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준수/재중] 김 준 수 접 근 금 지 작가 : 열두개의달 연재기간 : 10월 23일 ~ 12월 24일 ============================================= 1. 붉은 조명 밑, 끈적한 재즈가 흘러나오는 한 칵테일 바(Cocktail Bar)에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마티니 두 잔으로 한 시간을 뻐팅기고 있는 그를 사람들은 흘리는 시선으로 한 번씩 힐끔힐끔 보곤 한다. 한 시간 동안 아홉 명의 여자들이 대시(dash)를 했지만 그는 정중히 사절을 하고 혼자 앉아 있을 뿐이다. 바텐더 교대시간이 왔는지 바텐더가 싱긋 웃으며 물러났고 잠시 뒤 앳돼 보이는 알바생이 들어온다. “아......... 또 오셨네요........” 그는 알바생을 한 번 힐끔 보고선, 술잔을 입에 갖다 댄다. 그는 흔히 말하는 단골손님이었다. “여긴 술이 공짜거든요.” “네?” “............ 농담이에요.” 실로 그랬다. 그의 친구가 부업으로(본업은 학생;) 벌여놓은 칵테일 바였고 그가 그의 친구를 자꾸 갈궈 대는 바람에 늘 그는 공짜 술을 마셨다. 다른 손님들의 주문을 받고 화려한 손놀림으로 칵테일을 만들던 알바생은 그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단 사실에 귓불까지 빨개져, 위태위태하게 칵테일을 잔에 따른다. “손님, 주문하신 핑크 레이디 나왔습니다.” 여자 손님은 잘생긴 알바생이 싱긋 웃으며 건네주는 술잔을 박고 자신에게 웃어줬다는, 자신은 뭔가 특별하다는 말 같지도 않은 자뻑 증세에 도취되어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더군다나 얼굴까지 빨개져서. 수줍은 듯 웃음을 짓는 알바생이 자기에게 빠졌다는 생각을 하는 게 틀림없다. 하지만 아랑곳 않고 다시 알바생은 그에게 시선을 돌린다. “아까 보니까 여자 분들을 마다하던데- 왜 그러셨어요?” 내놓으라는 재벌가 자식에 미모 또한 출중한 그런 팔방미인들을 마다한, 그것도 아홉 번씩이나 거절한 그가 의문스러웠나보다. 그는 무뚝뚝한 표정 그대로 대답을 한다. “............ 관심 없으니까.” 라는 간단명료한 대단에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컵을 닦는다. “.......... 저, 오늘 저 알바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실 수 있으세요” 멍하니 테이블만 응시하던 그가 숨을 크게 들어 마시며 ‘그러죠.’ 라는 말을 남긴다. . . . 침묵이 스산한 방 안을 감돌았다. 그의 입술이 눈에서 콧잔등으로, 콧잔등에서 뺨으로, 뺨에서 서서히 진로를 옮겨가며 입술에 진하게 맞물렸다. 자신의 입안에서 둘의 혀가 엉키자, 정신이 혼미해져 조심스럽게 팔을 들어 그의 목 뒤로 감았다. “하아............. 이름이 뭐에요?” “.............. 준수...........” “............ 난 재중이에요......... 김 재중.........” 입술을 서서히 떼어내자 재중의 입가는 타액으로 범벅이 되었다. 그는 혀로 슬며시 재중의 아랫입술을 핥고는 아래로 내려와 턱을 슬며시 어루만졌다. 입술로는 턱을 약하게 씹으며 차가운 손을 재중의 가슴팍으로 집어넣어 재중의 가슴을 더듬거렸다. 그리고 반대편 손으로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겨우 벗겨진 셔츠를 바닥으로 떨어뜨리며 다시금 눈을 감는 재중이었다. 그가 그런 재중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고, 재중의 복부로 입술을 옮겨 진하게 쓸어주었다. 준수는 재중의 신음소리에 거친 숨결을 내뱉으며 재중의 허벅지에 입술을 묻었다. 재중의 허리가 심하게 뒤틀려졌고, 그에 따라 그의 애무도 거칠어졌다. “하....... 아.......” 그의 손길이 재중을 애타게 만들었고 점점 격해지는 그의 손길에 재중은 정신없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그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재중의 손길이 자극제가 된 듯 그의 호흡은 점차 격해져가고 재중의 매끈한 허벅지 사이를 배회하던 그의 입술이 다시 재중의 복부로, 쇄골로 이어졌다. 침대의 시트를 움켜쥐고 있던 그의 손을 재중의 허벅지 사이로 손을 옮겼다. “헉!!!” 그의 손가락이 재중의 안을 배회하며 조금씩 그 숫자를 늘려가자 재중은 아픔이 느껴지는 듯 그의 어깨를 꽈악 움켜잡았다. 준수는 자신의 어깨에 느껴지는 통증으로 재중의 아픔을 대충 감지해냈지만, 여기서 멈출 순 없었다. 이미 흥분할 대로 흥분했고 재중 역시 마찬가지였다. 재중은 이미 사정을 한 듯 시트가 재중의 정액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그는 질끈 감은 재중의 눈가에 키스를 하고 손가락을 빼어냈다. 재중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자 그는 자신을 재중의 품 안으로 밀어 넣었고 그 고통으로 인해 제대로 신음소리도 내지 못하는 재중이었다. 그 고통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재중의 위에 쓰러져 버린 그의 숨소리가 재중의 귓가에 닿았다. “하아......... 하아......” 둘의 거친 숨소리만 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을 뿐이다. “준수씨?....” “..............” “저, 예전부터 준수씨 좋아했었는데....” “.........” “받아주실 수 있으세요?” 재중은 희미하게 물론- 이라는 대답을 들은 후 정신을 놓았다. . . . “선배님!!!!!”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는 한 대학의 캠퍼스를 유유히 걸어가던 그를 누군가 급하게 불러댄다. 그는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냥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갈 뿐이다. “김 준수 선배님!!!!‘ 겨우 그를 따라 잡은 아직 신입생 티를 벗지 못한 학생이 그의 어깨를 붙잡고 불러 세운다. “뭐 이렇게 빨라요?” 그는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뺀다. 물론 CD조차 들어있지 않은(그의 건망증으로 인한) 재생되지 않았던 CDP였다. “.......... 무슨 일이지?” 아무 표정의 변화 없이 용건을 재촉했고 갑자기 무안해진 그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아, 저기. 지난번에 술 대신 마셔준 거 감사했어요.” “............” 하지만 정작 그는 기억하지 못 하는 듯 했다. “저 박유천이라고 하는데.... 기억하세요?” 그는 역시 대답 없이 그를 빤히 보고만 있을 뿐이다. 반응이 영 시원찮은 것이 기억하지 못하는 듯 했다. “그럼, 전 박유천이라고 하는데, 지난번 은혜에 보답 할 수 있을까요?” 유천은 정중히 말했고 그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약속을 잡은 뒤 밝은 얼굴로 뛰어가는 유천이 보였고 그 뒤에 남겨진 준수의 곁으로 누군가 다가온다. “야, 김 카사!” 그를 ‘카사’라고 칭하는 그는 그의 ‘불알친구’였다. 집안도 비슷했고 부모님끼리도 서로 친분이 두터웠던 터라 둘은 늘 함께 지냈고 지금까지 함께 해왔다. “쟨 누구냐?” “............. 카사라 그러지 마........” “민감하기는...” 자신을 그렇게 표현한 것에 불만을 표하던 그는 주머니에 차 키를 꺼낸다. 그리고 리모트 컨트롤 으로 근처에 세워져 있던 자신의 차에 시동을 건다. “어젠 집에 안 들어가고 뭐했냐?” “........... 너 알 바 아니야.” “정 떨어지게 군다. 또......... 너 또 나의 BM클럽에 가서 술 마셨지?” 아마도 이 사람이 준수가 매일 공짜 술을 마시던 BLUE MOON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칵테일 바의 사장인 듯 했다. “거기 알바생이 나한테 찍접거려.” “.............” “관리 잘해. 임마”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타려고 하자, 그의 친구가 얼른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맨다. “......... 뭐야?” “나 태워줘.” “너 네 집 멀어-” “너 네 집 가는 길목에 세워줘, 나 지난주부터 과외 뛰었어.” “심심하냐?” “아빠가 가게 열 때 필요해서 가져갔던 돈 다 갚으래, 안 그럼 가게 압수한대.” 술값을 몇 배로 쳐 받아먹어 수입이 꽤 짭짤한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닌가 보다. “거기서 나온 돈은 내가 결혼 자금으로 쓸 거야.” 무려 결혼 자금 이란다. “나 과외하는 얘 귀여운데 소개 시켜줄까?” “됐어, 나 사람들이랑 부대끼는 거 싫어” “완전 천상천하유아독존이구만!!!! 너 소개시켜 주려니까 아깝다, 여기 세워줘-” 길가에 차를 세웠고 그가 태워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남긴다. “야,정윤호!!” “왜?” “순진한 얘 꼬드기지 마!!!” “야, 야!!!! 내가 너냐!!!!” 이 말을 저런 카사새끼한테 들어야한다고 생각하니 말까지 더듬으며 삿대질을 했지만, 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다시 엑셀을 밟는다. . . . 과외를 마치고 가게를 둘러보러 온 윤호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기도 안 차는 듯이 쳐다보고 있다. “야! 그만해!!!” 준수는 무표정으로 벽에 기대어 재중이 퍼붓는 거친 입맞춤을 다 받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윤호의 목소리에 재중은 귀까지 빨개져 아직 교대시간이 되지 않았지만 급히 자리를 떴고 탈의실엔 준수의 윤호, 단 둘이 남았다. “진짜 니가 안 꼬드겼어?” “그래, 임마.” 아까 현장을 덮쳤을[?]때도 오히려 그가 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으니 달리 뭐라 말하지도 못하는 윤호이다. “진짜 너 목걸이 하나 하고 다녀야겠다.” “............ 무슨 목걸이?” 목걸이라면 이미 하고 있다며 풀어진 셔츠 사이로 반짝이는 십자가 목걸이를 검지로 탁 튕겨주었다. “그거 말고......... 접근 금지 푯말....” “뭐?” 김 준 수 접 근 금 지 ------------------------------------- 2. “준수씨, 오늘 시간 되요?” “............. 나 오늘 힘없는데.........” “아니, 그런 게 아니라!!” “........ 여기서 나한테 작업 걸면 잘릴텐데-” “지금 아침이라 아무도 없잖아요” “쟤 있잖아요, 쟤” 고개를 돌리며 가리키는 곳엔 윤호가 둘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다. 새벽 4시까지 영업이라 청소를 하니 어느새 시계는 5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해가 짧아져서 그런 지 아직은 어두컴컴하다. “넌 재중씨 데려다 줘, 난 나 알아서 갈 테니까” “너 뭐타고 가게?” “원래 차 여기 세워 뒀었어.” “그래..... 그럼 가라........” 오픈시간 2시간 전인 3시에 다시 만나자는 이야기를 하고 서로 갈 방향으로 간다. “......... 그 쪽은 집이 어디죠?” “김 재중이요.” “...........” “내가 볼 땐 내가 형이 확실한 거 같으니까........ 그냥 편한 대로 불러요.” “............. 김 재중 씨. 집이 어디죠?” 그가 이름을 불러주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들 뜬 재중은 한 층 밝아진 표정으로 말한다. “나, 아까 전에 데이트 신청 했었는데.......” 준수는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아, 곤란하시면-” “아뇨, 뭐. 하고 싶은 거 있어요?” “우리 한강 둔치 가요” 이제 곧 겨울이라 날씨가 꽤 쌀쌀할 텐데......... 얼어 죽으려는 속셈일거다. 아마. . . . 마냥 좋은 듯 아직 가로등 불빛에 의존하여 길을 걷는다. 강바람이 면상을 때려대지만 별 반응은 없다. 벤치에 앉아서 바람만 맞으며 별 의미 없이 시간을 때우고 있다. “어깨에 기대어도 돼요?” 준수는 아무 뜻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꿈같아요.” “.........” “내가 준수 씨 어깨에 기대어 있다는 게.........” 만족한다는 표정으로 동이 터 올 때까지 어깨에 기대 움직일 생각조차 않는다. . . . “선배님!!” 의과대 건물을 유유히 걸어가고 있는 준수를 또 그 신입생이 부른다. “여기 있으시면 어떻게 해요!!” 온 캠퍼스를 다 돌았는지 땀에 젖어 있는 T셔츠는 물론이거니와, 입에선 입김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앞머리가 땀에 의해 헝크러져서는 숨을 헥헥 거리며 그를 부른다. “저, 오늘 제가 보답해드리고 싶다고 그런 거 기억하시죠?” 준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 반응에 기쁘다는 듯 소매 끝으로 땀을 훔치며 싱긋 웃는다. “그럼 오늘 8시에 BM에서 봐요.” 준수는 BM에서는 곤란하다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 땐 이미 저만치 사라지고 난 후였다. “거, 되게 바쁘네.” 다리에 10kg짜리 추라도 달린 듯한 걸음으로 걷는 준수도 조금씩 속력을 내서 걷기 시작한다. . . . 둘의 앞에는 블루 하와이와 오렌지 블러섬이 놓여있다. 이미 온 지 30분 째로 돌입했다. 처음 20분간은 메뉴판만 뚫어지게 바라보며 무엇을 고를 것인지 골똘히 생각을 했었고, 이제 겨우 칵테일을 받아 마신다. “그 때, 저 술 잘 못 마셔서 난감했었는데 흑기사 해주셔서 감사했어요.” 별 거 아니라는 듯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블루 하와이를 한 모금 마신다. 어색한 기류가 흐르고 어색한 게 싫은 지 유천의 머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할 지를 생각하느라 빠르게 회전하고 있다. “머리 달그락 거리는 소리 여기까지 들려.”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었지만 유천은 그 한마디에 얼굴이 후끈 달아올라 무의식적으로 손 부채질을 하고 있다. “왜 그렇게 보답해주고 싶어 안달이 났어?” “네?” “은혜에 꼭 보답해 주고 싶다며.” “아.......... 그 때 정말 감사해서요.” “다른 속셈 있는 거 같은데........?” 귀신같다. 정곡을 찔린 유천은 말을 더듬거리기 까지 한다. “그, 그런 거 없어요.” 준수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유천이 모르게 시계를 본다. 9시 50분........... “뭘 힐끔 봐요?” “.......... 아니........” 