 더 다가오자 유천은 심하게 눈을 깜박이며 몸을 이리저리 틀었다. 하지만 윤호의 힘이 워낙 강해 유천은 도저히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놔....박유천 체면에 이 콩알...보단 크지만, 암튼 저 어린 초딩한테 이게 무슨.... 아주 가까이 다가온 윤호는 누가 들을까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소근댔다. "......섹스." 유천의 눈이 당구공만큼 커져 두번 깜빡거린 후.... "으아아아악!!!" 괴성을 지르며 윤호를 양발로 힘껏 차버렸다. 불의의 일격을 당한 윤호는 방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유천은 그런 윤호를 두려운 표정으로 한번 주시하고는 급하게 방을 빠져나가려 했다. "박쌤! 잘못했어요, 잘못했다니까요." 윤호는 한쪽 손으로는 욱씬거리는 배를 감싸고, 다른 한손으로는 필사적으로 유천의 발목을 붙잡았다. 유천은 경악스러운 얼굴로 윤호를 내려다보았다. "너..너....어떻게....." 제제누님을 좋아한다더니.. 사실은 나의 섹시한 매력에 빠진거야? 어린노무자식이... 이래뵈도 이몸은 탑이야, 탑! 근데 감히 이몸을 깔려고.......아니, 그런것 보다 이몸은 말야! 너보다 훨씬 뷰리훌하고 환타스틱하며 큐트한 임자가 있단 말이다.앙?! 뭔가 분노에 휩싸인 채 이글거리는 유천의 모습에 윤호는 움찔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입을 열었다. "그죠? 저 정말 나쁘죠? ....하우-, 어떻게 그 순수한 대장천사를....." "......엥?" 문 앞에 서서 윤호를 노려보던 유천은 '대장천사'라는 말에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잘못짚어도 한참 잘못짚은 자신의 조금전 행동에 유천은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아...쪽팔려. 이게 무슨 추태야. 하지만 윤호는 그런 정신 산란한 유천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듯 계속 심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박쌤이 화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예요. 박쌤이 아끼는 돌고형님의 사촌형이니까....." 윤호의 말에 유천은 눈을 가렸던 손을 슬쩍 치웠다. 아마 윤호는 유천의 조금전 행동들을 저 나름대로 오해하는것 같았다. 유천은 끌어올려지는 입술을 억지로 다잡아 씰룩대기까지했지만, 그럭저럭 진지한 얼굴로 윤호에게 다가갔다. "흠,흠....그래서 결론적으로 제제누님하고 자고 싶다-, 그 말이야?" 유천은 윤호의 어깨에 팔을 둘렀고, 윤호는 고개만 끄덕였다. "막...옆에서 숨만 쉬어도 불끈거리고, 순수하게 웃는 얼굴에도 머리속에 경보가 울려요." 정말 고민이 되는 모양인지 윤호는 기운없이 읊조렸다. "뭐가 고민이야. 그냥 자면 되잖아." 유천은 별 시덥잖은 걸로 귀찮게 한다는 목소리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하지만 난 해본적도 없고, 또.....어쩌면 대장도 처음일지도 모르고....." 손가락으로 자신의 다리를 긁으며 중얼거리는 윤호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유천은 잠시 재중의 얼굴을 떠올렸다. 흐음-, 하긴 그 얼굴로 경험이 많다고 하기도 그렇군. 꽤 내성적인 성격같으니까..... 윤호보다 더 짧은 시간을 보낸 유천에게 재중은 그런 이미지였다. 윤호 말처럼 '순수한 천사'. 유천이 잠시 생각에 빠진 사이 윤호의 말이 계속 되었다. "그리고 사실... 하는건 뭐, 하면 되는거지만......그러고 싶지 않아요." "뭔 소리야?" "그러니까, 불끈불끈하긴 하지만...아직은 싫어요. 난 아직 미성년자고-." "오호-, 초딩 너 꽤 바른생활이구나? 그렇게 안봤는데....." 유천은 손가락으로 턱을 매만지며 놀리듯 말했다. 상당히 저돌적인 방법으로 여기까지 온 윤호를 아는지라 '미성년자고-'하는 말이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윤호는 굉장히 심각한 모양인지 유천의 놀림성 발언 에도 진지한 반응을 보였다. "나는 아직 아무 힘이 없잖아요. 아무리 어른인척해도 집에서 용돈이나 타쓰는 부자집 꼬맹이일 뿐인걸요. 그래서...아직은 싫어요." ** 재중은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보충수업을 재중의 집에서 다녔던 윤호여서 그의 교복이 그대로 남아있 었다. 하지만 그렇게 뛰어나간 윤호는 밤새 돌아오지 않았다. "뭔가 섭섭하게 한건가...." 재중은 한숨을 쉬며 윤호의 교복과 교과서들을 챙겼다. 교복이야 여벌이 있겠지만 교과서는 한권뿐일테니 가져다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직 새벽 6시가 되지 않은 터라 등교하기 전에 전해 줄 수 있을것이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 윤호의 집앞에 도착한 그는 숨을 몰아쉬며 엄청난 규모의 집을 올려다보았다. "후......, 진짜 엄청 부자네." 재중은 혼잣말을 하며 폰을 꺼내들었다. 통화버튼을 누르려던 재중은 잠시 망설였다. 또 안받으려나... 그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다시 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들고온 윤호의 캐리어를 바라보던 재중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내게 싫증이 나버린건지도..." 재중은 윤호의 방이 있을 법한 쪽으로 고개를 들어 시선을 두며 희미하게 웃었다. 이유조차 말해 주지 않고 피하기만 하는 윤호를 보고 있으니 재중은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몇 해 전 바로 자신. 죽을만큼 사랑한 그를 떠나면서도 재중은 제대로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윤호의 지금 태도가 큰 상처가 되진 않았다. 단지 명치끝이 날카로운 비수로 베이는 듯 서늘해질뿐. 재중은 대문 앞에 캐리어를 놓아두고 돌아섰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내 사랑은 안 녹아요' 윤호의 목소리가 뇌리를 스쳤다. '밀어내지 말아요. 사랑만 할테니까.' 양팔로 든든하게 안았던 윤호의 품이 떠올랐다. 재중은 걸음을 멈추었다. "......거짓말쟁이." 어느새 턱을 타고 맑은 결정이 무게감 있게 추락했다. 울먹거리는 음성이 만들어낸 말은 텅빈 골목에 멈 추어선 재중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재중은 손등으로 뺨을 닦으며 터지는 울음을 참아보려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텅빈 가슴을 꽉 채우는 서러운 슬픔이 재중을 감쌌다. 그는 피가 날만큼 아랫입술을 깨물어 가 까스로 흐느낌이 새어나오지는 않았지만, 터져버린 눈물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거짓말이야. 