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성장의 길 번호 : 86 글쓴이 : Philip 조회 : 13 스크랩 : 0 날짜 : 2006.01.04 23:41 자신의 목표를 세워라. 먼저 자신의 계획과 소원, 우선순위를 영성을 발전을 목적으로 삼으라. 목적 있는 믿음이 영성에 대한 관심과 영성을 성장시킨다. 나는 무엇보다도 나의 영성을 발전시키는데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 목적이 사람을 움직인다. 목적이 분명하고 뚜렷한 이유가 있으며 그 목적을 이루려는 소망을 가지고 계속하여 마음에 새기면 소망을 이룰 수 있는 영성가들은 목적 있는 믿음을 소유했다. 믿음은 분명한 목적과 목표가 세워져야한다. 우리 주변에는 무작정 믿는 분들이 많다. 무의식적으로 기계적으로 교회와 집을 반복하는 분들을 쉽게 볼수 있다. 목적을 세운 믿음은 영성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 목적이 있다면 대가를 지불하며 어려움도 고난도 헤치고 나갈 수 있다. 성도가 되면서 사명과 목적이 그 삶과 함께 존재하게 된다. 구원을 받는 것과 동시에 사명과 믿음의 목적을 받게 된다. 우선 구원의 기쁨으로 다음 단계는 가려져 있지만 이를 발견하고 이 길을 따라 걸어가야 한다. 나를 따라오라, 자기 십자가를 지라, 영적 목표와 목적을 깨달아야 영성의 발전을 위한 준비와 자세를 갖추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최종목표가 구원이 되어서는 안된다. 구원은 이미 우리에게서 완성된 사건이기에 목표가 될 수 없다. 우리의 목표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의 상급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뤄지지만 상급은 각자의 수고와 헌신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빌 3:14)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나를 부르신 부름의 상을 얻으려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행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딤후 4: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영성의 성장은 달려감이다. 달려가는 것은 결코 편안하지 않으며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달려가지 않으면 목표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달려가야 한다. 영적 성숙과 성장이 없이는 면류관과 영광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부끄러운 구원을 받기 때문이다. 성장은 반드시 고통을 수반한다. 어린아이들의 성장을 보라. 아이들은 성장 과정에 성장통이라는 고통을 받는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우리의 열정과 진보는 날마다 더해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성숙하고 믿음에 거하는 것보다 믿음에 떨어지지 않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게 분명하다. 자신이 영적 성장이라는 과정에 어느 지점에 있는가를 찾아야한다. 성장을 시작하지도 않았는지, 어느 정도 시작하다가 멈추고 있는지, 다른 길로 가고 있는지, 계속 성장하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여행을 하면서 이정표를 보지 않고 가는 사람은 없다. 영성의 과정도 자신의 위치와 나아갈 방향을 점검해야한다. 마라톤은 시작 지점과 결승점이 있다 선수는 시작점에서 결승점까지 혼신을 다해서 뛰어가면서 자신이 몇 킬로 지점을 통과하는지와 시간을 점검해야한다. 당신은 지금 영성 성장이라는 과정에 어디에 서 있는가? 지금 가고 있는가 아니면 지금까지 무관심이었는가? 옛 영성인 들은 교회나 성도, 목사이든지 자신의 현재 위치를 살펴야 하며 절대로 만족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지금의 자리에 주저앉거나 이정도면 잘하고 있다고 스스로 만족하며 속이지도 사단에게 속지도 말아야한다. 자신의 영성을 주변사람과 비교하여 이정도면 다른 사람에 비해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말라. 마라토너가 자신보다 뒤쳐진 사람을 보면서 만족하기 보다도 앞서서 달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아야한다. 달려온 길에 만족하지 말고 달려가야할 길을 바라보라. 우리보다 앞서서 선한 싸움을 싸운 믿음의 선배들인 순교자, 자신을 철저하게 그리스도에게 드린 분들의 믿음과 헌신을 거울삼아야 한다. 