휴대폰을 얼른 주머니에 집어넣고 한 쪽 손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는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윤호가 콧방귀를 뀐다. “얼씨구- 저 새끼는 매너만 좋아.” 누군가와 만났을 때 시계를 보며 그 사람과의 만남이 지루하거나 다른 약속이 있는 것으로 착각 할 수 있으며 제일 중요한 건 상대방이 불쾌하게 느낄 수도 있다는 이유로 시계를 잘 보지 않는 준수이건만 무언가 걸리는 게 잇는지 9시 50분이 되자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누구 찾아요?” “아...........” 재중이 밑 입술을 깨물며 준수의 어깨를 툭툭 친다. “나 찾은 거 에요?” 준수가 유천을 힐끔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친군가 봐요?” “아뇨, 저 학교 후배에요” 유천이 당돌하게 재중과 눈을 마주치며 말했고 둘 사이에 이상한 시선이 오간다. “오붓한 시간 보내세요.” 삐친 듯한 재중은 얼른 탈의실로 들어가 버렸고 준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에요?” 감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가슴에서 억누르며 유천은 말을 이었고, 준수의 눈은 여전히 코너를 도는 재중을 좇으며 말한다. “......... 애인.........” 유천의 입 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 그렇군요.........” . . . 재중의 일이 끝날 때 까지 말없이 구석에서 지켜만 보며 있다가 시간이 다 되자 재중의 외투를 챙기는 준수이다. “이거 안 입고 가요?” “...........” 얇은 면 티만 입고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는지 잠시 그 자리에 멈춰 갈등한다. “아까 그 사람 누구에요?” 자신이 생각해도 유치했는지 말을 해 놓고 다시 주워 담을 방법을 생각한다. “........ 자기가 후배라 말했잖아요.” “근데 그 사람한테는 반말 쓰고 나한텐 존대 써요?” “............ 형이라면서요........” 말도 안 되는 재중의 트집에 준수는 겨우 짜증을 참으며 말을 이었다. “왜 만났는데요?” “......... 김 재중씨?........” “............” “사람 일이 있는데 그 정도는 만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 “너무 구속하려 드는 거 아닌가?” “..........” “난 그런 거 싫어하는데....... 그냥 여기서 끝낼까요?” “.........” “세상 사람들 모두가 우리 같은 사람도 아닌 거고.” 아무 대답이 없는 재중을 힐끔 쳐다보았다. “후우..........”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뒤에서 재중의 두 어깨를 감쌌다. “........ 왜 울어요?” “헤어지잔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에요.” 가늘게 떨리는 음성을 감추려고 허벅지를 꼬집으며 목에 힘을 꽉 주어 말하는 재중이다. “..........” “......... 진짜 나랑 헤어 질 거 에요?” “............” “아니죠?” “........... 네.......” 여기서 헤어진단 말을 했다면 재중이 실신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비틀거려 가만히 서 있기가 힘들 정도니까....... “무슨 사람이 이렇게 약해요?” 재중을 부축하며 준수가 말했고 대답할 힘조차 없는 재중은 희미한 미소를 지을 뿐이다. “........... 야, 김 준수......” “............ 주정이에요, 지금?” “........ 나 힘 세!!!” 준수를 벽으로 밀어 붙이고 입을 맞춘다. 준수는 재중의 허리를 휘감아 자신에게 밀착시켰다. 그리고는 웃으며 이를 앙 다물고 열어주지 않는 준수에 당황한 재중은 잠시 하던 걸 멈췄다. “......... 왜 막아요........” “......... 뚫어 보라고-” 어이가 없어 실소를 뱉은 재중은 준수의 다리 사이로 자신의 다리를 들어 올려 정중앙에 꽂는다. “허억-” 심한 자극이 된 탓에 준수는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가소롭다는 듯한 조소를 흘린 재중은 다시 준수의 입술을 찾아 헤메었다. 한참 뜨겁게 달아오른 둘의 키스 도중에 밑에서 들려오는 소리에도 전혀 굴하지 않는다. “아, 웬 파리야!!!!!” ------------------------------------------ 3. “우리 진지하게 수업을 해보자고!!” “배고파서 못하겠어요.” 아까부터 드러누워 배고프단 소리만 연발 해대며 일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학생 때문에 골치 아픈 윤호이다. “야, 심씨!” “왜요, 정씨.” “나는 선생님이고 넌 학생이야!!!” “언제 유행했던 건데..........” “우리는 사제지간이고 공부를 해야지, 찔찔아!” “찔찔이라 그러지 마욧!!!!” “시끄러, 넌 나의 영원한 찔찔이야-” “엄마, 윤호형이 나 찔찔이라 놀려.” “선생님이라니까!!” 원래부터 친분이 두터웠던 사인지 도저히 수업 진행이 되지 않는다. “그럼 질찔아-” “찔찔이 아니래도!!” “수업 다섯 번 잘하며 칵테일바 데려가 줄게.” “오키!!! 몇 쪽 펼까요?” 언제 그랬냐는 듯 능청스럽게 일어나 책을 편다. 미성년자 출입시켰다가 영업정지나 먹지 말지, 정 사장? . . . “책 읽어요?” “보면 몰라?” 오랜만[?]에 찾아온 휴식시간을 깨뜨리자 열이 오른 준수가 신경질 적으로 대답한다. “방해 했어요?” ‘나 매우 불쾌함’이라는 게 딱 드러나는 표정으로 그를 응시한다. “........ 아, 죄송해요.” “됐어, 또 무슨 볼 일이 남았지?” “............ 그 때 내가 다른 속셈이 있는 거 같다면서요.” “........” “친하게 지내자구요.” “........... 나쁠 건 없지만........” “..........” “오늘은 좀 곤란해........” 책을 덮고 안경을 벗고서 벤치를 일어선다. “선약이 있어서-” 유천이 바(Bar)에서 보았던 그 남자가 이쪽으로 유유히 걸어오고 있었고 유천의 미간이 좁아진다. “많이 기다렸어?” “.......어-” “아니라고 해주면 덧나냐?” 어제까지만 해도 경어를 쓰던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가 의심스러운 유천이다. “아- 그 때 그 분이시네. 안녕하세요.” 재중의 인사를 떨떠름하게 받은 유천이었고 준수와 재중이 조금씩 그에게서 멀어져간다. - 거긴 내 자리가 될 거야. . . . 캠퍼스를 걸어가는 동안 마음이 계속 찝찝한 재중이다. 떨떠름한 표정에 뾰루퉁 해지기도 하고.......... 그 이유인 즉, 걸을 때마다 준수에게 인사해오는 수많은 선, 후배들 때문이다. 준수의 취향을 알기 때문에 여자가 말거는 건 100%허용이지만 남자가 아는 척 하면 심기가 무척 불편하시댄다. “인기 많아, 좋겠네~” 비꼬듯이 말하자 준수는 그런 재중을 보고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왜? 난 형 밖에 없어-” “형이라 그러지마-” “왜?” “그럼 우리 왠지 불륜사이 같아.” 불륜 맞잖아!!; “너!!!! 가 괜찮은 거 같다.” “언제는 자기 나이 많으니까 까듯이 하라고 선전포고를 하더니.......” “나 마음만은 20살이야~” 이젠 막무가내로 나가는 재중이다. . . . “이만하면 데려가 줄 때도 됐는데-” “시끄러- 이제 두 번이나 남았어.” “아, 정선생!!! 나 기특하지도 않아?” “두 번 남았다니까!! 얼른 여기 봐-” “아, 정 선생님~ 선생님~ 잘쌩긴 우리~” “좋아쓰!!!” 뭐가 좋은 게야............. . . . “고딩 티 내지마...” “응, 대딩-” 결국엔 수업이 끝나고 바로 와 버렸다. 바에 앉아 기다리란 말에 창민은 쪼로로 달려가 빈자리에 걸쳐 앉는다. 10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각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부쩍 붐볐고,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적힌 문 쪽에서 누군가 입가를 소매로 스윽 닦으며 나와 창민의 옆에 앉는다. 그리고 자리를 비웠던 바텐더가 미소를 지으며 나온다. “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셨죠? 주문하시겠어요?” 재중이 웃으며 창민에게 메뉴판을 건넸고, 창민은 고민한다. 큰 고민 끝에 플랜터즈 펀치를 주문했고, 바텐더는 럼, 과일 쥬스, 비터, 그레나딘과 얼음을 쉐이커에 넣고 흔든다. 그리고 옆에 있는 손님에게 눈짓을 하더니 알렉산더를 내놓는다. 창민은 잔을 가볍게 집어 드는 손님을 한 번 힐끔 쳐다본다. 우와......... 잘생겼다........... 만 연발해 나올 뿐이다. 그리고 외투를 벗어놓고 창민에게로 오던 윤호는 둘이 히히덕거리는 게 못마땅한지 얼굴을 찡그린다. “참, 할 짓 없다.” “아, 너 왔냐?” 무언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윤호를 바라보는 준수와 재중. 둘이서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자 당황하는 윤호이다. “차, 창민아- 인사해- 형 친구, 준수” 준수- 라는 이름에 입에 물고 있던 플랜터즈 펀치를 다 쏟아낼 뻔 했다. 자세히 보니 닮은 거 같기도 하고- “준수형- 나 몰라요?” 친한 척 어깨를 툭 치며 아는 체를 한다. “나, 창민이요!!! 형 졸졸 따라다니던 찔찔이-” 결국 자신이 찔찔이란 것을 한순간에 인정해버린 창민이다. “아- 찔찔이- 오랜만이다.” 4살이나 어린 관계로 둘은 유년시절 창민을 (코)찔찔이라 부른 듯 했다. “형, 이사 가고 한 번도 못 봤는데- 반가워요.” “그래, 찔찔이 너도 많이 컸다.” 얼굴이 발그레 발그레해서 반갑다고 준수에게 추근[?]대는 창민이 못마땅한 듯한 재중이다. “형- 진짜 반가-” 말도 다 끝내기 전에 뒤로 나자빠지려는 걸 윤호가 받아낸다. “얘 뻗었다.” 황당한 듯 셋이서 한참을 쳐다보고 있다가 재중은 또 볼이 발그레 발그레해서 핑크레이디를 원하는 숙녀손님의 주문을 받으며 셋을 힐끔 쳐다보았다. “윤호 너는 가게 봐야되니까, 내가 집에 데려다주고 올게.” “그럴래?” 가슴이 철렁한 재중이다. 아까 발그레 발그레해서 추근대던데 찔찔이가 준수를 좋아한다는 자기만의 착각 속에 빠진 재중은 찔찔이가 준수와 둘이 있고 싶어서 ‘쇼’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미친다. “안돼요!! 사장님이 가세요!!” “너무 한 거 아니에요. 재중씨?” 윤호가 섭섭하단 듯 말했고, 준수도 자신이 다녀오겠다며 자신보다 덩치가 더 큰 창민을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윤호가 재중을 빤히 쳐다본다. 무안한 듯 재중은 그 시선을 피하려고 애 쓰는 중이다. “일 안하고 연애만 하며 자를 거에요.” “..............” “그리고 준수한테 질투 같은 거 안 통해요.” “..........” “질투 같은 거 한번도 못 해보고 자랐으니까-” “하지만 지난번엔 기다려서 내 기분가지 풀어 줬는걸요.” “그건 내가 화 풀어주고 가라 그래서 그런 거고......... 이제 꼴 보기 싫어서 그 짓 못할 거 같고.....” “..........” “쓸데없이 이리저리 잘 꼬이는 애에요.” “.......찍쩝대니까 그러겠죠.” “자기감정 표현 같은 거도 잘 못하는 얘가 그런 걸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 왜 화를 내세요?” “답답하니까 그렇죠, 난 쟤랑 20년 친구니까 웬만한 건 다 알아요, 그러니까 이리저리 꼬이는 건 그냥 눈 감아줘요. 그게 편하니까-” “사장님이나 잘하세요!!! 애인도 없으면서-” 괜히 심술이 난 재중이 윤호가 한 말을 일제히 무시하는 듯이 받아쳐낸다.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재중을 한참 바라본다. 앙탈은..........;; . . . “야, 찔찔아. 여기가 너 네 집이야?” “여기- 어디서 많이 본 덴데?” “너 네 집 아냐?” “아, 맞다- 우리 집....... 우리 집은 4차원 공간 속에 떠돌아다니는데?” “맛이 갔냐?” 박햏햏만 마셔도 취하는 창민이 칵테일을 마시고 멀쩡할 리 만무하다. “형- 내가 어릴 때 결혼 해달라고 쫓아다녔는데 기억나요?” “응, 기억하지.. 허억- 뭐 먹고 이렇게 컸냐? 몇 호지?” “나 혼자 사는데-” “아, 그래......” “형도 같이 살아요. 나 무셔~ 밤마다 귀신이 나올 것만 같아요~~ 꺄아아앙~” 제대로 취했다. 허밍까지 나오는 걸 보니. 겨우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어 윤호에게 전화를 건다. “야, 얘네 집 몇 호라고 했지?” -아, 2709호 “허억- 뭐야, 아파트 무너지면 엄청 나겠다.” -그런 소리 밖에 안 나오냐? 얼른 와- 재중씨 괜히 나한테 앙탈 부려. 너 없으니까- “찔찔이가 자꾸 주정해서 잘 못 끌고 가겠어.” 창민이 휴대폰을 빼앗아 든다. “나 작업 중이야. 끊어!!!!” 씨익 웃으며 휴대폰을 자신의 주머니에 넣는다. “휴대폰 줘야지.” “안 돼. 압수야. 누가 수업시간에 전화하래!!” 할 수 없다는 듯 준수는 주먹을 폈다, 쥐었다 하며 힘 조절을 하더니 팔 부분의 급소를 꾸욱 누른다. 악- 하는 소리를 내며 창민은 정신을 잃은 듯 했다. 몸이 추욱 늘어져 힘이 배로 들었지만, 그 놈의 주정을 안 하니 훨씬 수월하다. 2709호 앞에 도착해 창민의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동전과 함께 집 열쇠가 나왔고, 벽에 창민을 기대어 놓고 문을 연다. 아늑한 실내가 보이고, 추운 실외와는 달리 따뜻한 바람이 새어나오는 집 안에 들어오니, 준수도 편안한 지 창민을 침대에 눕혀 놓고, 한 참을 서성인다. “준수형, 준수형” “........... 왜-” “내가 결혼 해달라라고 그랬잖아요.” “........ 오냐. 그 말 좀 그만 해........ 나 니가 그 말 해서 이사간 거 모르냐?” “........... 진짜요?” “..... 뻥이지..........” “딴다다단-” 잠꼬대인가보다. 혼자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이내 얼굴이 픽 돌아간다. 그리고 준수도 창민의 집을 나와, 윤호에게 앙탈을 부리고 있을 재중에게로 향한다. ----------------------------------------- 4. 곰곰이 생각해보니 자신이 별 거 가지고 질투를 한다는 생각이 드는 재중이다. 열두시가 거의 다 되어 바에 도착한 준수를 희미한 미소와 함께 반긴다. “잘 데려다 줬어?” “......... 응......” 윤호는 얼레?- 하는 말을 뱉으며 입이 딱 벌어진다. 자신이 했던 말이 통했단 뜻인가? . . . 집에 가기 싫다고 생억지를 부리는데 당해 낼 재간이 없던 주수는 결국 재중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다. “우와, 집 크다- 어머니 아버지 안 계셔?” “계셔-” “근데? 근데 나 데려와도 돼?” “험한 일 하시는 분들이라 너무 피곤해서 웬만해선 잘 안 깨.....” “험한 일?” 