나와 같은 행동이라서 큰 상처가 아니라는 거... 그럴리 없잖아. 사랑만 한다고 했잖아. 네 사랑은 안녹는다고 했잖아. 거짓말쟁이. 꽂힌듯 서서 서러운 눈물만 쏟아내는 재중을 저멀리서 달려온 누군가가 강하게 껴안았다. "대장! 왜 울어요?" 재중에게 들러서 책을 챙겨 등교하기위해 조금 일찍 나선 윤호였다. 집앞에 놓인 자신의 캐리어에 급하 게 달려와 울고 있는 재중을 발견했다. 품에 안고 그의 얼굴을 확인하는 윤호는 정말 왜 우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으흑....바보야! 으흐윽...너 정말 싫어...어흑, 어흐흑...." 환상처럼 등장한 윤호를 보자 크게 울음을 터트리며 재중은 윤호의 품을 벗어나려했다. 그런 재중을 꼭 붙들고 등을 토닥거리던 윤호는 그제야 미간을 찡그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병신 개초딩아. 어제밤에 그렇게 뛰쳐나와서 전화도 안받고, 잠이 쳐오든? 이 변태같은놈아. 너 정말 왜사니... 이 짐승같은 인간아. 대장이 밤새 걱정할건 생각도 안했지? 그러니 초딩소리나 듣지. 아이구 인간아. 오랜만에 산랄한 자아와의 대면을 한 윤호는 서서히 울음이 잦아드는 재중을 품에서 떼어냈다. "대장, 미안해요. 울지마요." "온다간다 말도 없이, 흐흡...전화도 안받고....정말.....흐윽....." "하아-...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결국 다시 울음을 터트리는 재중을 윤호는 으스러질만큼 꽉 안았다. 마른 몸이 가늘게 떨렸다. 윤호가 재중의 머리칼을 쓰다듬어주자 재중의 팔이 윤호의 옷자락을 꽉 말아잡았다. 윤호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재중의 손길에 가슴이 뭉클했다. 놓치고 싶지 않다는듯 힘주어 잡는 재중의 행동에 윤호의 눈에도 눈물이 어른거렸다. 윤호는 재중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다시는 혼자두지 않을게. 약속해요." 대신.....조금만 기다려줘요. 내가 당신을 지킬 수 있을때까지, 내가 당신 앞에 한 남자로 설 수 있을때까지. .......사랑해요. ** 유천은 도서관에 앉아 의미없이 미적분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개강을 한지도 꽤 여러날이 지났고, 텁텁 하던 공기도 어느덧 상쾌한 가을공기로 바뀌었다. 덕분에 캠퍼스 안은 커플천국 솔로지옥이라 할 수 있 겠다. 날씨가 쌀쌀해진 만큼 커플들은 서로를 부둥켜 안고 서로의 몸을 데워주었고, 솔로들은 더욱더 시 린 옆구리를 절감하며 두꺼운 전공책만을 꼬옥 껴안을 뿐이었다. "수업가자." 유천의 옆에 앉아있던 준수는 어쩐지 지루한 표정의 그를 툭 쳤다. 유천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책을 들고 일어났다. 터덜거리며 나서는 유천의 뒷모습에 고갤 갸웃거리며 바라보던 준수도 그를 따라 나갔다. "커피 마실래, 유천아?" 준수는 강의실에 도착하자마자 책상에 엎드리는 유천에게 애교섞인 음성으로 속삭였다. 하지만 유천은 그대로 엎드려 고개만 저을 뿐이다. 준수는 작게 한숨을 쉬며 그냥 그의 곁에 앉아 책을 폈다. 설마 어제 일 때문인가..... 준수는 책상에 누워있는 유천의 뒷통수를 바라보며 어제일을 회상했다. 어제는 유천의 부모님이 부부동반 여행을 가신 관계로 유천과 준수는 함께 밤을 지새웠다. 혈기왕성할 나이인 두 사람은 물론 건전한 놀이만을 생각한것은 아니었다. 아무도 없는 빈집은 충분히 자극적이었고, 서서히 엉겨들었다. 늘 하듯 입술을 맞붙이고, 타액을 섞으며 더더욱 몸을 밀착시켰다. 한번에 달아오른 그들은 조금은 과격하게 옷을 벗어던지고 정신없이 서로의 몸을 탐했다. 서로의 상체에 무수히 많은 키스 마크를 남긴 후 바지와 브리프를 벗어내렸는데, 문제는 그때부터 일어났다. 분명히 유천이 리드하던 행 위가 어느 순간 준수가 리드하는 상황으로 바뀌어갔다. 바닥에 깔린 유천은 준수의 사람 죽이는 테크닉에 빠져 허우적 거리다가 탑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을 발휘해 가까스로 먼저 사정하는 것만은 면했다. 바들바들 떨리지만 그래도 건장한 남자이기에 유천은 준수를 바닥에 다시 눕히고 자신은 그 위에 올라 앉았다. 하지만 유천이 화려한 테크닉을 펼치기도 전에 거짓말처럼 준수는 잠이들어버렸다. 결국 유천은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쓸쓸한 마스터베이션을 해야했다. 사실 유천은 윤호가 생각하는 것 만큼 많은 경험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자신이 탑이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일편단심 김준수였기에 다른사람과 자본적도, 손을 잡아본 적도 없는 그였다. 생긴게 워낙 끼있 게 생겼을 뿐, 실제 유천은 준수보다 훨씬 순수한지도 몰랐다. "휘유우우~." 수업이 그럭저럭 마치자 유천의 한숨소리가 이어졌다. 어제 그대로였다면 내가 돌고형님한테 깔릴지도 몰랐어. 말도 안돼.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유천아, 점심 뭐 먹ㅇ.." "크아아악-!!!!!" 학생식당쪽으로 걷던 유천은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어디론가 달려갔다. "야! 박유천! 너 어디가?!!!" 준수의 외침은 아랑곳 하지 않고 유천은 가출 청소년 같은 뒷모습으로 준수 앞에서 사라졌다. 혼자 서 있던 준수는 전에 없이 어두워진 얼굴로 천천히 도서관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무서워서.....무서워서 그랬어. 너도 날 안으면 헌신짝 처럼 나를 버릴까봐...너는 그와 다르다는것을 알고 있는데, 그런데도 네가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니까 심장이 오그라 붙어 숨쉬기가 곤란할 만큼 겁이 났어. 이렇게 나를 안고 나면 '그동안 즐거웠어'라며 나를 남겨두고 떠날까봐... 두려웠어. ** 학교 행사로 오전 수업만 한 윤호는 발걸음도 가볍게 재중에게로 왔다. 아이스크림을 먹기엔 이른 시간 이기도 했고, 다른 학교는 다들 수업중이라 한가한 재중이 혼자 청소를 하고 있었다. "와악~! 대자앙~."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폴짝 뛰어들어와 재중을 끌어안는 윤호였다. "어? 너 어떻게...." 눈을 동그렇게 키운 재중이 윤호와 열린 문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윤호는 재중의 이마에 짧게 입맞 춤을 하고 재중의 손에서 청소도구를 넘겨받았다. "오늘 단축 수업 했어요. 반갑죠? 낮에 보니까 반가워 죽겠죠, 그죠?" "후훗, 밥은 먹었어?" "......으음.. 사실 먹고 싶은게 있긴한데..."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오른쪽 집게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턱을 톡톡 두드리며 윤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재중이 눈을 살짝 키우며 눈으로 되묻자, 윤호는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며 말했다. "대장의 사랑." "....