분명한 목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참된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파악하는 것이다. 구원을 위해 금식할 필요성은 없다, 천국은 금식과 고행을 통해 들어가는 곳이 아니며 오직 우리를 긍휼히 보시고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들어갈 수 있다. 금식하며 뜨겁게 기도해야할 이유는 우리의 영성의 성숙, 변화를 위해서라야한다. 변화는 기도와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구원을 넘어 하나님과 깊은 교제와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삶의 목표를 삼고 살도록 도전과 깨우침을 줘야한다. 항상 사소한 죄에 빠져서 회개와 사함의 굴레에서 벋어나지 못하고 살 것 인가 아니면 죄의 자리를 박차고 나와 변화와 성숙의 길로 접어들 것인가에 대한 심각한 결단의 자리로 나아가도록 인도해야한다. 영적 목표를 발견하는 길. 1) 복음서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음미하며 자신의 삶과 비교하라. 또한 자신에게 어떤 목적과 계획이 있는가, 자신을 오늘, 내일을 살게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를 찾아보라. 목적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그 목표가 거룩한가 아니면 세상적인가의 구분만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의 목표와 자신의 목표를 비교해 보라. 그분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찾아라. 참되신 주님의 모습에서 헛되고 헛된 자신의 모습을 찾아라. 진리를 위해 사시는 주님의 모습 속에서 불의와 함께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찾아라. 2). 성인들을 살펴보라. 옛 영성인들의 저서를 읽으라, 그들의 생각과 삶을 표현한 고전에서 참 신앙인의 길을 걸었던 그들에게서 자신과 다른 점을 찾아내라. 3). 기도하면서 자신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찾으라. 주님 제게 어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까. 4). 사람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리고 조언을 구하라. 왜 목표가 필요한가, 왜 영성의 성장이 필요한가? 이유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악하고 병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이기고 정복해야한다. 가장 난공불락의 성은 바로 자신의 고집, 성격이다. 자신을 이길 수 있는 자 는 모든 것을 이길 수 있게 된다. 자신에게 질문을 하라. 내가 성장하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내 삶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 나는 지금 어떤 시도를 하고 있는가? 죄를 깨닫고 회개한다고 변화되지 않는다. 회개와 함께 다시는 반복하지 않으려는 확고한 태도와 지속적인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어느 정도 노력이 아니라 충분한 노력, 지속적인 노력만이 다시는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게 된다. 세상을 살아가는 분야에도 노력과 자신의 변화를 추구하지 안고는 불가능하다. 경건한 책 읽기, 거룩한 묵상, 금식과 기도만이 자신의 영혼을 깨끗케 해주고 영적 성숙과 변화의 길로 접어들 수 있다.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할지를 묵상하라. 자신의 의무와 양심을 지키는 일에 물러서지 말아야한다. 독선적이고 공격적이며 이기주의적인 성향을 찾아서 변화의 길로 가야한다. 우리는 주변의 사람으로부터 많은 영향력을 받는다. 나쁜 것은 본받으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자리를 잡는다. 그러나 반대로 좋은 점은 파악하고 인정하고 그리고 본받으려고 노력할 때 비로서 적은 영향력을 받을 수 있다. 인간의 본성에 의로움보다 죄성이 가득 찬 상태이기에 죄와 관련된 부분은 본능적으로 본받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주변사람, 성서속의 인물, 덕망있는 사람으로부터 배우고 본받으려는 시도를 해야 한다. 아빌라이 테레사 수녀는 여러분이 덕을 기르며 애쓰지 않는다면 믿음은 자랄 수 없으며 성장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퇴보하게 된다. 라고 말했다. 불편함을 찾아가기. 본능적으로 편리함을 추구하는 하는 존재이다. 때로는 신앙의 발전은 편리함을 거부하고 역행할 때 발전되는 경우가 많다. 