재중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손뼉을 친다. “깡패?” “깡패만 험한 일이냐?” “마약 밀거래?” “아니야........” “혹시 살인 청부업자?” “아니라니까.....” “그럼 험한 일이 또 뭐 있지?” “세상 사는 게 다 험하지 뭐...........” 현관문이 열리자 좋은 향기가 집안에서 진동을 한다. “우와- 넌 집에도 향수 뿌리냐?” “그거 다 불량품이야.” “어?” “그거 불량훔 주워온 거야..” “니네 혹시 집만 좋아?” “그럴지도-” 거실에 있으면 혹시 준수 부모님이 깰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재중은 얼른 준수의 방으로 들어간다. “우와, 이거 다 니 사진이야?” “......... 보지마-” “왜?” “보지 마- 이리 와봐-” 준수가 자신의 무릎을 치며 앉으라고 하자 재중은 씨익 웃으며 엉덩이뼈로 준수의 허벅지를 찌른다. “억-” 준수는 짧은 신음 소리를 내며 재중을 침대로 내팽겨쳤다. 재중은 재밌다는 듯 계속 웃고만 있고 준수는 그대로 누워버린다. “나........ 잘 건데.......” “... 그럼 나도 잘 거야.” “우리 엄마 일어나면 나한테 뽀뽀하러 오는데-” “그럼 숨지 뭐....” “엉덩이도 두들겨 주고-” “보고만 있지 뭐.....” “데리고 나갈 걸?” “어쩌라고!!” “괜찮아- 나 우리 엄마 앞에선 안 서.” “나도 우리 엄마 앞에선 안 서!!!!” 말도 안 되는 준수의 말에 재중은 어이가 없다. 그리고 한참 눈을 감고 아무 말 없는 준수의 머리카락을 잡아 당긴다. “자?” “아니-” 준수의 대답이 들렸다. “그럼 뭐해?” “.... 생각....” “무슨 생각 하는 데?” “너랑 같은 생각...........” “...... 그럼 나랑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 하겠네?” 라는 그의 능청스런 말에 피식 웃으며 눈을 흘긴다. “난 그거 이상인데?” 저질- 이라는 말을 하며 준수를 끌어당긴다[?] “저질을 왜 끌어 당기냐?” “저질스런 행동 해 보라고-” 재중은 콧방귀를 뀌는 준수의 윗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점점 밑으로 내려와 아랫입술도 조심스레 빨아 당겼고, 물컹한 느낌이 들자 재중은 눈을 감았다. 준수는 재중을 자신에게 밀착시켜, 허리를 감았다. 하지만 재중은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슬리퍼 끌리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튕겨나갔다. “왜?” “니네 이머니 아버지 깨신 거 같아.” 준수는 시계를 보더니 시계 침이 6시를 가리키자 그런 것 같다며 헝클러진 머리를 바로 만졌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역시 준수의 어머니가 얼굴을 빼꼼이 내밀며 아침 인사는 건넨다. “아들- 일어났어?” “아... 어-” “친구 왔네.” 재중은 뻘쭘하게 안녕하세요- 를 외쳤다. “놀다 가요.” 재중은 준수 어머니의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그저 방바닥만 응시하며 고개를 숙인다. 준수의 부모님이 일직 집을 나가시자 겨우 맘을 놓는다. “왜 그렇게 쫄아있어?” “죄스런 마음에........” “...... 뭐가?” “남에 집에 새벽에 찾아 온 거-” “...............” “그 이상 미안해지면..... 우리 꼭 불륜 같아서.....” 불륜이야................!! . . . 안 끼면 심하게 째려보겠다고 협박을 해대는 바람에 같은 과 학생끼리 술자리를 가지고 난 준수는 2차에 가자는 말도 뿌리치고 생활이 되어버린 ‘애인 알바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를 하러 간다. 본의 아니게 새벽 4시나 되어서 바에 도착한 준수는 같은 과 학생들의 째림 대신 김 재중의 째림을 몸이 뚫어지도록 받고 있다. “눈 돌아가겠다.” “전화 했었는데= 다른 놈이 받길래 얼른 끊었어” “아.............. 나 지난번에 찔찔한테 폰 뺏겼어.” “찔찔이?” “지난 번에 여기서 뻗은애- 수업시간에 전화하면 안된다면서 가져가던데?” “전화를 해 줘야지...” “윤호가 그런 말 없었어.” “뭐?” “....... 아니야......” 청소를 도와주겠다며 팔을 걷어 부친 준수의 시야엔 낯익은 등짝이 보인다. “...... 얘 뭐야-” 윤호가 탈의실에서 나오며 불만을 토한다. “어디 다른 데서 술 잔뜩 마시고 와서는 겨우 마티니 한 잔에 여기서 뻗어 잔다.” “깨워 얼른-” “얘 우리학교 얘라서 괜히 마음이 약해져........;” “..... 어? 알고 있네?” “나랑 교양과목 같이 듣는데- 여자애들한테 인기 많고 잘 나서는 애라서 기억하고 있어-” 재중은 뭔가 못마땅하단 듯이 째려본다. “경영학과 K씨 때문에 여자들 고백 다 거절한다잖아-” 의외의 모습에 준수도 피식 웃는다. “근데 니네 과에 K씨 한 명 밖에 없지 않냐?” “아니- 나랑.............” “여자 말이야!! 세상 사람들이 다 너냐?” “왜 성질이야.......” “경영학과 K씨가 딱 한 명뿐인데 엄청 못 생겼다더라......야, 얘 집에 데려다 줘라.”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자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더니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다. “돈 훔치게?” 윤호가 기겁을 하고 바라봤고 준수는 주민등록증을 꺼내어 주소확인을 한다. “알았어.....” 순순히 간다는 준수에 재중은 애써 웃으며 준수를 배웅했고 오늘은 못 데려다 줄 거 같다는 준수의 말에 재중은 굳은 얼굴을 억지로 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윤호도 저 여우 같은 게 어떻게 대처할까 흥미로웠다. “야, 너 차라리 우리 바에서 대리운전 해줄래?” “됬네.” “머니 두둑하게 줄게” 재중은 유천이 준수와 함께 있고 싶어 ‘쇼’를 하고 잇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다. 김 재중- 그것도 병이다, 병. . . . 겨우 집에 도착했건만 별로 훔쳐갈 것도 없이 생긴 데 살면서 비밀번호를 눌러야 한다고 하니-(그것도 무거워 죽겠는데!!!)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결국 경비를 불러 함께 유천을 데리고 올라갔다. 유천의 주머니에 카드를 꺼내 긁으니 삐- 소리가 나고 현관이 열렸다. 경비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고 집안으로 유천을 데려간 준수는 다신 이런 거 안 해- 라는 생각을 하며 일어났다. 타악- 하는 마찰음과 함께 준수는 침대에 다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유천이 준수의 옷깃을 부여잡고 놓지를 않는다. 제정신이 아닐 때 힘이 더 세다고 절대로 놓아주지 않는 유천에 준수는 짜증을 내며 옷을 아예 벗어놓으려고 하자 유천이 준수를 침대로 쓰러뜨려버린다. “뭐야...... 취한 거 아니였냐?” “............. 내가요? 설마-” 준수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두 손목을 잡고 준수의 배 위에 올라간다. “씨팔....... 그럼 진작에 일어나던가...........” 이제까지 자신이 한 행동이 헛고생이란 걸 깨닫자 짜증이 확 밀려오는 준수이다. 애타게 준수의 입술을 찾는 유천의 행동도 머리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반항, 심지어 반응조차 없는 준수에 유천은 잠시 하던 걸 멈춘다. “이대로 계속 가요?” “멋대로 해-” 체념도 아니고, 별관심도 없다는 듯 건성건성으로 말하는 준수는 관심도 보이지 않았고 유천은 난감해진다. “그런 식으로 나오면 김 쫘악 세는데- 반항을 해야 뭔가......” “그럼 내가 할까?” 무려 자기가 하겠단다. 김 재중 놔두고...... ----------------------------------------- 5. 연락이 두절된 지 벌써 일주일..... 준수의 행방을 알 리가 없는 재중은 입술만 바짝 마른다. 윤호 마저 모른다는 소리가 나오니 정말 제대로 잠적했다. 재중은 평소대로 캐주얼차림에 크로스백을 메고서 자취방에서 나왔다. 아직 학생이므로 차도 없던 재중은 지하철을 이용하여 도착지에 도달했고, 엄청나게 높은 빌딩들이 수도 없이 줄을 이었고 군데군데에서는 전광판이 빛나고, 소리 없는 광고들이 줄을 이었다. 재중의 뒤에서 수다를 떨며 걸어오던 여자 둘이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재중은 망각상태에서 깨어난다. “어머!! 또 저 모델이다.” 거대한 현수막을 보고 소리치는 것 같아 재중도 고개를 돌렸다. 한 향수 광고 였다. ‘FUTURE’이라는 이름의 향수 광고였고 별 감흥 없이 고개를 돌리려고 할 때였다. “...........!!!!!...........” 자신을 바라보던 그 무표정으로 자그마한 향수병을 들고 있는 모델은...... . . . 김 준수였다. 재중은 다급하게 윤호의 번호를 눌렀다. “사장님-” -펑크 낸 단 소리면 곤란해요. “준수, 연예인이에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에요? “향수 광고 찍었는데-” -아..... 그거- 준수 어머니 회사? “네?” -준수 어머니.... 텔런트 윤 재영씨, 세계적인 향수화사 사장님이잖아요. “........ 아.......” -몰랐어요? “네........” 주워왔다는 그 많던 향수와 보통 아이와는 틀리게 넓은 방의 한 면을 모두 차지하고 있던 사진들........ 왠지 이해가 갈 것 같기도 하다. -이번에 그 거 때문에 미국 갔다는데.... 그래서 연락이 안됬었나보네..... “.............” -준수는 남 챙길 줄 모르니까, 너무 맘에 두진 마요. 안도의 한숨을 내 쉬며 재중은 폴더를 닫는다. 혹시나 박 유천- 이라는 사람과 사랑의 도피를 했으며 어쩌나 하는 생각에 밤잠을 설쳤는데, 이젠 좀 편안해 질 거 같다. . . . 지난번 1탄 ‘PAST’와 2탄 ‘nowadays’에 이어 FUTURE까지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는 관고 덕에 베일에 싸인(본인은 그럴 의도가 없었다) 모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겠다는 기자들과 카메라맨들의 열의에 인천공항이 꽉 막혀 숨도 못 쉴 정도다. “오늘따리 공항이 좀 소란스럽다........ 엄마부터 나가......” “나 때문에 온 게 아니라, 너 때문에 온 거 아니야?” “..... 왜?” “왜긴........ 너 멋있잖아......” “그럼 나부터 나갈까?” “왜? 같이 나가지?” “나 먼저 집에 가있을게....” “너 보러 왔다니까.......” 무료 봉사[?]를 마치고 돌아온 준수는 얼른 집에 돌아 갈 수 없다는 생각에 짜증이 난다. “이러면 나 이제 안 해, 돈 주고 다른 모델 써.” “벌써부터 너무 비싸게 구는 거 아니야?” “엄마가 나 키우는 데 돈 얼마나 들었는데....... 비싸게 굴어야지....” 애교는 눈 씻고도 찾아 볼 수 없는 아들을 트렁크로 한 대 친다. 자동문이 열리고 게이트엔 준수와 그의 어머니인 윤 재영 씨가 함께 서 있었다. 눈부시게 전혀 틈을 주지 않고 터지는 플래시에 눈살이 찌푸려진 준수의 등을 꾸욱 누른다. “왜?” “인상 쓰지 마, 계속 웃고 만 있어.” “싫어- 짜증나.” “얼른-” 하지만 별 관심 없는 준수는 여전히 얼굴을 찡그리며 공항을 걸어 나갔다. 기자들이 무어라 말을 걸어왔지만 못 들은 척 그냥 걸어 나오는 준수이다. 결국 윤 재영씨가 그가 받았던 질문에 대충 대답을 하고는 얼른 공항을 빠져나온다. “나, 이래서 안 할 거라 그랬지.....” “내 아들이지만, 무뚝뚝한 게 귀여운 맛이 하나도 없어.” “그 맛에 키워온 거 아니야?”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어릴 때부터 엄청 나게 성숙했던 준수를 그녀는 더 사랑스러워 한 듯하다. “우리 아들은 애인 같은 거 없어?” “.................” “왜? 있어? 대답을 안 해......” “...............” “있구나!!!!!” 대충 때려 맞추고는 확실하다며 좋아하는 어머니를 준수는 정신병자인 마냥 이상하게 쳐다본다. “근데 진짜 있어?” “............ 있을 거라 확신할 때 언제고.....” “집에 데려와.....” “엄마가 연예인인 거 알면 부담스러워 해.....” “어때서........” “거기다가 우리엄마가 윤 재영인 거 알면 우리 집안 다 알 게 되는 거고......” “..........” “그럼 부담스러워서 나랑 헤어질 지도 몰라......” . . . 그럴 리가................... “이걸 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까부터 왜 이렇게 초조해요?” “아...... 내가 애인 엄마가 연예인이라고........” 윤호는 그런 반응을 보여 오는 재중에게 일이나 하라고 핀잔을 준다. 아까 준수에게서 오늘 바에 들릴지도 모른다는 전화를 받았기에 재중은 입이 빨간 마스크다. 완전. . . . 조금 수척해진 얼굴로 바에 들어오는 준수를 보고 있는 재중은, 아직 영업시간이라 한걸음에 달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미소만 한 가득한 얼굴로 준수를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고, 하마터면 쉐이커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런 재중은 바라보는 윤호도 아찔해지는 순간 이었다. “얼굴이 왜 이래요?” 재중은 준수가 그의 곁으로 조금 다가가자 곧바로 턱 부분을 받쳐 들며 물었고, 준수는 눈을 내려 깔며 재중의 손을 치웠다. “밥도 안 먹이고 일만 시켜..........” “그동안 전화 왜 안 했어요?” “......... 꼭 전화해야 돼?” “그래도 걱정하잖아요.” “걱정하지 마......... 귀찮아..........” “무뚝뚝하긴........” “일 끝나면 나 깨워, 나 좀 잘게.” 준수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적혀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간다. 재중도 따라 들어가고 싶었지만 자꾸만 윤호가 이마가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는 바람에 체념을 한다. 그리고 윤호는 똑똑히 보았다. 사. 장. 님. 바. 보; . . . “내가 어릴 때부터 내가 준수형이랑 결혼 한다고 그랬잖아요.” “어- 그래서 준수가 이사 갔잖아.” “진짜요?” “뻥이지!...............;” “근데..... 이런 거 말해도 되나?” 아무 생각 없이 말도 함부로 막 막 뱉어내던 창민이 말하는 것을 잠시 망설인다. 그래서 윤호는 요즘 얘들은 뇌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도 했었는데........ 괜히 진지해지는 창민이 어색한 윤호이다. “말해 봐- 다 이해 해줄 수 있어.” “정말요?” “뭐......... 대충......... 비밀로 해줄게.” “.................. 못 믿겠는데-” “.......... 준수한테 안 말할게.......” 준수에 대한 것........ 