아......." 저도 말하고는 민망했던지 입을 벌리고 그냥 서있는 재중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윤호는 고개를 숙였다. 윤호는 고개를 숙이고 버릇처럼 손가락으로 눈썹을 긁적거렸다. 또 삽질한다, 정윤호. 대체 뭐라는거냐고. 유치한 놈. 넌 평생 초딩이다. 이놈아! 큰 웃음이라도 터질 줄 알았던 윤호는 재중이 아무말도 없이 서있기만 하자 민망해 죽을 지경이었다. "아...저기, 대장......?" 이 어색한 분위기에서 탈피하기 위해 고개를 들던 윤호는 가까이 다가와 있는 재중의 얼굴에 눈을 키웠다. 그리고 다음 순간, 크게 뜬 재중의 눈이 스르륵 감겼고, 윤호는 그의 양볼을 당겼다. "...사랑해요." 닿을 듯 가까이 다가간 입술로 윤호는 간지럽게 속살거리며 매혹적인 붉은 입술에 깊게 입을 맞추었다. 말랑하지만 뜨겁고 수줍은 숨결이 느껴졌다. 가늘게 떨리는 손이 허리를 감을 땐 윤호는 저도 모르게 뜨 겁고 강한 숨이 훅 터져나왔다. "....하아. 하아-." 살며시 떨어진 입술사이로 누구것인지 모를 숨이 터져나왔다. 재중은 반쯤 뜬 눈으로 윤호를 올려다보 며 그를 락커룸으로 끌었다. 윤호는 그의 손에 이끌려 갔지만, 좁은 룸에 들어서자 그를 강하게 벽으로 밀어붙였다. 어두컴컴하고, 조금은 습한 그곳은 윤호의 이성을 저 멀리로 밀어버렸다. 조급하게 붉음을 탐했다. 할딱이는 숨소리가 좁은 곳에 섞였고,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입고 있던 상의를 벗어던졌다. 재중은 자신의 바지 버클을 풀고 커다란 윤호의 손을 이끌었다. "아아....으응....." 데일 듯 뜨거운 곳에 못견디게 자극적인 손이 닿자 참았던 소리가 터졌다. 윤호는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강하게 빨아당기다가 귓가에서 터진 신음소리에 행동을 멈추었다. 내가... 지금 뭐하는거지.... 그를 아끼겠다고 마음먹고, 언제나 깨질 유리 인형처럼 다루었던 윤호는 자신의 본능적 행동에 당황하고 말았다. "하아...윤호야. 윤호....." 그런걸 아는지 모르는지 재중은 윤호의 등을 껴안고 그를 애타게 불렀다. 윤호는 눈을 꽉 감았다가 잠시간 후 드며 재중의 어깨를 양손으로 잡고 그를 품에서 떼어냈다. 달아오른 몸이 급격히 싸늘하게 식었다. "대장... 미안해요." "......응?" "사랑하지만.......아직은 아니예요."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는 셔츠를 주워 재중에게 입혀주었다. 재중은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윤호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당신 앞에 남자로 설 수 있을 때, 그때... 당신을 내게 줘요." 그리고...... 당신이 나를 진짜 사랑할때, 그때... 당신을 안을게. 어둠속에서 재중의 까만 눈이 일렁거렸다. "난...나는......" 아프게 보이는 윤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재중은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미안해. 미안해. 너를 망설이게 해서... 내 안의 그를 완전히 사라지게 하지 못해서.... 10. 다도부 '보리차' 방과후 동아리 실에 모인 윤호네 고등학교 다도부 '보리차'부원들은 지루한 표정이었다. 윤호 역시 졸리 운 눈을 억지로 뜨고 턱을 괴고 3학년부장의 긴긴연설을 듣느라 고생이다. "....에-, 그러니까 다가올 유란제는 정말 중요하단거야. 다들 알겠어?" "네에-." 벌써 비슷한 질문에 대답만 1시간째다. 말 많기로 유명한 3학년 부장을 보며 다들 마음속으로 한목소리 를 내고 있는지도 몰랐다. '선배 수능 공부 안해요?' "아! 중요한걸 잊을 뻔했는데...." 긴긴 연설을 끝내고 나가려던 3학년 부장은 자신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탁 치면서 다시 들어섰다. 지친 1,2학년 부원들은 이제 아예 테이블에 엎드려 버렸다. 유란제-서파고등학교의 축제이름-를 잘하란 소릴 대체 얼마나 해대는건지... "한 10분후에 니네 사진 찍어주러 작가분이 한분 오실거야." 최강 인물을 자랑하는 '보리차'는 전통적으로 프로필 사진을 찍어 목에 걸고, 입구에 붙이고서 일일 찻 집을 연다. 덕분에 유란제에서의 '보리차'는 단연 인기최고이다. "아니, 선배님.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겁니까?" 한여름날의 엿가락처럼 늘어져있던 윤호는 벌떡 일어나 벽에 붙은 겨울 앞에 섰다. 한쪽이 눌린 머리칼 에 인상을 쓰며 다시 띄우기 위해 노력했고, 다른 아이들도 크게 다르지 않는 모습이었다. "큭큭. 네츄럴한 모습이 짱이잖냐. 어, 벌써 오셨나봐." 분주한 후배들을 장난스레 둘러보던 부장은 '사진작가분'에게 연락이 온 모양인지 폰을 한번 확인했다. 그리고 곧바로 부실 문이 열렸다. "......여기가.. 다도부 맞아요?" 카랑카랑하고 맑은 음성과 함께 쌍꺼풀 짙은 눈이 매력적인, 소년 같은 외모의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와! 맥스형! 일찍 왔네요. 야야, 인사해. 이쪽은...." "맥스?! 설마 그 맥스?" 저쪽 구석에서 교복 매무새를 고치고 있던 성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달려왔다. 맥스라 소개된 남자는 기분좋게 웃을 뿐이었다. 윤호는 볼에 바람을 넣고 성환과 맥스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맥스...맥스라....어디서 본것도 같고 아닌것도 같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윤호는 성환의 호들갑스러운 외침에 그를 기억해낼 수 있었다. "저 진짜 형 팬이예요! 이번에 사진전 한국에서 한다고 해서 완전 기대하고 있어요!" 미국에서 꽤 유명한 사진작가인 '맥스'는 최근 한국에서 자신의 3번째 사진전을 연다며 언론을 바쁘게 했다. 대중들에겐 그냥 별일 아닌 일이지도 모르나, 지금 흥분하고 있는 성환처럼 사진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겐 우상인 '맥스'라하겠다. "맥스형이 1학년을 우리학교에서 다니다가 유학가셨어. 깍듯이 선배님으로 모셔라, 알겠냐?" "선배는 무슨..후후, 그냥 편하게 대해도 돼-." "우와아-. 형,형,형!" 촐싹거리며 매달리는 성환을 향해 사람 좋게 웃던 맥스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있는 윤호를 바라보았다. "네가...정윤호구나." 슬쩍 입꼬리를 올린 맥스는 윤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윤호는 물론이고, 다른 부원들의 시선도 맥스에 게로 쏠렸다. 맥스는 윤호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이번에 묵해그룹에서 스폰서를 맡아주셨어. 반갑다." 