금식, 경건의 훈련, 기도와 같은 훈련은 결코 편안하거나 육신을 기쁘게 해주지 않는다. 육체의 욕심은 끝없는 편리함, 안락과 쾌락, 포만감을 추구한다. 이를 따라가다 보면 영혼은 병들고 퇴보된다. 훈련은 불편과 아픔을 동반한다. 마음의 원하는데로 따라가면 마음은 병들게 된다. 반대로 원함을 거부하고 싸우면 성장한다. 네 마음을 항상 이와 같은 것에 쏠리도록 하라. 가장 쉬운 것이 아닌 어려운 것에 가장 즐거운 것이 아닌 가장 참혹한 것에 가장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라 가장 유쾌하지 못한 것에 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힘든 수고를 의미하는 것에 가장 큰 것이 아닌 가장 작은 것에 가장 높은 것이 아닌 가장 낮고 비천한 것에 무엇을 원함이 아니라 아무것도 원하지 않음에 가장 좋은 것아 아닌 가장 나쁜 것에 이러한 연습을 하며 이것을 꺼리는 당신의 의지를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당신이 신중이 이것을 연습하면 이 가운데서 기쁨과 위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노력이란 목표를 향해 애쓰며 기존에 부족한 것을 기른다는 뜻이다. 우리는 편안한 길을 택하지 않는 훈련을 함으로써 잘못된 열정과 습관을 고칠수가 있다. 하루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며 여가가 있을 때 무엇을 즐겨하며 적은 일에 내리는 결정이 영적 전투들이다. 하나님, 사단은 우리 생활 속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 우리의 삶은 종교생활에서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생활에서 좌우된다. 인생의 성공 여부는 교회를 열심히 다녔는가가 아니라 설교, 말씀을 통해 깨달은 바를 얼마나 생활 속에서 실천 했는가에 달려있다. 진정으로 성장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불편은 적이 아니라 친구이다. 진리를 몸에 적응시키기. 훈련의 목적은 진리를 몸에 적용시키기 위함이다. 나쁜 습관은 불의가 몸에 익숙해 져있기 때문이다. 이는 좋은 습관을 붙이기 전에는 바꿀 수 없다. 늦게 일어나는 습관이 있는 사람은 일찍 일어나는 새로운 습관을 습득하기 이전에는 불가능하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법이 존재한다. 하나는 죄의 법이며 또 다른 하나는 의의 법이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내 속사람으로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다른 한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몸의 습관에 대해 등한시 한다면 영성을 성장시킬 수 없다. 몸은 몸대로 영은 영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몸을 몸에게 맞기고 산다면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몸을 훈련시키고 복종시키는 것이 거룩한 삶을 사는 필수적인 조건이다(윌리암 로우) 행동은 전적으로 육에 속하거나 영에 속한 것이 아니며 양쪽에서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성훈련이라고 해서 영의 영역만을 주시하면 실패를 하게 된다. 영성 훈련을 기도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한 후에 육의 습관을 거부하고 새로운 습관의 훈련을 해야 효과적이 된다. 행동은 마음과 육체의 습관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산되는 것이 기 때문이다. 마음과 행위는 하나이다. 마음을 다스리므로 행위를 다스릴 수 있으며 행위, 충동을 다스리면서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 화가 날 때 마음을 다스리면 행동을 마음으로 제압할 수 있으며 화가 날 때 행동을 자제하면 역시 마음의 화를 가라 앉힐수 있다. 외적 행위를(기도, 성경, 경건서적 읽기) 통해 내적 기질을 변화시킬 수 있다. 영혼은 행동에 영향을 끼치고 행위는 영혼에 영향을 준다. 자신이 몸의 주인이 되느냐, 종이 되느냐에 따라 몸을 다스릴 수도, 몸의 욕심에 굴복할 수 도 있다. 삶의 목표를 육에 맞추지 말고 영에 맞추어야한다. 몸을 따라 살면 반드시 영은 축게 된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라... 몸은 병들고 죽어 썩어질 것이지만 영은 영원히 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한다. 일찍 일어나라. 부지런한 습관을 들이라. 동이트기 전 일찍이 일어나는 것은 영성생활에 도움을 준다. 가장 기도하기 좋은 시간이며 묵상하기 좋은 시간이 새벽이기 때문이다.