이라고 단정 지었던 윤호는 창민에게 얼른 재촉을 했다. “...........나........ 정말.......” “.......... 어.........” “.......... 준수 형이랑 결혼 하고 싶어요.......” “...............!!!!!!!..............” “................. 말하지 마요.” “돌았냐?” “그럴지도 모르죠.........” “......... 걔한테 안달 나지마..........” “............” “.............. 상처투성이만 될 뿐이니까............” . . . 상처투성이......... “저기요!!!!” 어떻게 알았는지 재중의 집 앞으로 찾아와 있다. “........... 어쩐 일이세요?” “그냥........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저희 집은 어떻게 알아냈는데요?” “윤호선배한테 미인계 써서 물었어요.” 미인계................ 기도 안차는군. “우리 어디 가서 이야기 좀 해요.” “저 학교 가는데요?” “김 준수에 대한 이야긴데요?” “............. 그럼 잠시만 시간 내죠.” . . . 재중의 자치방 근처의 카페에 와 준 건 유천의 배려였다. “할 이야기가 뭐에요?” 재중의 앞엔 오렌지주스가 놓여 있었고, 유천은 레모네이드를 빨대로 한 입 물고, 재중을 바라본다. “김 준수랑 가까이 하지 마세요.” “......... 참 내........” 기가 막히는 말이다. “그 쪽이 무슨 상관이죠?” “그냥 도움이 되고 싶어서 한 말 일뿐이에요.” “........... 그 쪽한테 도움 받고 싶지 않은 데요?” “.............” 재중은 기분이 상한 듯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유천의 말에 그 자리에서 멈춘다. “김 준수는 당신과는 달라서 당신한테 안달 난 것도 아닌 것 같은데요?” “.............. 무슨 소리죠?” “그러니까............” “................” 재중은 눈동자가 흔들린다. “너한테만 준 것만은 아니란 말이야.” “............!!!!!!!............” “나 술에 취한 날...............” “............” “나랑도 했거든.........” “.............!!!!!!!!.............” “그것도 김 준수가 먼저.” 재중은 급히 카페를 뛰쳐나갔고, 유천은 그 뒤에서 조소를 흘리며 재중이 뛰어 나가는 모습을 그저 바라볼 뿐이다. --------------------------------------------------------------------- 6. 유천이 한 말은 기억 하지 않으려고 애써 노력할 뿐이다. 오늘 준수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할까...... 투정을 부려볼까?............ 하지만 자신의 마음까진 속일 수 없는지, 목이 매여 오며,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급히 자치 방까지 뛰어가는 재중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빠른 속도로 뛰어가는 지라, 거리의 다른 사람은 그 눈물은 못 본 듯, 그저 바쁜 가 보다.................- 라고만 생각할 뿐이다. 자치 방에 도착한 재중은 오늘 늦잠을 자 미처 개지 못한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이불이 조금씩 들썩들썩 거린다. “......... 흐윽..... 흡.........” 혹시나 누가 들을 까봐, 입을 틀어막고 어깨를 들썩이는 그의 모습이 안쓰럽다. 잠시 후 들려오는 인기척에도 재중은 신경 쓰지 않고, 이불을 덮어쓰고 있다. “............ 흐읍........” “........ 왜 울어?” 이윽고 들리는 음성에 재중은 잠시 멈춘다. “뭐야......... 아직도 이불도 안 개어 놓고.........” “.................” “나 왔는데 인사도 안 해? 다시 갈까?” “............... 무슨 낯짝으로 찾아 왔어?” “.......... 내 얼굴 들고 왔는데......” “나 볼 면목은 있어?” “왜 그러는데........” 재중은 이제 큰 소리로 울기 시작한다. 준수는 최대한 나긋나긋하게 재중을 대하고 있는 중이었고,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다. “울지 마........ 뭐 때문에 우는 데..........” “..............”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이 말해오는 준수의 말에 혹시나 유천의 말이 거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가는 재중이다. “나는 자기 믿어.” “............... 나도 너 믿어.” “아니지?” “.......... 뭐가?” “........ 바람 난 거 아니지?” “.......... 그래....... 아니야........” 재중은 그제 서야 눈물을 그치고 이불 속에서 얼굴이 빠끔히 내밀었다. 그러다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안 나올 거야?” “흉해서 못 나가겠어.” “괜찮아........ 나 오랜만에 봤잖아........ 안 보고 싶었어?” “그럼 눈 감아..... 나갈게.” “그럼 나는 너 못 보잖아.” 준수의 말에 재중은 다시 이불을 걷어냈다. 준수의 얼굴을 보니 또 재중은 눈물이 흐른다. . . . 일요일 아침부터 계속 울려대는 초인종 소리에 준수는 결국 잠자는 것을 포기하고 인터폰을 들었다. “누구세요?” -나다, 임마. 얼른 문 열어. 윤호였다. 무언가 들 뜬 듯한 목소리였으니, 무언가 자랑 하러 왔음이 틀림없다. 준수는 뜸을 들였고, 기다리는 데 힘이 다 빠졌다며 얼른 열어 달라는 윤호를 한 참을 놀려먹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집으로 들어오는 윤호는 혼자가 아니었다. 최고 수다콤비일지도 모른다. 현관을 들어오면서 둘이서 얼마나 말이 많던지........ 창민을 옆구리에 끼고 들어오는 윤호는 준수에게 예의상 들고 사들고 온 사탕 한 봉지;를 던졌고, 준수는 받아 들고 기가 막히다는 듯이 다시 소파에 던졌다. “웬 일이냐?” “이 자식이 심심하다고 니네집에 놀러 가자고 조르잖아.” “놀다 가......... 난 잘 거니까.......” “그래, 그럼 넌 다른 방에서 자. 우린 니 방에서 놀다 갈게.” 창민이 이건 아니란 듯이 윤호를 황당하게 쳐다보며 한 대 쳤다. 하지만 윤호는 아랑곳 하지 않고 준수의방으로 들어간다. “이러면 안되죠. 준수형이 없으면.........” “쟤 귀찮게 하는 거 싫어해........ 거기다가 잠 못 자면 완전 폭군으로 변해..... 그냥 준수 방 구경하는 걸로 만족해라.” “.............” “아마도 니가 나빼고 준수 방에 들어온 첫 번째 남자일지도 몰라.” 첫 번째 남자일지도 모른다는 사탕발림에 창민은 얼른 준수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고, 윤호는 이렇게 창민을 도와주면서도 왠지 모를 씁쓸함을 느낀다. “............ 진짜 니가 아깝다니까.........” . . . “어? 멀쩡하네.......” 또 유천이 와서 재중을 갈군다. 재중은 아랑곳 하지 않고 가던 길을 계속 갈뿐이다. 하지만 계속 따라오는 유천을 재중은 참다못해 한 마디 한다. “근데 나 스토커에요? 왜 따라다녀요? 나 어디 있는지는 어떻게 알아요?” “지나가던 길에 우연히 본 거 뿐인데요?” “그럼 가던 길 계속 가세요.” “.......... 뭐 믿고 그렇게 멀쩡해요?” “나는 준수 믿어요.” 오히려 더 당당한 재중이 못 마땅해지는 유천이다. . . . 준수의 방에서 사진하나를 슬쩍해온 창민은 하루 종일 그것만 쳐다보며 흐뭇해하고 있다. 수업시간에 딴 짓 한다고 경고도 수차례 받았지만 사진만 꼬옥 손에 쥐고 있다. “심 창민, 경고 했었지?” 결국엔 선생님에게 사진을 압수당하는 창민이다. “선생님...........” “뭐야, 남자 사진 아니야? 너 호모냐?” “주세요, 선생님!!!” 한참을 창민을 쳐다보던 선생님은 다시 수업을 진행했다. “너, 마치고 교무실로 와라.” 지랄 맞다. 젠장. . . . “야, 심 창민, 너 진짜 호모냐?” “아, 아니에요!!!!! 그거 아는 형 사진이에요.” “근데 뭘 그렇게 히죽대면서 수업시간 내내 보고 있어?” “잘 생겨서 그랬어요.” “뭐?” “자기가 원하는 얼굴 계속 보고 있으면 닮아간다고 그래서 그랬어요.” “.................... 가 봐라.” 사진은 대신 마칠 때 찾아가라고 하고 창민을 보냈고, 사실 보내면서도 무언가 찝찝한 기분이 드는 듯, 창민의 뒷모습을 한참을 바라보다가 수업 종이 쳐 교과서를 들고 다른 반으로 향한다. . . . “선배 오늘 시간 있어요?” “없는데........” “그러지 말고, 시간 좀 내 봐요.” “오늘 애인이랑 데이트하기로 했어.” “맨날 보는 얼굴 지겹지도 않아요?” “너는 너 네 엄마 얼굴도 지겹더냐?” “네.” “그래도 나는 안 지겹다.” 도무지 시간을 내어 줄 생각을 안 하는 준수를 계속 꼬드긴다. “야, 준수야.” 멀리서 준수를 부르며 달려오는 준수의 같은 과 ‘여자’ 선배의 모습에 유천은 눈살이 찌푸려진다. “야, 나 사인 한 장만 해줘.” “무슨 사인이요? 사기 치게요?” “무슨 사기야, 사촌 동생이 니 팬이거든, 그래서 내가 꼭 사인 받아다 준다고 큰 소리 쳐놨단 말이야........ 니가 학교를 잘 나와야 말이지...........” “저 사인 같은 거 없어요. 그리고 이제 그런 거 안 할 거에요.” “무슨 소리야!!!!!!!!! 그만 두더라도 사인 해주고 그만 둬.” “그만 두면 사인 필요 없잖아요.” “비싸게 군다, 너. 그냥 여기다가 수진이에게, 라고 쓰고 니 이름 휘 갈겨써줘.” 어쩔 수 없단 듯 준수는 펜을 든다. A4용지에 매직까지 준비해온 사람에게 계속 ‘싫다’고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to. 수진이라고 적고 ‘준수’를 휘 갈겨 쓴 뒤 펜과 종이를 여자에게 넘긴다. “야, 니가 날 살렸다. 나 간다.” 간다고 그러고서는 가다가 뭔가 생각난 듯 폰 카를 꺼내 사진 한판을 찍고 얼른 도망가 버린다. “선배 인기 많아 좋겠네요.” “귀찮아.........” 그런 것도 별로 반갑지 않다는 듯이 미간을 좁혔고, 시간이 된 듯 벤치에서 벌떡 일어선다. “어디가요?” “데이트하러..........” “나도 끼어도 되요?” “우리 애인한테 물어 봐.........” . . . 얌생이처럼 또 따라 왔다. 멀리서부터 같이 붙어서 졸졸 따라오는 유천이 재중의 눈엣 가시다. “재중씨, 나도 끼워 줘요.” 언제 친했다고 재중씨래? ‘눈치도 없네.’ ‘그런 소리 많이 들어.’ 준수의 앞에서 딱 잘라 ‘안 돼!’라고 말할 수도 없는 처지라 결국엔 억지미소까지 지으며, 환영이에요~ 라는 말을 하자, 준수는 재중이 진심으로 기뻐하는지 알고 다음부터 유천을 데리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준수가 지금 이 생각 중이라는 것을 알면 재중은 화병으로 돌아가실지도 모르겠다. “........... 근데 유천 씨........” “왜요, 재중 씨?” “우리 비디오방 갈 건데 유천 씨 따라갈 거 에요?” “비디오방이요? 요즘에도 그런 데가 있어요?” “그럼, 음침한 데 많죠........” 당황한 듯 유천은 준수를 바라본다. “어, 우리 비디오방 갈려고.........” 유천은 밑 입술을 잘근 잘근 씹으며 한 발짝 물러선다. “사실 저 강의 있거든요. 이제 까지 장난이었어요, 두 분 오붓한 시간 보내고 오세요.” 재중은 뒤 돌아 가는 유천의 모습을 한 없이 노려보았다. “가자.” “어딜?” “비디오방......... 간다며?” “진짜 가게? 나 장난이었는데........” “난 장난 아니었어.” “거기 가서 뭐할 건데?” “비디오 봐야지..........” “그냥 비디오만?..............” “........... 생각 해 보니까 너 진짜 변태다........” 변태........ 살다 살다 변태란 소리 처음 들어본다. “비디오만 보지 말고 음료수도 먹자고!!!!!!!!” 재중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소리쳤고, 준수는 웃으며 알았다고 대답한다. . . . 두고 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자리 뺏을 거야........... . . . ------------------------------------ 7. 생전 처음 와보는 골목으로 들어선 재중과 준수였다. 좁은 골목 사이로 빽빽이 들어서 있는 낡은 건물들의 간판을 보고 어디론가 가는 중이다. “여기 어딘 줄 알고 가는 거야?” “어, 고등학교 때 많이 왔었어.” 그의 과거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고 재중은 귀를 기울인다. “고등학교 때, 왜?” “왜긴, 비디오 보러.” 재중의 질문에 당연하단 듯 대답을 했고, 재중은 호기심 가득한 소년의 얼굴로 또 다시 물었다. “비디오만 봤어?” “아니...........” 아니- 라는 소리에 재중은 어, 이건 안 되는데- 라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럼.............?” “음료수도 마셨는데?” 아까 전에 있었던 일을 가지고 계속 놀리는 지 준수는 장난 끼 가득한 얼굴로 말했고, 재중은 또 얼굴이 달아올라 있다. 장난 사절이라는 듯 준수의 등을 한 대 쳤다. “왜 왔는데? 너 네집 홈시어터 좋던데.” “나 고등학교 때라니까....... 그 때 홈시어터 없었어.” 계속 되는 질문에 조금의 짜증을 느낀 준수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대답을 했다. “왜, 뭐 하러 비디오방까지 왔는데?” “알고 싶어?” “응...........” 한 숨을 한번 쉰 뒤 그래, 다 말해 줄게- 하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 여자 친구가 오자 그래서.” “여자 친구?” 여자 친구- 라는 말에 의외라는 듯이 쳐다보았다. “어, 고등학교 때 사겼던 사람............” 젠장......... 경계대상이 하나 더 늘었다. ......................... 여자; 이걸로 세상 모든 사람들을 경계해야 하는 셈이다; 남자에다가............ 이젠 또 여자라니........ “여자 친구랑 와서 뭐 했는데?” “궁금해?” “응.........” “비디오보고...” “어......... 또” “음료수 마시고.................” “......... 야!!” 또 장난스럽게 재중을 쳐다보며 ‘음료수;’ 이야기를 꺼내었고, 또 재중은 발끈 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또’라는 듯 준수가 계속 말을 잇기를 기다리는 듯한 재중의 표정을 보고 준수는 입을 떼었다. “키스도 하고.........” “.............” 키스라는 말에 또 표정이 굳는 재중이다. “그래서 얘도 가지고.............” “...............!!!!!!!!...................”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준수를 깜짝 놀라 쳐다본다. 무려........... 아기란다. “......... 진짜야?” 설마......... 