묵해그룹의 장남인 윤호가 속한 동아리아서 맥스 씩이나 되는 사진 작가가 왔나보다 생각해버린 아이들 은 별 대수롭지 않게 두사람의 악수를 보아넘겼다. 하지만 그 손을 맞잡는 윤호는 뭔가 꺼림칙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 준수는 유천의 가방까지 챙겨들고 학교 체육관을 향해 빠른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괴성 을 지르며 사라진 유천이 체육관에 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야, 박유천!" 준수가 체육관에 도착했을때, 유천은 땀으로 샤워를 했는지, 잔뜩 멋낸 차림이 짠내가 폴폴 날만큼 푹 젖어 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 준수는 가방을 바닥에 대충 내려놓고 유천에게 달려갔다. "으...으으...." 죽은 듯 누워있던 유천은 준수의 음성에 기이산 신음소리를 내며 다 죽어가는 꼴로 몸을 일으키려했다. 준수는 기가막혔다. "너 대체 뭐한거야?!" 소리치며 달라나가서 기껏 온 곳이 체육관인것도 황당한데 이 꼴은 대체 뭐란 말인가. 유천은 발발 떨리 는 손을 들어 체육관안에 자리한 웨이트트레이닝용 기구들을 가리켰다. "으...으으으....." 준수는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들을 둘러보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도대체 이꼴이 될만큼 저걸 왜 한거냐고! 그것도 갑자기!" "으...으..으으....." "말 똑바로 안할래!" 준수의 다리 위로 머리를 부비적 거리는 유천에게 결국 소리를 빽 질렀다. 유천은 놀란듯 눈을 크게 뜨 고 준수를 응시하다가 꾸물꾸물 몸을 일으켰다. 괴한 운동에 온몸이 쑤셨다. "아니. 그게.....준수야.. 그니까 요즘 내가...좀....으음......" "......너 정말 실망이다.박유천." "어, 어?" 준수는 우물쭈물하는 유천에게 가방을 던지듯 안겨주고 일어섰다. "싫으면 싫다고 하면 되잖아. 꼭 이렇게 바보 만들어야겠어?" "준수야. 무슨 말이야." "오늘 아침부터 한마디도 안하고, 내가 말걸어도 대꾸 한번 없다가 갑자기 사라져선 운동을 했다고? 이걸 날더러 어떻게 이해하란건데! 왜, 벗겨보니까 생각이 달라지든? 그래서 이래?!" 체육관안에서 놀던 몇몇 학생들이 힐끔힐끔 두사람을 돌아보았지만 준수는 그런게 문제되지 않았다. 속사포처럼 쏘아댄 준수는 자기가 한 말에 상처를 입고는 뒤돌아섰다. "잠깐만 준수야!" 완전 당황한 유천이 준수의 손목을 붙잡았다. 진정한 탑으로 거듭나기위해 체력단련을 했던 유천으로서는 준수의 반응이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준수에게 어리광이나 떨어볼 작정이었던 유천은 히스테릭하기까지 한 준수의 모습에 머리속이 복잡했다. "놔, 너랑 얘기하고 싶지않아." 마음에 깊이 각인된 상처는 어떠한 경험에서도 모든 결과를 그 상처로 귀속시킨다. 준수도 그러했다. 분명 같은게 전혀 없는 상황을 굳이 연결시키는 지금이 억지스럽다는것을 준수 자신도 모르지 않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돌아버릴것 같았다. 두번 다시 버려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어는.. 먼저 그 손을 놓는것이다. "갑자기 왜이러는건데-, 너 대체 무슨 소릴 하는거야?" "너도 결국엔 나를 버릴거잖아." "김준수!" 일렁이는 눈으로 유천을 응시하는 준수는 조금전까지 그가 알던 준수가 아닌것 같았다. 연약해서 움켜 잡은 손아귀에 힘을 주면 으스러져버릴 병아리같은 모습이었다. 상처를...건드린 모양이다. "나를 떠날거잖아." "내가 왜 떠나! 내가 여기 온건, 그건...." 당당하게 외치던 유천의 음성이 다시 줄어들었다. 입맛만 다시며 적당한 말을 찾기위해 눈을 굴려도 보 았지만 적당한게 떠오르지 않았다. 차마 이런상황에 '너에게 깔리기 싫어서'라고 말할 수 없었던 유천은 잔뜩 미간을 좁히고 준수의 손목만 꼭 붙잡았다. "유천아... 나.... 씩씩하지 않아." "......응?" "갑자기 네가 사라져도 아무렇지 않을만큼 씩씩하지 않아. 정말 나... 씩씩하지 않은데..." 조금씩 떨리는 몸은 기어이 큰 들썩임을 만들어냈다. 유천은 그의 팔을 당겨 품에 안았다. 잊을뻔했던 준수의 첫모습이 떠올랐다. 다가오는 사람조차 겁내던 여린 준수에게 먼저 손 내밀었던 유천이었다. "알아.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다 내 잘못이야. 울지마.응?" 등을 쓰다듬는 유천의 손길에, 귓가에 내려앉는 나직한 음성에 준수는 그의 등을 감싸안았다. 창민에게 버려졌던 것이 꼭 이맘때쯤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인지 준수는 기복이 심한 감 정에 스스로를 상처입히며 유천에게 안겨들었다. ** "대장~, 나 왔어요-." 수업을 마치고, 야간 자율학습까지 끝낸 윤호가 제제아이스크림으로 들어섰다. 여학생 손님들에게 아이 스크림을 건네주던 재중은 윤호의 음성에 밝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침 잘 왔어. 나 새로운거 개발했는데, 맛 한번...." 윤호를 반기며 달려나가던 재중은 윤호와 함께 들어서는 한 남자 덕분에 말을 끝까지 하지 못하고 자리 에 우뚝 멈추어섰다. 재중의 시선이 자신과 함께 온 남자에게 쏠리는 것을 본 윤호는 재빨리 그를 소개 했다. "대장, 이번 유란제에 우리사진 찍어주기로한 유명한 작가분이세요." "맥스...예요." 맥스는 윤호를 슬쩍 밀치고 재중 앞에서서 악수를 청했다. 재중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얼굴만 바 라보고 있었다. 맥스는 한쪽 입꼬리를 살짝 말아올리며 내밀었던 손을 거두었다. "대장, 왜 그래요?" 크게 뜬 눈으로 미동없이 맥스만 응시하는 재중을 툭 치며 윤호가 그를 살폈다. 그제야 재중은 눈을 깜 빡이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심장이 심하게 뛰어댔고, 입안이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아...아니, 너 여기 잠깐만 봐줘." "에?" "그, 금방 올게." 재중은 도망치듯 그자리에서 벗어났다. 윤호가 말릴틈도 없이 사라진 재중이지만 갑자기 들이닥친 여학 생들 덕분에 윤호는 그를 따라갈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몸이 안좋은 모양인데... 내가 가볼게." 주문을 받으면서도 재중이 사라진 쪽을 걱정스레 살피는 윤호에게 맥스가 말했다. "아....네, 부탁드릴게요." 상녕한 어투와 소년같은 목소리의 맥스는 호감형임이 분명했지만 이상하게 윤호는 그가 마음에 들지않 았다. 사진을 다 찍어주고서 굳이 자신을 따라가겠다고 한것도 이상했다. 조금전 재중의 반응도 정상적 이지는 못했지만 그런것들을 연결지을 무언가가 부족했다. 윤호는 어쩔 수 없이 맥스에게 재중을 부탁 하고, 무섭게 밀어닥치는 소녀떼를 상대해야했다. ** "그동안 잘 지냈어, 김재중?" 한적한 공원 벤치에 앉아있는 남자에게 다가서며 맥스가 말했다. 재중은 어깨를 흠칫 떨긴했지만 고개 를 들지않았다. 