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잠기고 교통하고 하루를 시작하라. 뒤 돌아 보면서 살아라. 헬스클럽에 가면 정면에 거울이 있고 운동을 하면서 자신의 근육을 보면서 운동을 한다. 자신을 점검해야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 성찰은 자기를 돌아보며 자신의 내면을 살피는 좋은 영성훈련중의 하나이다. 자신을 점검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몇 년이 지나도 항상 제자리걸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성인들은 매일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자신의 하루를 돌아보면서 성찰을 하면서 자신을 가꾸고 변화시키는 일을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신의 결점이 하나씩 감춰져 가고 덕이 배양되며 거룩한 성품으로 자라나게 된다. 규칙적으로 자신을 돌아보면 세월을 허송하지 않게 되며 삶의 의미를 깨닫고 어떻게 살아야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깨닫게 해준다. 은혜로 살아가기. 하나님의 은혜를 늘 기억하며 그리고 주시는 은혜를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마치 물이나 음식처럼 생각하고 호흡하고 마시고 살아가야 하며. 은혜에 대한 목마름과 갈망하는 마음의 줄을 놓지 않아야한다. 인간은 단번에 성인이 되지 않는다 날마다 음식을 섭취하면서 어린아이가 성장하는 것처럼 영성도 이와 같다. 음식을 섭취함과 같이 은혜역시 섭취해야한다. 회개를 생활화하기. 우리는 큰 죄와 잘못을 저질렀을 때 회개를 생각한다. 작은 죄는 그냥 넘어가는데 이 부분을 조심해야한다. 드 살레는 나는 누군가에게 화를 내거나 비난한 후에 한번도 회개하지 않은 적이 없다. 작은 말다툼, 약간의 비난이나 비꼼, 남이 모르는 마음속에서의 은밀한 죄는 회개와 연관 시키지 않는 경향이 있다. 적은 물방울이 모여 강이 되듯이 작은 죄가 나중에 큰 죄로 발전된다. 초기에 죄의 문제를 해결하면 나중에 큰 죄에 빠질 수 있는 상황을 모면할 수 있다. 죄는 절대로 저절로 빠져 나가거나 약해지지 않는다. 가만히 두면 점점 부풀려 지고 자라난다. 하나의 죄가 열, 백으로 죄의 싹이 나중에는 거목으로 자라나게 된다. 죄를 미워하고 두려워하고 거부하려는 죄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야한다. 변화 영성의 성숙, 발전은 죄의 문제와 깊은 과계가 있다. 이를 막는 것이 바로 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를 다루지 않고는 영성을 논할 수 없다. 자신에게서 거룩하지 않은 부분, 저속한 언어 행동을 찾아보고 이를 기록해 보라 그리고 회개하고 이길 수 있게해 달라고 기도하라. 죄를 종으로 삼지 않으면 우리가 죄의 종이 될 것이다. 죄를 쫒아내지 않으면 우리가 쫓겨 나가게 될 것이다. 죄를 다스리지 않으면 우리가 다스림을 받게 될 것이다. 죄는 자멸을 뜻하며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며 반대로 우리를 멸망시키는 무리에게 스스로를 맡기는 것이다. 죄는 자기 학대이며 스스로를 멸망시키며 은혜의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는 것이다. 반대로 거룩함과 경건함은 자유이며 마음의 평안을 얻으며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길이다. 하나님과 더 친밀하고 자신의 욕구를 변화시킬 수 있으며 이를 관계적인 거룩이라고 설명한다. 관계적 거룩은 발전되며 시간이 흐를수록 일치의 현상이 나타나며 이는 마음과 생각 그리고 삶의 거룩으로 이어진다. 거룩이란 도덕적 규범이나 어느 원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적인 기쁨을 경험하면 세상의 기쁨은 배설물처럼 여기게 된다. 이 세상의 아무리 아름다운 것일 지라도 천국의 추한 것보다 못하다. 세상의 가장 높은 영광일지라도 천국의 반딧불만도 못하다. 세상의 영광과 기쁨은 잠시 지나가는 것 이지만 천국의 영광은 영원한 것이다. 관계의 거룩은 천국을 체험하며 그 나라의 기쁨을 선물로 주며 비교하게 되며 진리와 진정한 가치와 잠간과 영원을 깨닫게 하여 주신다.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영혼에 뿌려지고 느껴질 때 죄의 욕망은 사그러진다. 물을 주지 않으면 식물이 메마르는 것처럼 죄의 생명이 메마르게 된다. 죄는 관계에서 발생한다. 죄는 세상, 더 나아가면 사단의 역사이다 사단은 우리의 죄성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과의 맺어짐과 연결됨은 사단의 관계를 메마르게 하는 것이므로 죄의 역사와 능력이 점점 약해지며 멀어진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을 찾으며 마음과 뜻과 목슴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때 우리는 거룩의 열정을 소유하게 될 것이며 거룩은 우리의 영혼에서 온 몸으로 번져나갈 것이다.