하고 반문을 했지만, 원하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 그럼 내가 좋은 밥 먹고 헛소리 할까봐?” 기분이 언짢은 듯하게 준수를 바라보았다. “........... 그런 건 나한테 말해주는 거 아니야........” “왜?” “숨기고 있는 거야. 그런 건.........” “................. 니가 궁금하다면서?” “......... 가자...... 나 할 일 생겼어..........” 갑자기 얼굴 표정이 확 굳어버린다. 나 우울해요- 라는 게 딱 드러나는 표정이었다. 기분이 좋지 않은 듯 가던 길을 다시 돌아가는 재중이었고, 준수는 차 문을 열어 준다. 재중은 무의식적으로 그대로 타려고 하다가 멈칫한다. “뒤에 탈래.” 오늘 따라 더 앙탈을 부리는 재중을 보고 눈썹을 씰룩거린다. 밥을 잘 못 먹었나................... “.......... 그래........” 별 생각 없이 열었던 앞문을 닫았고, 다시 뒷문을 열어준다. 시동을 걸고 그 어두침침한 거리를 벗어난다. 큰길가로 나와 가는 내내 재중은 말이 없다. 준수도 별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운전만 할 뿐이었고, 재중은 무언가 생각 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 아......... 그래서 그 여자애 어떻게 됐는데?” 무언가 배려라던가.............. 비밀이 없다. 이 사람은....... “얘 낳아서 키우고 있어...........” 잔인한 자식............ 재중은 차 문을 두드렸다. “나 내려줘..........” “왜?” “울 것 같애.” 목이 멘 듯 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뭐 때문에?” “너 얘까지 있다며..........” “...............” “너 같으면 맘 안상하니?” 준수는 아무 말 없이 차를 계속 몰고 간다. 그러자 재중은 다시 한 번 말한다. “세워 달라니까.........” “거리에서 추하게 울지 말고 집에 가서 울어.” “세워!!!!” 결국 소리를 질렀고, 준수는 별 동요 없이 계속 차를 몰고 간다. “...........” 깜빡이를 켜고 백미러를 살피다가 차선을 바꾸어 길 가에 차를 세웠고, 재중은 빠른 손놀림으로 차 문을 열어 내렸다. 준수도 따라서 내렸고, 뛰어가는 재중을 따라갔다. 그리고 재중의 손목을 꽉 잡았다. “............ 그게 울 일이었냐?” “......... 흐흡........” “왜 이렇게 눈물이 많아..........” 손수건을 꺼내어 재중에게 건넸다. 재중은 손수건을 꼭 쥐고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 나 원래 울보야......” 재중의 손목을 잡고 있는 준수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준수를 표독스럽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준수는 다시 재중의 손목을 잡았다. “...................” 시선을 피하며 계속 눈물만 흘리고 있는 재중을 꼭 껴안는다. 필요 없다는 듯 재중을 껴안은 준수의 등을 주먹으로 쳐 내렸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도무지 빠져나갈 틈이 없다. “......... 지금은 니가 제일 소중하니까..........” “.................” “그거면 된 거 아냐?” “.............” “울지마............” “....................” “........... 너 울면 나 윤호한테 구박 받는다.........” “............” “울음 그쳐.........” “왜 사장님이 너 구박하는데?” “왜긴.............” “..................”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울렸으니까.........” “.........!!!!!!!!!!............” ---------------------------------- 8. 마음이 혼잡스러운 재중이다. 준수를 통해 들은 이 엄청난 말에 재중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조차, 아니, 그런 상상 조차 할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내색 한적 없거니와, 준수와 재중이 잘 되도록 다리를 놓아 준 사람도 윤호였다. 그런 말을 들으니 도저히 바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아씨.......... 오늘 아프다 그럴까?” 아무 의미 없이 주절거리던 재중은 아프다고 그래야지~- 라고 하며 바로 전화를 건다. “저, 사장님.” -에, 재중씨. 펑크 낸다 그러면 곤란해. “............ 펑큰데요........” -어? “........ 콜록....... 저 아파서 못 나갈 거 같아요.” -어쩌다가? “감기에 걸렸나봐요........ 콜록- 지금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에요... 콜록-” -그래......... 몸조심해....... 혹시 내일도 못 나올 거 같으면 전화해. 이참에 푹 쉬고. “네......... 사장님 죄송해요......... 콜록-” 전화를 끊은 재중은 마음만 더 무거워 질 뿐 이다. 다른 사람이 펑크 낸다는 전화를 하면 그만 두라고 엄청난 고함을 지르는데, 오히려 나긋나긋하게 얼른 나으라는 말뿐이다. “진짜 사장이 나 좋아하는 건가...........” 혼잣말을 하고 한숨을 푹 내쉰다. “인기가 많아도 골치라니까...........” 완전 자뻑이다. . . . “야, 오늘 재중이 안 왔어?” “아, 아프다던데?” “아파? 어디가?” “몸살이래. 어제 너 재중씨 데려다 놓고 뭐했냐?” “비디오방 가려고 그랬는데, 재중이 삐쳐서 그냥 집에 들어갔어.” “왜.........?” “지연이 이야기 하니까 울던데?” “그 이야기를 왜 하냐!!!!” 어이가 없다는 듯 준수를 바라보는 윤호이다. “그럼 묻는데 어떡해.” “과거는 말하지 마.” “................. 숨길 것도 많다.” “원래 연애 하려면 그런 거야.” 또 뭘 숨겨야 하나.............. 한숨을 쉬며 손가락으로 세어보며 기억을 더듬는 준수이다. “근데 갑자기 웬 몸살이래?” “나 진짜 어제 집에 그냥 보냈어. 집 앞까지 태워 줬어!!” “누가 너보고 뭐래냐..........” 재중을 대신해 바를 지키고 있는 윤호는 유리잔을 닦으며 준수에게 말을 건넸다. 그리고 이제는 좀 익숙해져버린 ‘사인해주기’를 하는 준수이다. 20살이나 쳐 먹고 모델 사인이나 받으며 좋아하는 여자들을 보며 혀를 끌끌 차는 윤호였다. “어이구, 좋단다.” “샘나면 너도 모델 해.” 처음에는 안한다고 생 발악을 하더니 이제 이런 것도 재미가 들렸는지, 사인을 하고 팬서비스로 미소까지 지어주는 준수이다. “아, 어제 재중이한테 고백했어.” “무슨 고백?” “니가 재중이 좋아한다고.......” “............... 혹시 그 말 때문에 내 얼굴 보기 민망해서 그러는 거 아냐? 재중씨?” “그게 왜 민망할까봐.........” “세상 사람들이 다 너같이 얼굴에 철판 깔았는줄 아냐? 야 그거 때문인가 보다.” “니가 좋아 한다 그래서 부담스러운 건가?” “나랑 너 사이에서 갈등하는 거 아냐?” “아니야, 재중이가 나 좋아하는 마음은 확고해.” 너무나 당연한 듯이 말하는 준수를 윤호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쳐다본다. “야, 그래도 말 해줘라.........” “뭘?” “여기 알바생중에 일 젤 잘해서 좋아하는 거라고..........” “귀찮아. 안 말해, 네가 말해.” “........... 내가 말하면 변명하는 거 같잖아.” “............ 웃기겠다 그러면...............” “야, 정말 몸살 걸렸을 수도 있으니까 문병 가 봐.” “꼭 가야 돼?” “원래 아플 때 혼자면 더 눈물 나는 거야. 가서 꼭 안아주기라도 해라.” 귀찮다는 말이 입에 베였는지 계속 귀찮다는 말만 반복하며 차키를 집어 든다. “갔다 오면 뭐해줄 건데?” “키스라도 해줄까?” “몇 시까지 올까?” “.......... 바 문 닫을 때.........” . . . “어? 준수 형!” 바를 나가는 데 창민이 준수를 보고 반가워한다. “어, 니가 웬일이야?” “아, 나 윤호 형한테 볼 일이 있어서요.......... 어디가요?” “아, 애인 문병.” “에?........... 아........ 잘 가세요.” “그래, 미성년자 출입금진 거 알지?” “술 마시러 온 거 아니에요.” 미소를 지으며 차에 타고 시동을 걸어 차를 출발시키는 준수를 끝까지 지켜보더니, 준수의 차가 창민에게서 멀어질 때 즈음 얼른 바로 뛰어 들어간다. “형!!!!!” “어, 야 웬일이야?” “준수 형한테 애인 있어요?” “준수? 만인의 연인이지............” “애인 문병 간다던데?” “그 많은 애인 중에 한 명.” “............ 왜 말 안 해 줬어요?” “............. 걔 카사라니까........ 소유할 생각은 죽어도 하지 마...........” . . . 주인아줌마의 부담스러운 시선에도 꿈쩍하지 않는다. “누구여?” “재중이 애인이요.” “재중이 학상 남자여. 여기 변태 출입 금지야!!” 무려 변태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문병 오려니 준수는 머리가 띵하다. 그냥 가버릴까 생각했지만, 윤호의 꼭 가보라는 말에 조금 짜증이 나도 참고 버티는 준수이다. 무슨 일인가 하여 문을 열고 나온 재중은 준수의 모습에 깜짝 놀란다. “어, 준수야!!!” “재중이 학상, 이 사람 알아?” “예, 아줌마, 치, 친구에요!!” 말을 더듬으며 준수를 자신의 방으로 잡아끈다. “아이 난 또, 애인이라길래..... 잘 놀다 가........” “네~” 문을 얼른 닫고는 준수를 바라본다. “웬일이야, 여기까지?” “오늘부터 우리 친구야?” “............. 그런 게 아니라................” 무표정으로 재중을 바라보는 준수였지만 재중은 무언가 찔리는 듯한 지 식은땀을 흘리며 변명을 하려고 애쓴다. “................ 사회에서.......... 우리는...........” “................” “그다지 반가운 관계가 아니잖아.” “............ 숨겨야 되는 거야?” “...................” “.......... 아프다며?” “어?” “윤호가 너 아프다 그래서 문병 왔는데.........” 재중의 이마를 집어본다. “안 아픈 거 같은 데.” “아, 아파!!” “평소보다 더 건강해 보이는데?” “........... 아, 아니야-” “민망해서 그러지?” “어?” “어제 내가 한 말 때문에 윤호 얼굴 보기 민망해서 그러지?” 정곡을 찌르자 재중은 할 말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다. “그 거 신경 쓰지 마.” “............ 어떻게 신경이 안 쓰여........” “니가 나 버리고 윤호한테 갈 거 아니면 신경 쓰지 마.” “야, 사람이면 그런 건 다 신경 쓰이는 거지!!” 재중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재중을 꼬옥 껴안는다. “갑자기 왜 이래.” “좋아하면 안을 수도 있는 거지..........” “놔-” “삐쳐서 그러지?” “내가 뭘?” “어제 내가 지연이 이야기해서 삐쳐서 그러지?” “지연이가 누군데?” “내 씨받은 애” 아.......... 맞다.- 라며 이마를 탁 치고 다시 생각이 난 듯 기분이 상하는 재중이다. “그럴 수도 있지 뭐. 이제 신경 안 쓰고, 나도 너랑 똑같이 하기로 했어.” “뭘 똑같이 해?” “나도 나 닮은 애기 낳아 줄 사람 찾을 거야.” “............... 맘대로.” 무신경하게 대답하고 털썩 주저 앉아버리는 준수를 얄밉게 쳐다본다. “나 얕보는 거지...........” “뭘?” “나는 그런 거 못할 줄 알고 얕보는 거지?” “아니, 하려면 해.......... 안 말려.......” “........... 질투하는 척이라도 해!!!” “............ 그래......... 하지 마. 그런 짓 하고 다니면 내 손에 아작 나.” 준수의 말에 재중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다. . . . 해는 중천에 떠있는데, 어젯밤 둘이 꼭 껴안고 잠든 이후로 내내 저러고 있다. 단 한 번도 흐트러지는 자세 없이, 꼭 껴안은 채로만 12시간째..... 재중의 밑에 깔린 준수 팔은 안 저리나 모르겠다. “아.......... 일어나기 싫다.” “그럼 계속 이렇게 있어.” “학교 가야 돼.” “빼먹으면 되지.” “안 돼, 빼먹으면.” “그럼 내가 데려다 줄게.” “어........ 그럼 기다려봐.” 일어나기 싫다더니 총알 같이 일어나 수건을 들고 세수를 하러 간다. 준수도 미간을 꾹꾹 누르며 일어나, 헝크러진 머리를 바로 한다. 재중이 머리카락에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방으로 들어온다. “세수 안 해?” “어, 집에 가서 할 거야.” “해.......” “난 안해도 멋있잖아.” 재중이 윤호의 바에 일한지 1년이 넘었으니 추측하는 건데, 분명 저거는 정윤호한테 옮은 거다. 자기는 앞치마를 둘러도 멋있다는, 자기는 서빙을 해도 멋있다는, 자기는 빗자루를 들어도 멋있다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맨날 들어가며 일하는 재중은 준수의 말에 그다지 반응하지 않고 옷을 갈아입었고, 준수는 구겨진 정장을 털며 일어난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다 말고 김 재중이 그런다. “나 섹시하지 않아?” 벽에 기대어 근육으로 다져진 상체를 적나라하게 들어내고 준수를 유혹한다. “아침부터 하려고?” “아, 아니, 학교 가야 된다니까 그러네...” 얼굴이 빨개져 말을 더듬는 재중을 한껏 비웃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야, 재중아.” “어?” 바지 버클을 잠그던 재중을 끌어당겨 아침부터 야시시한 표정으로 키스를 한다. 티셔츠사이로 손이 들어가고 재중을 움찔한 반응을 보였다. 준수의 손이 척추 뼈를 따라 야하게 내려가고, 재중은 거친 숨소리를 내 뱉으며 더 격하게 준수의 입술을 빨아드렸다. 자신의 입 속으로 들어온 준수의 혀를 잘근잘근 씹었고, 겨우 키스 한 번에 흥분한 재중은 준수를 잡아끌었다. “학교 안 가?” 준수가 재중을 떼어내고 물었다. “.............. 하아, 가야 돼........” 하지만 멈출 생각은 없는지 계속 준수의 입술을 빨아드렸고, 어쩔 수 없는 듯이 준수는 벽에 기대어 있는 재중을 잡아끌고 자신이 벽 쪽으로 붙는다. “........ 왜?” “내가 할 힘은 없고.......... 받아 줄게.” 그 말에 즉시 재중의 입술은 준수의 목 부분까지 내려갔다. “너무 많이 남기지마..... 우리 엄마가 자꾸 너 데려오래.” 어?- 하고 멈춘다. “데려오라고?” “애인 있냐고 묻길 래 있다 그러니까 데려오랬어.” “..............” “안 데려갈 거니까 걱정 마, 미치지 않고 서야.....” 준수의 말에 기운이 빠진 재중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다. “............. 힘들다........” “................” “한국 여자들 매력이 없나..........” “...................” “여자는 놔두고......... 