맥스는 그의 곁에 앉으며 담배 한대를 건넸다. "네가 담배피는 모습... 좋아했어." 가볍게 흘러나오는 말에 재중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맥스는 풋하고 웃으며 재중의 가는손목을 붙잡아 당겼다. "나 보고싶었잖아. 아니야?" "....왜 나타난거야, 심창민." 잡힌 손목을 떨쳐내며 재중이 그를 노려보았다. 3년동안 떨쳐내지 못했던 기억. 아픈 사랑의 기억이 밀 려와 재중을 압박했다. 창민은 느린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서 재중의 앞에 바짝 붙어섰다. 자그마한 체구의 재중을 조용히 내 려다보던 그는 재중의 입술에 스치듯 키스를 하고는 귀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한 순간도 너를 잊어본적 없어." 11. 재회 재중을 찾으러 간다고 나갔던 맥스조차 돌아오지 않자 윤호는 마음이 불안해 졌다. 그렇다고 재중이 아 끼는 이곳을 그냥 나몰라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윤호로서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방법밖에 없었다. "여어~ 초딩 알바-. 오랜만이다. 제제누님은 어쩌고 혼자 있냐?" "왁! 박쌤! 돌고형님!" 때마침 들어오는 유천과 준수를 보자 윤호는 기쁨의 탄성을 지르며 앞치마를 벗어던졌다. "야, 왜그래? 재중이 형은?" 아직까지 울음기가 가시지 않은 준수의 음성에 고개를 갸웃거릴 사이도 없이 윤호는 그둘을 안쪽으로 잡아끌었다. 영문도 모르고 아이스크림 진열대 안쪽으로 끌려온 두사람은 앞치마를 하나씩 받았다. "금방 올게요. 그때까지 부탁 좀 해요!" "어이! 야, 야! 야 임마!" 튕겨나가듯 사라지는 윤호를 불러보았지만 이미 그는 어둠속으로 사라진지 오래였다. 유천이 투덜거리 고 있는 사이 벌써 예쁜 여학생 하나가 준수에게 주문을 하고 있었다. "푸른 레몬이랑 내사랑디디 주세요." "네에-. 알겠습니다. 야, 들었지?" 준수는 상냥하게 웃어주고는 유천을 팔꿈치로 툭툭 쳤다. 더이상 도망칠 곳도 없던 유천은 주걱과 컵을 들고 준수가 주문받은것을 성실히 퍼담기시작했다. 아이스크림을 퍼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 일은 상 당한 힘을 요하는 일이라 방금까지만해도 근육단련을 한 유천에겐 여간 힘든일이 아니었다. 유천은 새삼 제제누님과 초딩알바를 떠올리며 그들을 존경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겨우 두번 펐을 뿐이지만 벌써 손이 후들후들 떨려왔다. "유천아, 힘들어?" 다른 주문을 넘겨주며 준수가 묻자 유천은 표정을 환하게 바꾸었다. "힘들긴~, 내 천직같아." 준수는 가늘게 떨리는 유천의 입매를 슬쩍 바라보고는 조용히 웃어버렸다. 이렇게 착한 네가 곁에 있어서 다행이야. ** 재중은 눈 앞까지 다가온 창민을 차마 피할 수도 없었다. 재중 역시 단 한순간도 창민을 잊은 적이 없었다. 부족한 자식에게 더 마음이 가듯, 미완성의 작품이 더 가슴에 사무치듯. 재중에게 창민은 이루지 못한 사랑이고 잃어버린 자신의 일부였다. ".....그땐..." "말하지마. 괜찮아. 김재중." 누그러진 음성을 겨우 내뱉는 재중의 말을 막으며 창민은 그의 가느다란 허리를 팔로 감았다. 억지로 잊 어야 했던 감촉이 되살아나서 눈물이 날것 같았다. "나도 단 한순간도 너를 잊어본적 없어, 심창민." "....그래.." 자연스럽게 창민의 목을 끌어안는 재중의 입술에 살며시 입을 맞추는 창민이었다. 지난 3년동안 단 한번도 잊어본적없는 내 사랑. 맞닿은 입술의 감촉을 얼마나 그려왔는지 너는 차마 모르겠지. 수많은 밤을 보냈고, 수많은 아침을 함께한 너를 단 한순간도 잊을 수 없었어. 창민의 머리칼에 손가락을 묻고 벌어진 입안으로 혀를 밀어넣는 재중은 그의 품에 더욱 안겨 들었다. 뇌리를 자꾸만 파고드는 바보같이 착한 아이의 모습이 겹쳐왔다. 재중은 그럴수록 더욱 창민에게 몸을 밀착시켰다. 창민은 끈적하게 달라붙은 재중의 몸을 느끼며 그의 셔츠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이미 뜨거 워진 등허리를 부드럽게 만졌다. 몸이 움찔거리며 입안으로 들어온 혀가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창민 은 그 틈에 그의 혀를 감아올려 낯뜨거운 효과음이 날정도로 빨아당겼고, 등허릴 만지던 손을 움직여 등 골을 따라 아래로 움직여갔다. 언제나 준비되어 있을것 같은 작지만 적당히 말랑한 둔부에 손이 닿자 재 중은 어깨를 움츠렸다. 창민은 입술을 끌어올리고 그에게서 떨어지며 속삭였다. "여전해. 너는..." "하아....." 재중은 다리에 힘이 풀리는지 벤치에 앉아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할딱거렸다. 창민은 그의 뺨에 살며시 키스를 해주고는 잠깐 정리할게 있다며 그를 남겨두고 그곳을 벗어났다. 재중은 그가 사라진 쪽을 희미 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쓸었다. 아직도 뜨거운 느낌에 묘한 기분에 휩싸인다. "나는 당신에게 뭐예요?" 등 뒤에서 들린 소리에 재중은 끌어올려지던 입술을 다시 끌어내렸다. "......윤호야." 피가 스밀만큼 꽉 말아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윤호는 재중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적당 한 거리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재중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서려했다. 하지만 윤호는 그 가 다가온 만큼 뒤로 물러섰다. "정말이야?" "....윤호야." "정말... 단 한순간도 그를 잊어본적이 없어?" 숨이 막힐만큼 달려온 공원에서 윤호가 본것은 재중과 맥스였다. 반가운 마음에 한발자국 다가서던 윤 호는 맥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재중은 그를 향해 단번번도 잊은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에게 심창민이라 불렀다. "그건....." 재중은 그를 바로볼 수가 없었다. 심장이 조여들었다. 창민을 만났을때와는 다른 감정이 재중을 감싸안 았다.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봐! 내가 잘못 본거라고, 잘못들은거라고! " "...미안해." "나 당신이 하라는대로 다 했잖아. 당신이 원하는건 다 했잖아. 다 믿을게, 당신이 아니라고 하면 다 믿을게." 두사람의 끈적한 키스도, 창민의 나를 향한 비웃음도 다 못본걸로 할 수 있어. 내가 잘못본거라고, 내가 잘못들은거라고 말해준다면, 당신이 말해준다면 다 믿을 수 있어. "윤호야. 정말 미안해." 밝기만 하던 윤호가, 강하게 재중을 지키던 윤호가 그 말에 눈물을 뚝뚝 흘렸다. 바르르 떨리는 아랫입 술을 꼭 깨물고 터져나오는 울음을 힘겹게 삼키는 모습에 재중은 가슴이 찢기는 아픔을 느꼈지만, 그에 게 다가갈수도, 그를 안아줄수도 없었다. "....그 사람의 흔적을 사랑할 순 있지만, 그사람에게 안기는 당신을 사랑하고 싶지는 않아." 