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거룩하심이 우리를 덮을 것이며 주장할 것이며 인도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실 것이다. 죄를 떠날 수 있는 것은 죄를 떠나라는 명령이나 하지 말아야 된다는 생각으로 불가능하다 더 나은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떠나게 되어야한다. 우리가 스스로를 지켜나갈 수 있는 힘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존재와의 관계의 균형으로 가능해 질수 있다. 세상과 마귀의 세력과는 멀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균형을 유지할 때 가능하다.(마귀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하나님께 순복하라) 악을 제거하기 위해 또 다른 악을 저지르거나 대행하고 있다. (탐식가의 몸은 비만일 것이다 그가 음식을 절제하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날씬한 몸매를 자랑하기 위해서라면 탐식하는 악을 자신을 멋있게 보이려는 악으로 대처하게 되는 것이다)그러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주신 몸을 건강하게 하려는 목적을 지닌다면 더 유익한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거룩함이 성장하면 죄의 유혹은 전보다 약해지고 숫자도 적어진다. 그러나 결코 자만하거나 안심하지 말라, 또 다른 유혹, 세련된 죄의 유혹이 준비되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계속되는 유혹에서 안전지대를 찾을 것인가.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열정을 꺼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하여 가까이 가는 태도와 사랑을 늘 간구하는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말아야 한다. 드살레는 자신이 유혹을 받는다고 느끼는 그 순간 아이들이 늑대나 곰을 보았을 때처럼 행동하라. 자신의 생명이 위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라. 아이들은 위험을 느끼면 즉시 부모의 품에 달려가서 도움을 요청한다. 주님께로 달려가 십자가를 끌어안으라. 그리고 생각을 선하고 경건함 쪽으로 옮기라. 자신이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세상과 현재 자신의 육체도 마귀의 편이다. 자신의 육체를 자신이 이길 수 없다. 그것은 헛된 싸움이며 부질없는 짓이다. 자신의 연약함과 죄를 이길 수 없음을 인정하라. 죄에 대해 회개만 하지 말고 죄를 짓게 된 동기도 고백하라. 다윗은 간음을 한 후 죄의 동기를 하나님께 아뢰었다.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이며 그 죄는 어머니의 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고백했다. 하나님 제가 이러한 죄를 지었습니다. 죄를 자백합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하나님 제가 지은 죄는 이러한 동기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유혹을 받았으며 이때 내가 기도로 물리치지 못했는가에 대해 고백하라. 유혹의 최고의 해결책은 마음을 열고 생각이나 느낌, 감정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이다. 유혹 들어올 때 하나님께 자신이 유혹을 받고 있다는 고백과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를 드리라. 죄의 유혹이 접근해 올 때 침묵하면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왜 우리는 거짓을 말하는가?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함이며 자신이 거부 받지 않기 위함이다 지나친 자기 보호와 인정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죄에 대한 묵상. 자신이 어떠한 죄에 쉽게 빠져들어가는가. 죄를 지을 때의 어떤 기쁨이 있는가, 왜 같은 죄를 반복하는가, 왜 죄를 이기지 못하는가, 죄를 짓고 난 후에 어떤 결과가 다가오는가? 과연 유익이 있었는가? 늑대와 곰은 벼룩보다 분명히 위협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그런 짐승을 피할수 있어도 벼룩을 피하기란 어렵다. 곰이나 늑대보다 벼룩이 우리를 더 괴롭히며 인내력을 시험한다. 