왜 저런 걸........” 벽에 기대어 아까 그 자세로 재중을 내려 보는 준수를 째려본다. “............ 그럼 지금이라도 여자 좋아해. 안 늦었어.” “나 네덜란드라도 가야 될까보다.” 바닥에 털썩 누워 한숨을 푹푹 내쉬는 재중이다. ------------------------------- 9. 준수의 차가 캠퍼스 안에 들어서고 준수는 사대건물 앞에서 차를 세운다. “나 데리러 못 와?” “왜?” “아......... 그냥. 오늘 동아리에서 모임 있다고 그러는데 가기 싫어서...... 너 핑계대고 안 갈려고........” “가.......... 왕따 돼.” “여자애들이 붙는 거 싫단 말이야.........” “그럼 떨어져 있던가......” “그럼 사장님네 가게 와 있어라, 우리 거기서 모이는데.....” “알았어.” 재중은 후훗- 웃으며 차에서 내린다. 태양 빛을 받으며 눈을 부시게 하는 준수의 차가 재중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 쯤 같은 과 친구가 그런다. “너 원조교제하냐?” “어? 아니........ 왜?” “저 차가 내 눈을 멀게 한다, 야. 저거 국내에 몇 대 없는 차 아니야......” “그런 건 모르고... 쟤 나보다 어려........” “나도 소개 시켜줘. 친해지게.” “안 돼!!!!!!!!!!!!!!!” 민감하게 반응하고는 얼른 계단을 뛰어 올라 간다. . . . “비디오는 잘 봤어요?” “아니, 재중이가 농담이었대.” 농담이란 말에 유천의 표정이 한없이 구려진다. “아, 난 눈치 없이 끼는 게 아닌 가해서.........” 재중을 태워주고 집에 들어가던 중 정 윤호의 심한 비음이 섞인 애교스런 목소리를 듣고 곧바로 살인 충동이 일어나 학교로 와 버렸다. 수업이 없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윤호의 부름에 자주 학교를 들락날락 거리는 준수의 곁에는 항상 유천이 알짱거렸다. “오늘 수업 없잖아요. 왜 온 거에요?” “윤호가 데리러 오래.” “매너 좋아요.” “그냥 시키는 대로 다 하는 거뿐이야.” 솔직한 준수의 대답에 유천은 크게 웃어버렸다. “은근히 웃겨요.” “야, 김 준수, 가자.” 윤호가 준수에게 뛰어 왔고, 유천은 윤호에게 간단한 목례를 한다. “나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어?” “니가 있을 데가 여기 밖에 더 있냐? 멀리서부터 빛이 나더라.” “...........” “맨날 세차하러 다니냐?” “집에 세워놓으면 아저씨가 계속 닦아.” “껍질 벗겨지겠다. 얼른 가자. 나 아버지가 불러.” “너 네 집 너무 멀어.” “야, 김 준수~~” 어깨를 비틀며 하얀 덧니를 내보이며 비음 섞인 목소리를 내는 윤호를 에? 저 선배가 원래 저랬나?- 하며 쳐다보는 유천과 무안하게 가만히 바라만 보는 준수가 있었다. “데려다주면 뭐 해 줄 건데?” “바라는 것도 많아. 어제 못한 진한 키스 해줄게.” 윤호를 빤히 보던 준수는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차에 탔고, 윤호도 유천에게 인사를 건넨 뒤, 준수의 차 조수석 문을 연다. “야, 너 재중 씨랑 차에서 뭐해!!!!!” “아무것도 한 거 없어.” “근데 뭐가 이렇게 지저분해. 휴지도 다 뜯겨서 뭐야 이거.” “재중이 울었잖아. 눈물 참는다고 물건 다 뜯어놨어.” 재중이 울었다는 말에 유천의 귀가 쫑긋해진다. . . . 재중은 아까부터 계속 신경이 쓰여 바 쪽으로 시선이 간다. 다른 이들의 맥주잔은 자꾸 비워만 가는데, 유독 재중의 잔은 그대로 이다. “어딜 그렇게 봐, 안 마셔?” “아, 마셔.” 허둥지둥 잔을 들어 입에 부어 버리는 재중은 500cc잔을 한 번에 비워 버렸고, 그 모습을 보고 놀란 동아리 선배들이 재중을 말렸다. 결국 사래에 걸려 재중을 가슴을 잡고 켁켁 거렸다. “괜찮아?” “아, 네. 잠시만요.” 물을 마시고 오겠다며 재중은 그 자리에서 일어 나 바 쪽으로 향했고, 재중 대신에 바텐더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던 윤호에게 물을 요구한다. “사장님, 물 한 컵만 주세요.” 재중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누군가 고개를 휙 돌린다. “오랜만이네, 재중 씨.” 유천이었다. 아까부터 얄밉게 준수의 옆에 끈적하게 앉아서 있는 게 아니 꼬았는지,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유천을 노려보았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아, 준수 선배랑 이야기 할 게 있어서요.” “아, 그럼 이야기만 하다 가세요.” 하며 도도하게 걸어간다. 그런 재중을 준수는 미소를 머금고 바라보았다. “선배 요즘 재미 좋겠네요?” “뭐가?” “저런 앙칼진 애인 둬서.......” “아.......... 뭐 그다지.........” “그런 말 들으면 애인이 섭섭해 하잖아요.”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좋으면 된 거 아니야?” 준수의 말에 윤호는 유리잔을 떨어뜨릴 뻔 했고, 유천도 썩 괜찮은 표정은 아니다. “근데 할 이야기가 뭐야?” “없어요. 그냥 선배랑 같이 있고 싶어서 그러는 거에요.” “나랑 왜? 재밌냐?” “........... 재밌는 건 아니지만.......... 좋으면 된 거 아니에요?” 윤호는 위험한 발언을 서슴없이 해대는 유천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고, 윤호의 손짓에 준수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디가요?” “화장실...........” 화장실이라고 말하면서 정 반대편으로 향하는 준수였고, [관계자외출입금지]라고 적힌 문을 열고 들어가는 준수를 확인하는 유천이었다. . . . “너, 쟤랑 가까이 하지 마.” “왜?” “완전 구미호 아니야........... 낯짝도 두껍지~” “............” “내가 볼 때, 쟨, 너랑 재중씨 사이 갈라놓고 쟤가 너 차지하려고 하는 거 같은데?” “................ 가라고 그럴까?” “가라고 그러긴!!!! 많은 술을 권해!!!” “왜?” “돈 벌라고 그런다.” 윤호의 쓸데없는 소리를 외면하고 탈의실 소파에 주저앉는다. “아씨........... 연애질 한 번 하기 되게 힘드네........” “넌 내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뿐이잖아.” “............. 넌 왜 그렇게 도와주는데?” “..................” 탈의실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윤호는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하는 표정이었고, 준수는 무슨 말을 해도 담담할 것 같은 표정으로 한참이나 윤호를 응시했다. 그리고 윤호가 한숨을 쉬며 입을 떼었다. “............ 좋아해서 그런다. 왜........” . . . 무슨 술을 그렇게 쳐 마셨는지, 정신없이 부어대다 보니 열이 오른 재중이었다. 분위기도 점점 무르익어 가고, 여자후배들이 못 마신다며 술잔을 앞에 두고 쩔쩔매면 마음 착한 재중은 당연 흑기사를 해 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준수와 유천이 같이 있다고 생각하면 테이블을 다 엎어버리고 싶지만........ 아니면 짤릴 것 같아서 그만두는 재중이다. 재중의 머릿속엔 저 구미호가 지금 준수에게 무슨 수법을 써서 꼬시고 있나, 준수는 넘어갔나....... 온통 잡생각들뿐이었고, 그런 재중을 아는지 모르는 지 선배들은 자꾸 재중에게 술을 권한다. 정중히 사양을 하고 재중은 상기된 볼을 두 손으로 탁탁 치고는 바 쪽을 바라본다. 바텐더가 없자 난감해 하는 손님들과 혼자서 술을 마시는 유천이 보이자, 재중은 바로 냉큼 달려간다. “사장님 어디 가셨어?” “준수선배 데리고 저기 갔는데?” 재중이 유천에게 말을 걸자 유천의 얼굴을 찡그려진다. 나도 너랑 별로 말 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으로 유천을 내려다보았다. 유천은 한참 고민하는 듯 하더니, [관계자외출입금지]라고 적힌 문을 가리켰다. 혹시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가 하여 신경 끄고 다시 테이블로 돌아갈까 생각했지만, 뒤 돌아서자 유천에게 바텐더의 행방을 묻는 손님이 보이자 재중은 마음을 고쳐먹는다. 손잡이를 잡고 한참 갈등하던 재중은, 할 수 없이 재중은 문 쪽으로 다가가 문을 살짝 열었다. -............. 넌 왜 그렇게 도와주는데? 준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왠지 엿들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라 재중은 발소리를 죽이며 탈의실 문 쪽으로 더 다가갔다. 그리고 요동치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가픈 숨을 죽이고 계속 말을 엿 듣는다. 한 참 뜸을 들이는 윤호 덕택에 탈의실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재중은 긴장이 되어 침을 삼켰고,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자신의 침 삼키는 소리가 너무 큰 것은 아닌지, 다 들린 건 아닌지, 그냥 헛기침이라도 할까 생각한다. 하지만 헛기침을 하려는 순간, 윤호의 대답에 재중은 기겁을 한다. -............ 좋아해서 그런다. 왜........ 들려오는 윤호의 목소리에 재중은 거친 숨소리를 내었고, 입을 탁 틀어막았다. 식은땀이 흐르고 갑자기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너무 쿵쾅 거려 혹시 둘이 들어 버릴 지도 모른 다는 생각을 하는 재중이다. 그리고 들려오는 문 쪽을 향하는 구두 굽 소리에 재중은 급히 문을 열고 나간다. 그리고 대번에 화장실로 들어와 버리는 재중이다. 방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제 정신이 아닌 것 같다. 그럼 사장은 양다리라는 건가? 라는 생각부터, 애인이 고백 받는 장면을 포착했을 땐 다른 사람은 어떻게 대처 했는지, 어디선가 주워들었는데, 자신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고 생각하고 흘려들어서 그런지 꼭 이런 중요한 순간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세면대의 물을 틀어 세수를 하고 티슈를 뽑아 물기어린 얼굴의 물방울을 닦아 낸다. 그리고 거울을 보며 한숨을 내 쉬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화장실에 들어오는 준수의 모습을 보고 기겁을 한다. “허어어억!!!!!!” 놀라야 되는 건 준수가 아닌가? “뭘 그렇게 놀래?” “인기척도 없이........” “발자국 소리 내는 거 비 매너적인 행동이야.” “....................” 재중은 준수의 얼굴을 살핀다. 혹시 떨림 같은 건 없는지...... 하지만 너무도 태연한 준수의 모습에 한번더 당황한다. 자신에 대한 죄의식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라고 생각하고 은근히 기분이 나빠진 재중이다. “탈의실에서 뭐했어, 사장님이랑?” “어?” “아까 사장님 없어서 손님들 기다렸잖아.” “아......... 내가 탈의실 들어간 건 어떻게 안 건데?” “사장님 없어서 유천씨한테 물었어......” “......... 이것도 숨겨야 되나?” “어?” “말하지 말까?” “뭘.................” “해야 할 말이 있고 안 해야 할 말이 있다면서........” 뜻밖의 준수의 반응에 재중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그, 그냥 말해........” “............. 유천이한테 술 많이 팔아달라고 꼬시래........” “............. 아........... 그런 말 했어?” “어............ 또 무슨 말 했었는데............” “...............” “이건 윤호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10년 전부터 이야기 했던 거라 못 말해....” 라며 화장실을 나가는 준수이다. 그리고 화장실 바닥 더러운 줄 모르고 털썩 주저앉는 재중이다. ----------------------------------------------------------- 10. 재중은 2차를 가자는 선배들의 손을 뿌리치고 바에 남았다. “유천씨, 늦었는데 안 가요? 벌써 새벽 1시에요.......” “그러는 재중씨는요?” “전 여기서 일 하잖아요. 4시까지 있을 건데요?” 유천이 준수를 바라본다. 준수는 가만히 앉아서 냉수 한 잔을 마시며 유천의 눈길에는 별 신경 안 쓰는 듯하다. “............ 그럼 내가 데려다 줄 테니까, 얼른 가자.” 데려다준다는 말에 외투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유천이었고, 재중은 어이가 없는 듯 쳐다본다. “오늘은 손님이 좀 많네........”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던 준수가 말했고, 윤호도 동의하는 듯 했다. “일찍은 못 끝내겠다.” 벌써 새벽 2시가 다 돼감에도 불구하고 빈 테이블이 없으니...... “나가자, 박 유천.” 유천은 재중에게 조소를 흘리며 그를 지나쳐 나간다. 뭐 저런 게 다 있냐는 표정으로 유천이 지나간 곳을 한참동안 바라본다. “재수 없죠?” “네?” “박 유천인가 뭔가 하는 사람......... 눈에 거슬리죠?” “............ 아, 좀...........” “준수한테 꼬리 치는 거 모르는 사람이 봐도 다 알 정도 아니에요?” “..................” “너무 티내는 거 같아요........” “.............” “근데 준수 저거는 눈치가 느려서 그런 것도 모르잖아요....” 지금 재중에게는 윤호의 말은 단 한마디도 들어오지 않는다. 계속 아까 탈의실에서 엿 들은 두 사람의 대화만이 귀에 멤 돌 뿐이다. “저, 사장님..........” “왜요?” “사장님은 준수랑 무슨 사이에요?” “........... 무슨 사이냐구요?” “.......... 네..............” “친구죠, 재중씨 질문이 좀 이상한데요?” 서슴없이 친구라고 말해오는 윤호를 보자 갈등이 일어난다. 미간을 좁히고 바에 기대어 습관적으로 손톱을 깨문다. “................ 사장님.........” “................. 왜요?” “............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 말해요.” “...............” 죄의식 같은 건 전혀 없어 보이는 윤호의 얼굴이 보이자 망설여도 진다. “뭔데요, 말해요, 보수가 너무 작아요?” “........... 아뇨 그런 건 아니구요.......” “................ 뭔데요, 말해요.........” “........... 저 아까........” “...............” “우선 죄송하단 말부터 할 게요.” “뭐가 죄송한데요?” 횡설수설 말의 앞뒤도 맞지 않게 말하는 재중을 보자 윤호는 그저 답답할 뿐이다. “그렇게 뜸 들이니까 더 궁금하잖아요.” “...... 후우..........” 