윤호는 턱을 타고 흐른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내 마음을 다해 사랑한 당신이... 단 한순간도 나를 사랑하지 않은 당신이... 너무 미워." 그 말을 끝으로 윤호는 뒤돌아섰다. 한줄기 흘러내리던 눈물이 이제야 펑펑 쏟아졌다. 손으로 입을 막아도 새어나오는 흐느낌을 숨길 수 없었다. 등 뒤에서 울고 있을 재중이 느껴졌지만 윤호에게는 그를 안아줄 여유같은것은 없었다. ** "어서오세요-." 어느정도 손님을 치룬 후라 가게안은 한산했다. 유천은 테이블 정리를 하며, 들어오는 남자를 향해 기계 적인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그 남자는 곧장 준수를 향해 걸어가더니 그와 마주보고 서있기만 했다. 의아해진 유천은 허리를 펴며 그를 바라보았다. "씩씩하게 잘 살고 있는것 처럼 보인다." "너...어떻게 여기...." 그 남자의 익숙한 말에 준수는 경악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유천은 준수의 등을 받치며 그 남자를 쳐다보 았다. 남자는 유천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보인 후 다시 준수를 응시했다. 측은한 눈빛이 언뜻 비치는것 같았지만 이내 냉랭하게 바뀌었다. 준수는 유천의 손을 꽉 잡으며 그를 향해 언성을 높였다. "대체 여기 왜 나타난거야? 누가 반긴다고? 참 뻔뻔하다, 심창민!" 준수의 말에 유천은 창민을 다시 쳐다보았다. 분명 창민이란 이름을 윤호에게서 들은적이 있었다. 유천은 조금 고민을 해보았지만 창민이 다시 입을 여는 바람에 해답을 얻는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때 너를 버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말해주러왔어." "....!!...." "듣고 안듣고는 네 마음이지만... 넌 전혀 모르는 모양이니까. 말해 두는게 좋을것 같아서." 창민은 놀란듯 커진 준수의 눈을 응시했다. 유천은 차마 그 사이에 끼어 들 틈을 찾지못하고 조용히 숨을 죽이고 두사람을 지켜보았다. 준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조금 커진 숨만 내쉴뿐이었다. 창민은 긍정 의 뜻으로 알고 이마를 가린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입을 열었다. "......지금 곧장 근처 공원으로 달려가봐. 거기에 네가 봤던 그 사람이 있어." 창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준수는 자리를 박차고 달려나갔다. 창민은 준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당신이.. 준수의 애인인가요?" "그렇다면?" 준수를 따라가려던 유천을 창민이 붙잡았다. 그에게 날이 선 대답을 하는 유천은 창민은 조금 노려보았다. 창민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 아껴주세요." "......오지랖이 넓으시군." "그렇군요." 그것을 끝으로 두사람 사이엔 더이상 오가는 말은 없었다. 유천이 잠시간 울것같은 표정으로 서있는 창 민을 응시하다가 가게를 빠져나왔을 뿐이었다. 창민은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서서 매장안을 둘러보았다. 사랑이...전부 달콤한건 아니야. 12.. 그 남자의 의도 "준수야, 잠깐만! 잠깐만 서봐!" 무언가 걸리는것이 있는 것인지 준수는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고, 유천은 그를 겨우 따라잡았다. 준수는 오늘 낮의 갑작스러운 감정 기복의 이유가 이것일 거라고 확신하며 유천을 뿌리치고 뛰었다. 그 날의 그 사람. 단 한번도 잊은 적 없다. 그 사람을 껴안고 입맞추던 네 모습과 너를 껴안는 그 사람 모 습은 아직도 가끔씩 내 꿈에 나타나 나를 괴롭히니까. 어렴풋하게... 나는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었던 것 같아. 하지만 굳이 확인하려고 하지 않았다. 내 생각이 틀리길 바랐었고, 또... 내가 힘들때 마다 곁에 서 나를 위로해준 사람이 그였으니까... 아닐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그 사람은 분명 아닐것이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은... "형, 형이..왜 여기 있어?" 공원에 초라한 몰골로 주저앉아있는 것은 믿기 싫은 진실, 재중이었다. 준수는 재중의 어깨를 붙잡고 다 그쳤다. 크게 내지르는 소리에 공원을 벗어나던 윤호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야, 초딩. 뭐하냐? 빨리와." 멍하게 서있는 윤호를 유천이 다시 잡아당겼다. 윤호는 대충 얼굴을 손으로 닦고 그에게 끌려갔다. "준수야.....어흑...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형이 대체 나한테 뭐가 미안한던데!!" 얼마나 울었는지 거의 실신할 지경인 재중을 붙잡고 준수는 소리쳤다. 놀란 유천이 준수를 말려보려 했 지만 쉽진 않았다. 윤호는 별로 현실 감각이 없는 모양인지 그냥 그대로 서서 그들을 지켜볼 뿐이다. "으흑... 말 할수가 없었어. 정말 미안해. 준수야....어흑..." "미안? 미안하다고... 하, 그때 나를 위로하면서 형은 어디서 뭐했어?!" "준수야....." "위선자!! 심창민 밑에서 소리지르면서 나를 위로한거니, 형이.. 형이 어떻게 이래!!" "미안해....으흐흑..." 재중은 준수를 붙잡고 계속 울기만 했다. 준수의 말은 틀리지 않았으니까. 조금전만해도 창민의 손에 달아올랐던 자신이 죽을만큼 미웠다. 준수도, 윤호도 떠올리지 않고 그에게 매달렸던 자신이 서글펐다. "진정해, 준수야. 후우-... 야, 초딩! 너 뭐하고 있어? 제제누님 좀 어떻게 해!" 유천은 준수를 재중에게서 억지로 떼어내며 윤호를 향해 소리쳤다. 그때야 윤호는 현실감이 든건지 미 동없이 있던 몸을 조금 움직였다. "아아아-악! 정말 싫어! 형같은건...차라리 죽어버려!" 유천의 손에 이끌려 공원을 벗어나던 준수는 악을 쓰며 소리를 질러댔다. 윤호는 점점 멀어지는 유천과 준수를 잠시 바라보다가 바닥에 꿇어앉은 실신직전의 재중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집에 데려다 줄게요." 새빨개진 커다란 눈이 윤호를 향했다. 윤호는 애써 그 시선을 피하며 등을 돌려 그를 업었다. 기운이 없 어서인지 윤호가 하는대로 재중은 가만히 업혔다. 물기 가득한 숨이 윤호의 뺨에 닿았다. "이런 나를...아껴 주어서....정말 고마워." 끊어질 듯 이어지는 재중의 말에 윤호는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루 아침에 동생도, 사랑도 잃어버린 재중이 안타까웠다. 창민이라는 남자와 얽힌 이 형제가 슬프도록 처연했다. 윤호는 목으로 뜨거운 것을 삼키며 조용히 재중의 집을 향해 걸었다. ** 아파트 놀이터에 앉아 준수는 한참동안 울다가 이제야 겨우 울음을 그친 상태였다. 유천은 준수의 마른 등을 토닥여주며 부어버린 그의 얼굴을 살폈다. "이제 다 울었어?" "......