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표준이 국경 없는 자유무역의 바람을 타고 새로운 권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제는 회사 또는 국가가 보유한 기술력이 아무리 우수해도 국제표준의 요건을 준수하지 못하면 시장에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를 면하기 어려운 것이다.

최근 “표준을 지배하는 나라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관계기관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는 국제표준이 각국의 산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
과거에는 미국과 구 소련의 정치적 이데올로기 대립 속에서 세계의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졌으나 소련연방의 붕괴와 독일의 통일로 국제 무역환경은 ‘국경 없는 시장’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여기에 유럽 시장의 통합으로 지역경제의 블럭화와 연동, 미래 경제활동의 초점은 세계의 ‘시장 단일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에 맞춰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1995년 발효된 WTO/ TBT 협정은 각국의 표준화 정책을 개혁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WTO/TBT 협정의 기본 요지는 ‘단일의 국제표준을 적용하여 제품을 만들고, 그 국제표준을 기초로 자국의 기술기준을 제정함으로써 국가간의 무역장벽을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국경 없는 자유무역의 세계시장에서는 회사가 보유한 기술력이 아무리 우수해도 국제표준의 요건을 준수하지 못한다면 시장에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뜻한다.

자유무역의 첫 시도는 유럽연합국(EU) 내의 상호인정에서 출발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은 미국의 경제력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유럽 단일의 경제권 형성’이라는 데 동의했다. 이에 따라 1957년 영국과 프랑스, 독일을 비롯한 6개 나라는 협약국내에서 사람과 자본, 서비스, 상품의 자유이동을 보장하는 ‘로마협약’을 체결한다. 문제는 ‘상품’이었다. 세계 공용을 목표로 제정된 국제표준화기구(ISO)나 국제전기기술위원회(IEC)의 표준이 각국의 기술기준과 일치하지 않고, 이에 대한 이해도도 낮아서 적용이 어려웠던 것이다. 이에 1985년 유럽전기기술표준화위원회(CENELEC)와 유럽표준화위원회(CEN)가 창설됐으며, 지금까지 CE마크를 부착한 관련 제품들은 EC내에서의 자유무역을 보장받고 있다.
특히 비엔나 협정과 드레스덴 협정은 EU의 공격적인 표준화 전략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비엔나 협정은 1991년 ISO와 CEN 사이에, 드레스덴 협정은 1996년 IEC와 CENELEC간에 맺어진 것. 이는 CEN과 ISO의 합의아래 CEN위원회에서 만들어진 표준안을 그대로 ISO의 표준 초안으로 취급, ISO위원회의 심의를 거치지 않고 CEN과 병행투표(Parallel Voting)에 부쳐 유럽표준이 곧 국제표준이 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다.

누구도 예외는 없다
최근 ‘세계의 공장’ 중국이 국가표준 정비에 들어가면서 EU의 행보는 더욱 바빠졌다. 독일표준협회는 독일산업표준(DIN)을 제공하여 중국의 표준으로 채택되도록 공을 들이는가 하면, 모 기업은 지금까지 공개하지 않았던 사내표준을 국가표준으로 채택되게 하려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는 실정. 이에 더해 국제표준화기구(ISO) 참여 회원국의 4분의1이 반대할 경우 국가표준으로의 채택이 무산되기 때문에 반발의 여지가 있는 국가를 상대로 사전 물밑작업을 벌이기도 한다고.

현재 국제표준에 대한 견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유럽의 경우 ISO에서 인정한 표준만 인정하고 있으며, 미국은 다수 국가에서 그동안 실용적 표준으로 채택하여 활용하고 있는 그 자체를 국제표준으로 인정하자는 주장이다. 일본이 많은 기술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 공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제표준에서 동떨어지게 됐던 것은 현 시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의 기술기준이나 표준은 우호 관계의 국가와 연합하여 국제표준을 채택, 개정 및 보완하는 것이 최선책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세계를 선도할 수 있는 신기술을 개발하고 이를 파급시켜 국제표준으로 채택되게 하는 길만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세계시장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한국 기술의 세계 표준화. 쉽지는 않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작년 6월 한국은 이미 영상압축기술(MPEG)을 국제표준으로 채택시킨 사례가 있다. 물론 아직까지 ISO/ IEC 표준 20,237종 중 국내 기술이 반영된 표준은 13종 118건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에 실망하기보다는 국가적 차원의 보다 체계적이고 광범위한 지원을 바탕으로 국제표준을 선도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바른 자세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노력만이 선진 강대국을 대항하여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지배할 수 있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