이마에 흐른 땀을 닦고 결심을 한 듯 입을 뗀다. “아까 탈의실에서 하는 말 엿 들었어요.” “.............. 무슨 말이요?” “.......... 좋아해서 그런 다는 말..............” “.............!!!!!!!!!!!!..............” 당연한 반응이라는 듯 윤호의 동공이 커진다. . . . “.................. 음주 단속 걸리겠다.” “선배가 그런 것도 신경 써요?” “어, 걸리면 아작이야.” “왜요?” “또 우리엄마 이름 걸고넘어질 거란 말이야.” “선배 엄마를 왜요?” “우리 엄마 연예인이야.” “우와, 정말요?” “어...........”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데요?” “김미미........” “그런 이름 없잖아요!” “있어, 무명..........” “그러지 말고 가르쳐 줘요.” “우리 엄마 이름 알아서 뭐하게........” 도통 가르쳐 줄 생각을 안 하는 준수이다. 교통경찰이 준수의 차를 가로 막는다. 음주 측정기를 갖다 대었고, 준수는 찔리는 게 있었던 모양인지, 살짝 분다. 다행히 마신지 오래되어서 그런지 극히 낮은 수치가 나왔고, 가볍게 검문을 통과한다. “음........ 나이 많은 연예인이 누가 있지.......50대에요?.....” “우리 엄마 나이 그렇게 안 많아. 마흔인가?.........” “입양이라도 했어요?.......” “아니, 일찍 결혼 했어. 재벌 2세랑.” “아, 윤 재영씨요?” “어? 아네..........” “그럼 알죠!!!! 바보 아니고서야, 그렇게 힌트를 줬는데.........” 유천은 뜻밖의 수확에 입이 벌어졌다. “처음이에요.” “뭐가.........” “선배에 대해서 가르쳐 준 거.........” “............. 별로 알려 줄 것도 없어.” “.............. 선배........” 유천이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내로 진입했다. “...............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가면 안 돼요?” “........................” 준수는 유천을 빤히 쳐다본다. “어, 안 돼.” 하고 처참히 사양 당한 유천은 체념 한 듯 안전벨트를 풀고 차 문을 연다. “조심히 가세요.” 준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차를 출발 시켰고, 유천은 준수의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다. “.......... 힘들다.........” 씁쓸한 표정으로 뒤 돌아서 집으로 들어간다. . . . “숨길 필요는 없어요. 저 아까 짐작 같은 것도 좀 해봤으니까, 그렇게 놀라고 상처 받지는 않을 거에요. 벌써 아까 상처는 다 받았거든요.” “.................” “........... 말해도 돼요. 난 벌써 마음에 준비나.......... 이런 거 끝내 놓고 하는 말이니까.” “.......... 준수랑 나랑은 20년 친구에요.” “.................” “그럴 일이 있겠어요? 장난이지.........” “................... 그런 식으로 나오면...............” “알잖아요..........” “.......................” “준수는 한 사람의 연인이 될 수 없다는 거..........” “왜요?” “.......... 글쎄요........... 함께 하는 20년 동안.............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요......” “.............” “한 사람을 위해 목숨까지 받칠 만큼 누구 좋아할 만한 여건이 안됐던 거죠.” “................” “난 마음 비운 지 오래 됐으니까............ 재중씨도 마음 비우세요......” “..................” “그리고 여기 까지 알아 버렸으니까 하는 말인데요......” “...............” “준수가 재중 씨한테 진심으로 대해준적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 무슨 말이죠?” “........... 준수는........... 내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거든요.......” “............ 네?” “이제까지 재중 씨에게 해 왔던 거........... 처음에 재중 씨가 준수한테 기다려달라고 그랬을 때........ 그 때부터....... 아프다 그래서 문병 간 거........ 키스 한 것까지.......” “............” “내가 시킨 거에요....” “...........” “준수는 그런 거 못 해요.......” “...........” “사람 대하는 방법도 모르고, 대인 기피증세도 있고...........” “...................” “.............. 진심............ 한 번 물어봐요........” “...............” “정말 준수가 재중 씨 좋아 하는 지.....” 재중은 현기증을 느낄 만큼 무언가 아찔함을 느꼈다. 구역질이 날 만큼 충격이 전해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을 뻔 했지만 윤호가 얼른 받쳐 들었다. 또 눈 가에는 눈물이 고였다. 준수를 만나고 나서 자주 있는 일............ 재중에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아무래도 머리에서 정리도 잘 안 되는 듯 했고, 게다가........ 중요한 건............ 그의 감정이........ 모두 거짓?................... “아.......... 그리고..........” “꼭 지금 말해야 돼요?” “네?” “저........ 지금 너무 힘든데.........” “한꺼번에 실컷 아프세요. 재기하고 나서 들으면 다시 들어 누워 버릴 테니까.......” “.................” “................. 유천 씨 만나는 거에 대해서는......... 시킨 바가 없어요.........” “............!!!!!!!!.............” “준수 진심으로 대하고 있는 거에요.” 갑자기 지난번에 유천이 자신을 카페로 불러서 했던 말이 생각난다. 숨이 탁 막혀왔고, 정신이 혼미해 짐을 느끼고.......... 쓰러지기 전에 준수의 무표정을 본 것 같다. ---------------------------------------------------- 11. “왜 쓰러졌어...........” “.................” “어디 아파?” “...............” “과음했어?” “...............” 재중이 일어나자 준수는 재중에게 물을 떠받친다. “............ 필요 없어........” 아니면 내가 마시지...- 라고 중얼 거리고 단 숨에 물 한 잔을 들이켰다. ....................... 병원이다. “............ 소문에 너 사장님이 시키는 대로 움직인다며?” “.............. 어..........” “왜?” “시키니까..........” 대답은 간단했다. “지난번에 말 안 했나?........... 시키는 대로 하는 것뿐이라고.........” “바보야? 왜 자기 감정대로 행동 못 하고 시키는 대로해?” “.............. 내 감정대로 하면...........” “.................” “............. 완전 무시에다가 피하고............ 너한테 별 신경도 안 쓸 거고.......” “................ 그럼 유천씨는 뭔데?” “.......... 걔가 뭐?” “너 지난번에 니가 먼저 꼬셔서 유천 씨랑 잤다며!!!!” “유천이가 그러더냐?” “그래, 나 귀 얇아서 그런 말 곧이곧대로 다 믿는다, 왜!” “..............” “니가 덮쳤다는데?” “............... 우리 그만 만날까?” “...........!!!!!!!!!............” “지겹다, 이것도.........” “내가 말했잖아...........” “............” “헤어지자는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라고...............” 금방이라도 다시 쓰러질 것만 같다. 핏기가 하나도 없는 창백한 얼굴에는 두려움이라는 것이 가득 차 있고, 이불을 꼭 쥐고 있는 손이 가늘게 떨려온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아냐?” “..................... 아니.........” “귀찮게 하는 거........ 억지 부리는 거..........” “.................” “............ 우는 거...........” “.................” “너 너무 많이 울어............” “................” 우는 게 싫다는 준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재중의 눈에선 눈물이 떨어진다. “그리고 남 못 믿는 거..........” “...............” “의심만 하잖아...........” “........흡.......” 터져 나오는 울음에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준수도 이번만큼은 진심인 것 같다. “..................... 그럼 헤어지기 전에 이것만 물어 볼게........” “................ 말해.” “.............. 너 나한테 진심으로 대한 적은 있었니?” “................ 딱 한 번...........” “.................” “.......................... 지금................” 준수의 말은 재중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고, 준수는 더 이상 미련이 없는 듯 병실을 나갔다. . . . “재중 씨, 괜찮아요?” “................. 아............” 윤호였다. 아까부터 인기척이 나 혹시나 준수가 다시 돌아 왔나 해서 정신 차렸더니........ 실망스러운 얼굴로 윤호를 바라보는 것을 눈치 챈 듯 윤호는 준수의 이야기를 꺼낸다. “준수 지금 많이 아파서 못 와요.” “..............!!!!!!!...............” “준수한텐 유천이랑 창민이가 갔는데....... 나 안 왔다고 친구 인연 끊자고 그러는 건 아닌 가 모르겠네.........” “............ 왜 아파요?” “몰라요.......... 거의 일주일째 누워 있어요........ 재중씨도 그렇구요.” “...............” “둘이 무슨 일 있어요?” “.............” “하긴........... 무슨 일 있다고 아파할 준수도 아니지만...........” “........... 중환자실도 갔다 왔는데 모르죠?” “..............” “땜빵할 사람도 없어서 내가 일주일 동안 계속 채우고 있어요.” “...................” “참......... 이런 알바생 안 자르고 뭐 하는 건지........” “............. 미안해요.” “미안하면 얼른 기운 차려요.” “.............” “재중 씨 부모님한테 연락 했는데......... 못-” “못 와요.........” “...............” “자기 생활에 바빠서 다른 사람 신경 쓸 여가도 없어요.........” “.........” “아들 아프다고 비싼 비행기 표 사서 올 인간들도 아니고..........” “.............” “오고 싶어도 못 오는 분들이에요.......” 씁쓸한 표정으로 자신의 마음을 대신 표현한다. “그래서 일걸요.........” “................” “내가 준수한테 이렇게 집착하는 것도..........” “............” “헤어지자고 그랬어요......... 이것도 당신이 시킨 건가요?” “........... 아뇨.........” “그럼 준수는 진심으로 절 대하는 거에요.........” “.............” “난 정말..........” “...............” “버림 받은 거에요.........” “..............” “난...............” . . . “어, 형- 정신 들어요?” “........... 찔찔아.............” “..........형- 아 잠시만요.” 준수가 깨어나자 창민이 사람을 부르러 밖으로 나간다. ................. 일주일 만이다........ 이 햇살 보는 거........... “선배!!!!!!” 쿵쾅거리며 뛰어온 건 유천이었다. 그리고 준수의 어머니도 아들이 심하게 걱정이 되는지 출근은 미뤄뒀나 보다. “너 일주일째야.......... 이렇게 쓰러지고 안 일어난 거..........” “..............” “무슨 일 있었니?” “...............” “............. 너 일어났으니까 나는 회사 가봐야겠다.......... 일주일째 안 나갔다고 밑에 얘들이 혼내거든.......... 사장이 부하 구박 받으면서 일 하는 건 무슨 아이러닌지.......... 간다........” 금방이라도 나가려고 준비를 해놓았는지 핸드백을 들고 집을 나갔고, 남은 창민과 유천만이 준수를 돌본다. “형, 뭐 좀 드릴까요?” “........... 아니.........” “...................” 무척 야윈 준수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유천이 입을 연다. “재중씨도 그렇대요.......... 선배처럼......... 무슨 일 있죠?” “......... 내가 헤어지자고 그랬어........” “.......... 자기가 헤어지자고 그래놓고 왜 아픈 건데요.........” “............ 배가 아파...........” “...............” “아니........... 여긴가?” “................” “.............. 나 심장병인 가봐.........” 준수가 왼쪽 가슴을 어루만진다. “이제 얼마 못 살겠지..........?” “..........” “심장병이면...............” 준수의 행동에 유천은 눈에 눈물이 고였다. - 자꾸 나는 안 된다는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창민도 준수를 안타깝게 바라본다. 왜 아픈 거야.......... “난 윤호형 한테 전화 좀 하고 올게요........” 창민이 급히 방문을 열고 나갔다. “형, 준수 형 일어났어요........” -재중씨도 일어났어......... “준수 형 많이 아파요.........” -재중씨도 많이 아파........ “서로 때문에.........” -............ 응.......... “나는 포기해야 되나 봐요” -니가 아까워.......... 포기하길 잘 했어........ “........ 이제는 바라보기만 하는 것도 지쳤어요........” -처음에 시작하지도 말았어야 됐어...... 내가 말렸잖아........ “............ 그 말 들을 걸.........” -............... “근데.......... 미련이 남네요.........” -............ 힘 내.......... 끊자......... 끊어진 수화기를 들고 창민은 한참이나 가만히 서 있는다. “한번만이라도 들어보고 싶었어요.........” 통화 끊김음이 들리는 수화기에 대고 혼잣말을 이어간다. “창민아............. 