미안." 한참만에 준수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사과였다. 유천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사람 사이에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유천은 자그마한 준수의 손을 양손으로 감싸잡았다. "박유천은 김준수를 사랑해." 뜬금없는 고백에 준수는 유천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유천은 준수와 눈을 맞추고 싱긋 웃었다. "...그걸로 됐잖아. 안그래?" "......응." 믿음직스러운 저 미소에 준수의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 그래, 나를 아프게 했던 사랑은 이미 과거의 일이야. 심창민도, 김재중도...이제는 버려야하는 과거일 뿐. 아니, 깊은 곳에 묻어둘 작은 추억....그래, 그것은 추억이다. 조금은 아픈..나의 첫사랑. 하지만 지금 내가 사랑하는건 박유천이고, 지금 나를 사랑하는것도 박유천이야. 그래... 그걸로 된거야. ** 재중을 침대에 눕힌 윤호는 곁에 서서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나와버렸다. 아마도 창민이 곧 이곳으로 올것 같았고, 어쩐지 재중을 보고 있는것이 괴롭다고 느껴졌다. 재중과 창민, 창민과 준수, 그리고 준수와 재중.... 아슬하게 서로를 붙잡고 있는 세사람의 생각에 윤호는 머리가 아파왔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윤호를 힘 들게 하는것은 창민에게 매달리던 재중의 모습이었다. 단 한번도 본적없는 재중의 모습에 속상함보다 서운함이 컸다. 어느정도는 창민의 자리가 사라진줄 알았는데... 조금은 내가 들어갈 갈자리가 생긴줄 알았는데... '단 한숨간도 너를 잊어본적 없어.' 그의 목소리가 머리속을 맴돌았다. 윤호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윤호가 방을 나선후 재중은 눈을떴다. 이제 이 집으로 그 누구도 오지 않을것을 안다. 자신을 한껏 들뜨 게 했던 창민도, 방금 나가버린 윤호도... 이제 그 누구도 오지 않을것이다. '한순간도 널 잊어본적 없어.' 창민의 음성에 귓가에 쟁쟁했다. 그것이 당연히 나와 같은 의미인줄 알았다. 당연히 나처럼 사랑에 미련이 남아 3년동안 나를 그리워한 줄 알았다. 내 몸을 달아오르게 하던 손길에 나는 확신까지 했다. 그도 나를 사랑한다고... 윤호가 내게 왔을때도 난 그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다. 바보같이.... 준수가 달려오고 나서야 나는 창민의 말을 제대 로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랑으로 기억했던게 아니었음을... 나를 지독한 원망으로 기억했음을.. 말이다. 그는 내게 다른 사랑이 생기길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사랑에게 버려지는 고통을 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너무 미워.' 단 한번도 모진 소리 한적 없던 그 아이가 내게 밉다고 말했다. 단 한 순간도 잊어본적 없느냐고 묻는 그 질문에 나는 차마 그렇지 않다고 말 할 수 없었다. 그 자리에서 그를 잡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염치 없게도 내게 그렇게 잘해주던 그 아이가 더이상 나를 사 랑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굉장히 정말 굉장히 서운했다. 죽을만큼 서운했다. "......윤호야, 사랑해." 단 한번도 해주지 못한말. 그 말을 텅빈 방안에서 읊조려보았다. ** 지옥같았던 밤이 지나고 아무일 없었다는듯 다음날 창민의 사진전은 시작되었다. 아버지 대신 참석하게 된 윤호는 별로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한쪽 구석에 서있었다. "별로 재미없나봐?" 유명인사들의 접대를 하던 창민은 겨우 그들을 물리치고 윤호에게 다가왔다. 윤호는 별로 말을 섞고 싶 지않는듯 고개를 휙돌려 밖으로 나가버렸다. "재중인 어쩌고 있어?"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기어코 따라나와 묻는 창민에게 윤호는 짜증스럽게 톡 쏘아붙였다. 창민은 고개를 갸웃하며 윤호에게 다시 되물었다. "그럼 누구한테 묻지?" "당신이 어제밤 찾아갔을테니 잘 알거 아냐." "내가 왜 그를 찾아가? 내가 거기 갈 이유도 없는데-." 얄미울 정도로 차분한 창민이었다. 윤호는 인상을 쓰고 그를 노려보았다. "무슨 소리야?"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재중은 밤새 혼자 있었던것이 된다. 그런 일을 겪고 혼 자서 말이다. "후후, 뭐야. 내가 아직 그를 사랑이라도 하는 줄 알았던거야?" "......당신, 의도가 뭐야?" "글쎄-." 창민은 벽에 기대어 서며 담배 한대를 피워물었다. 사실은 재중을 한 번 보고 싶었던게 전부였다. 오랜만에 한국에 돌아와 어린시절 첫사랑을 보고 싶었던 순수한 의도였는데, 그를 수소문하던 중에 알게 된것이 윤호의 존재였다. 그것은 아마도 유치한 질투였 던것 같다. 내가 없는 곳에서 행복해 보이는 그에게 조금 화가 났었던건지도 모르겠다. "글쎄라니! 당신때문에 얼마나 괴로워 했는지 알아? 당신을 못잊어서 지금도 고통스러워한다고-!" "후우-. 아는 지모르겠지만... 내게 김재중은 그리 아름다운 기억이 아니야." "사랑했잖아!" "그래, 사랑했어." 하지만 그 사랑이 네가 생각하는 그런 달콤하고 아름다운 게 아니야. 적어도 내겐-. 그와 했던 사랑은 온통 슬픔이었어. 좋았던 기억보다 아팠던 기억이 컸어. 오랜 짝사랑과, 한사람을 버 리고서야 얻을 수 있었던 사랑이... 죄책감과 자괴감으로 사랑했던 나날이 아름답기만 할순 없었지. 그 런 고통스러운 사랑에게서 결국엔 버려진 내가..그를 아름답게 기억할수는 없었어. 아니, 그런걸 모두 감당하기엔.. 그때의 난 어무 어렸을지도 몰라. 어쩌면... 지금의 나도 마찬가지인지도 모르겠어. 생각에 잠긴 창민은 조용히 누군가의 얼굴처럼 뽀얀 연기를 길게 뿜어냈다. 윤호는 창민의 입에서 담배를 거칠게 뽑아 바닥에 던지며 소리쳤다. "당신은 걱정도 안돼? 어제밤에 그 난리를 겪고 혼자 밤을 보낸 그가 걱정도 안되냐고!!" "그렇게 걱정되면 네 녀석이 가보면 되잖아." "뭐라고?" "네 녀석도 결국엔 그와 함께 있지 못했잖아. 안그래?" 윤호를 향해 가늘게 눈을 뜨며 창민은 다시 담배를 피워물었다. 그런 그를 쳐다보고 있자니 윤호는 가슴이 터져버릴만큼의 답답함을 느꼈다. 그의 질문에 대꾸하지 못한 자신이 억울했다. 창민은 주먹을 꼭 말아쥐 고 자신을 노려보는 윤호를 힐끔 쳐다보고는 짙은 한숨같은 말을 흘려냈다. "그를 떠올리면 나는 숨쉬기 힘들만큼 가슴이 아파." "......" "그래서...... 김재중에게 심창민도 지독한 고통으로 기억되길 원해." 창민은 반도 태우지 못한 담배를 바닥으로 툭 던지며 벽에 기대어 서있던 몸을 똑바로 일으켰다. 윤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창민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희미하게 웃을 뿐이었다. 