라고...........” ---------------------------------------------------------- 12. “어디 가는 거야?” “어디긴요....... 병원이요...” “나 멀쩡해.........” “재중 씨 보러 가는 거 에요.” “..................” “자세한 건 윤호 선배한테 들어서 대충은 알고 있어요.” “...............” “솔직히.............” “................” “재중씨 보고 싶어서 아픈 거 아니에요?” “.............” “그건 심장병이 아니라...........” “............” “마음이 아픈 거 에요.” 무작정 준수를 끌고 나와 재중이 입원 해 있는 병원으로 향했고, 가는 내내 준수는 아무 말 없이 유천이 시키는 대로 응했다. 오랜만에 보는 바깥 풍경........ 유천은 야위어진 준수의 얼굴을 안쓰럽게 바라본다. 병원에 도착하자, 유천은 준수를 정문 앞에 내려놓고, 주차 시키러 갔고, 준수는 혼자서 재중의 병실을 찾아 갔다. 안내데스크를 지키고 있던, 간호사들이 여럿 몰려 와 준수의 주위를 감쌌다. “저, 어떻게 오셨어요?” “........... 병실 알고 있는데.........” 무뚝뚝하게 준수는 그녀들의 호위를 무시했고, 얼굴이 달아 오른 간호사는 우물쭈물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저, 악수 한 번만 해주세요.” 하며 수줍게 손을 내미는 간호사의 손을 잡았다. 차갑다. 누구랑은 다르게......... 엘리베이터도 따라 타며 준수의 주위에서 재잘재잘 떠들어 대는 간호사들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려 쓰러질 것만 같았다. 뒤에서 몰라 폰 카를 꺼내들고 준수의 사진을 찍어 대는 그녀들을 밀어 내고 싶었지만 죄 없이 그냥 신기해서 쫓아오는 사람들을 때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냥 막 느낌이 이상하다. 감정 조절이 안 된다고 할까?.......... 윤호가 시키는 대로 했을 때가 오히려 더 편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숙녀를 때리거나 무시하는 행동은 매너 없는 남자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윤호의 말이 떠오르자 다시 마음이 평온해진다. 준수는 간호사들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더 이상 따라 올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고는 재중의 병실 문 앞에 도착했다.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김재중’이라고 적힌 것을 보고 고민 한다. 들어갈까 말까............... “김 재중 환자 찾으세요?” 눈치 없이 쫓아온 간호사들이 그런다. “....... 네, 죄송한 데 병실까지 따라 오실 거에요?” “.......... 아, 죄송합니다.” 준수가 불쾌감을 나타내자 얼른 자리를 피하며 마침 간호사데스크가 보이자 얼른 그 곳으로 숨어 준수를 지켜본다. 준수는 손잡이를 조심스레 돌린다. 그리고 병실 안을 둘러보지도 않고 조심스레 입을 연다. “......... 들어가도 돼?” “..........!!!!!!!.........” 준수의 음성에 재중은 조용히 숨을 죽인다. “............ 응..........” 모질 게 대해야지.......... 라는 생각과는 다르게 벌써 입은 ‘응’이라고 말하고 있다. “........... 그동안 아팠다며.......” “심장병..........” 이라는 준수의 말에 재중은 깜짝 놀라 준수를 바라본다. “.......... 인 줄 알았는데...........” 라는 준수의 말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 쉬며 준수의 말이 계속 이어지길 기다리고 있다. “......... 근데, 유천이가.......” “..................” “마음이 아픈 거래.........” “...........!!!!!!!!............” 김 준수한테 마음이 아프다는 소리는 평생 못 들어 볼 줄 알았다. 정말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너한테 나쁜 말해서.......... 미안해서 그러는 거래........” “................” 벌써 목이 매여 온다. 준수가 우는 거 질색이라고 그랬는데....... “나는 너한테 잘 못해줄 거 같으니까..........” “...........” “행복 하라는 말 하러 왔어..........” “.................” “윤호가 질질 끄는 남자는.......... 추하다고 그랬거든...........” “.............” “그래도 그동안 즐거웠어......... 재중이 형........” “.............” “갈게..........” 준수가 수척해진 몸을 이끌고 다시 병실을 나가려 하자 재중은 떨리는 목소리로 준수를 막는다. “그럼 나는?” “............” “나는......... 힘들어도............” “.............” “너 때문에 힘든 게 더 좋은데.........” “그럼 내가 미안하잖아......... 미안한 거 싫어........ 윤호가 미안한 짓은 안 하는 거-” “넌 사장님이 시키는 대로만 할 거야?” “.................” “넌 감정 같은 거 없어?” “............ 내 마음대로 하면..........” “.................” “아까 나 졸졸 따라오는 간호사 때리고 병원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 “지금 이렇게 갈 수도 없어........” “.............” “조절이 안 돼서.........” “................” “형한테 매달려 울고, 미안하다고 빌고........” “..............” “내 마음대로 하면..........” “...............” “사랑한단 말은 하루에 백 번도 더 했을 텐데.........” “............... 나는 사장님이 하라는 대로 하는 거 보다.........” “..............” “그냥 너 자체가 더 좋다........” “................”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어깨를 들썩이며 입을 막고 우는 준수를 뒤에서 감싸 앉는 재중이다. “........... 야........ 반대로 되야 되는 거 아니냐?” “........... 어?” “울어야 되는 건 난데 니가 왜 우냐?” “나는 그냥......... 미안해서.........” 늘 우는 재중을 감싸주던 준수인데, 이번엔 재중이 눈물 한 방울 없을 것 같은 준수를 감싼다. “평생 헤어지지 말자......... 나는 그런 거 싫으니까..........” “.......... 응........” . . . “뭐해, 안 들어가?” “어, 윤호 선배........” “미안해서 못 들어가겠냐?” “그런 건 아니고.........” “..............?” “방해하기 싫어서요.........” 조금 열린 문 틈 사이로 쿵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너무 격렬 하길래...........” 윤호도 무언가 눈치를 챘는지 유천과 함께 병원 벽에 기댄다. “............ 그러니까 쟨 접근금지라니까.........” “...........” “실컷 상처만 받고 돌아서야 되잖아.........” “.............” “.......... 너도.......... 나도.......... 창민이도........” “.................” “어쩌면 제일 힘든 건........ 재중 씨 일지도 모르겠다......” “.............” “저런 애 꼬시느라 얼마나 힘들었겠냐........” “.................” “그치?” “.......... 아뇨........” “............” “그래도.............. 성취는 했잖아요.........” “...............” “우리는 가진 것 없이.......... 체념하고 돌아서야 하니까..........” “.............” “희생자에요..........” “................” “다른 사람들은 희생 되지 않게.........” “.................” “목걸이라도 걸어 줘야겠어요.......” “......... 김 준수 접근금지?” “.........!!!!!!.........”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자, 둘은 웃음이 터져 나온다. “희생자들끼리 술 한 잔 하자.......” “선배가 사는 거에요?” “...... 그래...........” 조용히 병실 문을 닫아주고 유유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간다. ------------------------------------------------------- 13. 비하인드 스토리. 윤호의 말이 아직까지 머릿속에 남아있는 준수는 역시 멋있는 척을 하며 누군가를 기다린다. 이번에 엄마의 강요로 할 수 없이 향수광고를 하나 더 찍고, 현재 인기 급부상중이다. 이젠 아예 향수 통을 들고 와 사인을 해달라는 바람에 무시 못 하고 묵묵히 사인을 해 준다. 그거 남자 향순데........ 니네가 왜 샀냐고.......... “준수야!!!!” 저 멀리서 눈이 부셔 볼 수 없을 만큼 심한 빛을 내며 준수에게로 달려오는 그는 네 남자 사이에서 치이고 치여 경쟁에서 이겨 준수를 낚은 김 재중이었다. 남자 사이에서 이겼다는 게 좀 유감이긴 하지만...... “........ 윤호 닮아 가냐?” “왜?” “웬 애교야....... 내가 기사냐?” “왜 그래, 김 기사........ 월급이 부족해?” 역시 시키는 대로 다하는 김 준수는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재중의 비음 섞인 애교에 살인 충동을 느끼고 수화기를 던졌지만, 원래 마음은 착한 듯 쏜살같이 달려 왔다. “강의 시간에 문자 같은 거 보내니까 성적이 잘 안 나오지.......” “안 짤릴 만큼만 받으면 되잖아........” “난 우리 과에서 수석 했어.” “썅..............” 그는 더 이상 옛날의 김 준수가 아니다. 저런 잘난 척도 할 줄 알고...... “오늘 바빠?” “왜?” “사장님이 바로 좀 오래.......” “무슨 일 있대?” “그냥 술 한 잔 하자고........ 창민이도 이제 대학생이고....... 다섯이서 모이자던데?” “찔찔이 벌써 대학생이야?” “그걸 나한테 왜 물어!!!!” “그럼 나도 나이 많이 먹었겠네?” “............” “이제 나도 내 인생의 반려자를...........” “..............” “농담이야, 눈 돌아가겠다.” 캠퍼스를 거닐며 오붓[?]하게 대화를 나누며 학생 주차장까지 걸어간다. 요즘 준수는 대학생들 사이에서 ‘인기 급부상중’이라 불청객이 둘 사이를 들쑤셨지만, 어디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고...... 둘이 손에 땀이 날 만큼 꼭 잡고서 걸어가면 사람들이 이상한 눈길을 보내며 한 마디씩 한다. “야........ 꼭 엄마랑 아들 같애........” “쟤, 신방과 김 재중 아니야?” “야, 저 사람 그 사람이다!!! 향수 광고 찍은 사람....... 김 준수!!!!!” “야, 나 그거 남친한테 선물 해줬어~” 둘이 소리를 지르며 지나갔고 여자들이 하는 말을 귀를 세우고 듣고 있던 재중은 준수를 노려본다. “왜........” “내가 아들이겠지?” “어?” “설마 내가 엄마겠냐.........” “...........” “그래도 뭔가 가슴이 쓰린데.........” “뭐가?” “못 들었냐?” “뭘?” “너랑 나랑 엄마랑 아들 같대.......” “그럼 내가 아들이야?” “............... 내가 아들이지........” “니 머리가 더 긴데?” “요즘 어머니들 다 커트 쳐서 파마하고 다녀.....” “딱 봐도 내가 아들인데?” “............. 엄마, 아들 보다 중요한 건............” “..............” “우리가 그렇게 보이냐?” “............... 글쎄........” “그거 나쁜 거 아니야........” “.................... 하긴 엄마랑 아들이랑 연애를 한다는 게......” “그것 보다는!!!!” “..................” “우리가 연인사이로 안 보인단 거 아냐?” “............... 그게 뭐가 중요한데........” “커플링도 끼고 있는데......... 잘 안 보이나? 우리 더 큰 걸로 맞출걸 그랬나?” 역시 사소한 데 목숨 거는 재중이다. “잔 말 말고 타........” 커플링을 만지작거리며, 종알종알 거리고 차에 탄다. “집에 갈 거야?” “............ 우리 어디 가서 데이트 하다가 가자........” “안 돼........” “왜!!!!!!!!” “사람들이 너무 많이 알아 봐.......” “.............. 그래서.........” “곤란해..........” 얼짱 포즈를 취하며 자신의 인기를 한탄하는 준수를 어이없이 바라본다. “어떨 땐.........” “................” “사장님이 널 괜찮게 만들어 줬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 무슨 소리야?” “아니야.......... 가자 얼른...........” 오늘 내내 싱거운 소리를 하는 재중이다. "준수야........." ".......... 어?" "사랑해..........." "........... 어............" . . . “김 재중씨 자요?” “............” “김 재중씨!!!!!!!” “어?........ 사장님.........” “일 안하고 뭐해요!!!” “아, 맞다.........” “이러면 자를 거에요!!!!!!!” 옷을 갈아입다가 소파에 누워 잠이 들어 버린 재중은 서빙을 하러 밖으로 나간다. “아씨........... 좋은 꿈꾸고 있었는데........” 침을 닦으며 카운터에서 포스트잇을 한 장 떼어내서 술을 마시고 있는 준수의 등에 몰래 갔다 붙인다. [접근금지] “김 재중씨!!!!” “아, 소리 좀 지르지 마세요. 사장님이라도 내가 나이 더 많아요!!!” “딴 짓 하지 말라구요!!!” 윤호가 소리를 냅다 지르자 준수가 뒤를 돌아보며 쿡쿡 거리며 웃는다. 그러다 준수와 재중이 눈이 마주쳤고, 준수는 예의상 재중을 보고 한 번 웃어준다. 얼굴이 빨개져 준수를 넋을 잃고 바라본다. 그리고 준수의 옆에 있던 여자도 그를 한 번 바라본다. “오빠, 저 사람 귀엽다. 그치?” “일도 제대로 안 하는 거 같은데......” “근데 이거 뭐야?” 그녀가 준수의 양복 마이 뒤에 붙어 있는 종이 쪼가리를 떼어낸다. “접근 금지?...........푸핫!!......... 오빠 폭탄이야?” “어?” “칠칠맞게 이런 거나 붙이고 다녀.........” 접근 금지라 적힌 종이를 구겨 버린다. 그걸 본 재중은 여자를 얄밉게 바라본다. -이 봐, 아줌마............. 지금은 아줌마가 준수 씨 옆에 앉아 있지만....... 나중엔....... 꼭 내가 차지 할 거야........ . . . 꿈속에서처럼................................. -finish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