창민은 윤호를 지나치며 낮게 속삭였다. "너는...나와 다르길 빌어." 13. 내 안의 순결한 천사를 위해 윤호는 어두운 병실 복도에 앉아있었다. 손목시계 초침의 움직임까지 느껴질만큼의 적막함이 그를 짓눌렀다. 윤호가 재중의 집에 도착했을때 이미 재중은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약해질대로 약해진 몸이 그가 복용 한 다량의 수면제를 견디지 못한 모양이었다. 윤호가 급히 병원으로 옮긴 덕분에 큰 변은 당하지 않았지 만 잠시 눈을 떴던 재중은 정신적 스트레스가 컸던 탓인지 지금껏 잠에서 깨어나고 있지 않았다. "윤호야! 어떻게 된거야?" 뒤늦게 연락을 받고 준수와 유천이 달려왔다. 창민이게도 연락을 하려했지만 그만두었다. 두사람사이에 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아픈 감정선이 있는것 같았다. 굳이 그것을 자극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마도 창민은 아무것도 모른채 곧 미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들어가봐요." 잔뜩 갈라진 음성이 윤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준수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유천은 밖에서 문을 닫아주 었다. 아마도 어제밤 악담을 퍼부은 것에 죄책감이 들어 준수는 곁에 앉아 한참동안 울것이다. 그가 편히 울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넌 괜찮냐?" 윤호의 곁에 앉으며 유천이 물었다. 엄청난 폭풍이 순식간에 네사람을 할퀴고 갔지만, 그런것 치고는 대 체로 멀쩡한 정신에 윤호는 헛웃음이 났다. "후후, 박쌤은요?" "나야 뭐... 사실 아주 몰랐던것도 아니고... 제제누님일은 좀 쇼크였지만, 별로 달라질건 없어." 유천의 말을 들으며 윤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쌤이 저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밑도 끝도 없이 윤호가 물었다. 유천은 코로 길게 숨을 내쉬며 벽에 등을 기댔다. "나는......그냥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할거야. 원래 답이 없는 고민은 마음 가는대로 하는데 정답이거든." 가볍게 하는 말이지만 윤호의 마음에 와닿는 대답이었다. 처음부터 정답같은것은 없는 일이었다. 단지 말을 하지 않는 그가 측은했고, 그런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의 옛사랑에 항상 밀리면서 속상했던 지난 날들이지만,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가치있는 시간이었다. 전혀 나를 향하지 않던 눈이 서서히 내게로 왔을때 나는 세상을 얻은것 만큼 행복 했다. 그가 누굴 사랑하든 그런건 처음부터 상관없었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거니까. "흑... 윤호야, 형 일어났어." 훌쩍거리며 준수가 문을 열어다. 윤호는 튕기듯 일어나 병실안으로 들어갔고, 그를 따라 들어가려던 준 수를 유천이 붙잡았다. 준수는 손등으로 콧물을 닦으며 재중을 향해 눈인사를 해보이고는 유천을 따라 병실을 나갔다. "....괜...찮아요?" 윤호는 준수가 끌어다 앉았을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며 그를 살폈다. 재중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밤사이 많이 야윈 모습에 윤호는 명치 끝이 욱씬거렸다. 윤호는 앙상해보이는 재중의 손등에 손바 닥을 겹치며 조용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은...나 되게 유치한 놈이예요. 대범한척하긴 했지만 질투도 심하고 어리광도 심하고... 그런 내 모 습이 부끄럽다고 생각해본적은 한번도 없었는데......대장을 만나고 나서 어쩐지 그런 유치한 모습을 들 키기 싫었어요. 대장 앞에서는 항상 멋있고 싶고, 듬직하고 싶고.... 근데, 딱 걸렸네요." 거기까지 말을 마친 윤호는 그의 손에 머물러 있던 시선을 들었다. 재중의 커다란 눈이 일렁이고 있는가 싶더니 맑은 결정이 한줄기 넘쳐흘렀다. 윤호는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주며 침대에 걸터앉아 말을 이었다. "멋있지 않아도, 어른스럽지 못해도....괜찮아요?" "......" 재중은 입을 열어 격한 숨을 토해냈다. 하지만 음성이 되어 나오지 못했다. 윤호는 그런 재중을 안타깝 게 바라보다가 결국 그를 품에 당겨안았다. "애쓰지 말아요. 괜찮으니까. 항상 내가 곁에 있을테니까-." 귓가에 들리는 윤호의 음성에 재중은 눈을 감아버렸다. 스스로 생명을 포기하려 했던 대가로 하늘은 재중 의 목소리를 정말로 앗아가버렸다. 입을 닫고 만났던 윤호에게 이제는 정말 아무말도 해줄 수 없게 되었다. "...흐....으흐......" 서러운 울음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윤호는 울지 않으려 애쓰며 그를 더욱 꼬옥 끌어안았다. "울지 말아요. 내가 잘못한거야. 내가 당신 못지켜서...." 윤호는 어깨를 뜨겁게 적시는 눈물에 마음이 아려왔다. 그 와중에도 고개를 젓는 재중을 윤호는 숨이 막 히도록 껴안았다. 그의 등을 차분히 쓸어내리면서 그가 진정할때까지 머리를 쓰다듬었다. 격하던 숨이 서서히 진정되어갈때쯤 윤호는 그를 품에서 떼어냈다. "대장......" 윤호의 부름에 재중은 고개를 저었다. 윤호는 의미를 알지 못해 잠시 그를 응시했다. 재중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윤호는 그 손가락을 바라보다가 숨을 내쉬듯 웃으며 양손으로 재중의 볼을 감쌌다. "...재중아." 재중은 가늘게 떨리는 입술을 한껏 끌어올리고는 눈을 내리감았다. 사랑한다고 내 목소리로 말해주지 못해서.. 단 한번도 말해주지 못해서...많이 후회스럽다. 감긴 눈꺼풀이 작은 떨림을 만들어냈다. 윤호는 그 눈에 입술을 살짝 눌렀다 떼며 속삭였다. "네 몫만큼 사랑한다고 말해줄게." 재중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끌어올려진 도톰한 입술에 그리운 윤호의 입술이 와닿았다. 끈적하지 않은, 조금은 서툴고 어색한 입맞춤. "내 기억속의 김재중은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해. 네 기억속의 정윤호도 그랬으면 좋겠어. 정윤호만의 순결한 김재중을....영원히 사랑해." 맞닿을 만큼 가까이 붙은 입술로 만들어내는 속삭임은 세상 그 어떤 고백보다도 그를 감동시켰다. 재중은 윤호의 손바닥을 자신의 왼쪽 가슴에 가져와 붙였다. 빠르게 뛰는 심장이 손바닥에 느껴졌다. 재중은 한쪽 팔로 윤호의 목을 감고 입술을 맞붙였다. 윤호의 손바닥 안에 느껴지는 심장박동이 조금더 빠르게 뛰었다. '사랑해, 정윤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