살인이나 간음은 피할 수 있지만 작은 욕정이나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말이나 거짓을 말하거나 하는 죄에는 번번이 넘어간다. 다른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하는 작은 죄를 관찰하고 이에서 자신을 지켜야한다. 자신이 죄를 지으려고 하는 순간 지금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지금 마귀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누구를 뜻을 따라야하는가. 죄의 끝은 무엇인가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가? 죄의 결과를 생각하라. 감사: 믿음의 검증은 하나님이 나에게 얼마나 자주 응답해 주시며 얼마나 많은 축복을 내려주셨는가가 아이라,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고 기도했지만 응답이 오지 않는 상태에서 계속하여 섬기고 감사함에 있다. 믿는 사람들은 내어 놓고 신성모독의 죄는 범하지 않지만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불평과 그분이 하시는 일을 더 기다리지 않고 속단하며 원망하는 것이 신성모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영성가 로우는 만약 그리스도인이 번영과 행복 가운데서처럼 불행과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분을 찬양할 수 없다면 그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과 같으며 경건과는 거리가 멀며 참 믿음을 소우했다고 말할 수 없다. 온전히 내어 맏김과 감사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믿음과 신뢰와 확신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이해 할 수 없는 일중에도 감사하기,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믿음으로 살아가기.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하라, 평범한 것에서 시작하라, 선이란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이며 악이란 싫어하시는 것이다. 선이란 하라고 하는 것이고 악이란 하지 말라고 금지시키는 것이다. 선과 악의 기준을 우리는 명확히 알아야한다. 선악과는 그 열매가 악이 아니라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금기 시킨 사항을 어기고 따서 먹었기 때문에 악인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며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면 하나가될 수 있다. 반대로 하면 바로 대적이 된다. 말을 아끼기. 혀가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것은 마음이 지나치게 바쁘다는 증거이다. 쓸데없는 말,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하지 않도록 하라. 분명한 목적이 없이 무분별한 말을 하지 말라. 말이 많은 것과 영적 깊이는 반비례한다. 많은 말은 자랑하고 우쭐대고 필요 없는 말을 하게 된다. 이는 무지의 표시이고 비방의 통로이며 희롱과 거짓말과 낙담의 근원이 된다. 신중함의 끝이며 스스로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행위이며 말로서 짓는 죄의 시작이며 기도가 흐려짐의 시작이다. 침묵은 기도의 어머니이며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이며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지키는 것이다. 우리의 지체 중에 가장 조심해야할 지체가 있다면 바로 혀이다. 다른 것은 절제를 하지만 일단 말을 시작하면 혀는 절제할 수 없다. 우리는 말을 하고 싶을 때 냉정을 찾고 그 불길이 어디서부터인지 점검해 보아야한다. 남의 말은 듣지 않고 자신의 말만 한다면 이미 마귀의병에 걸려있다. 호기심 제한하기. 신문, 방송, 많은 매개체들이 호기심을 발동시킨다. 현대는 안방에서 세계의 소식을 다 들을 수 있으며 요즈음은 인터넷의 발달로 세상과의 연결되어 있다. 세상의 소식은 알면 알수록 더욱 알고 싶어지게 된다. 세상의 지식과 정보 세상의 흐름과 변화에 호기심으로 가득히 차있다. 외부의 일에 관심이 많을수록 자신의 내면에 대해 무관심해진다. 정신이 밖으로 집중될수록 내면으로는 분산된다. 외부에 대하 관심이 많이 가질수록 관심을 다 빼앗기게 되며 다른 면으로는 관심과 흥미를 잃게 된다. 정신을 빼앗기고 흥미를 느끼고 즐거움과 쾌감을 느끼면 느낄수록 내면의 감각을 소멸하게 된다. 많은 호기심이 영혼을 질식시킨다. 지나치게 남의 일에 대한 관섭과 비생산적인 일에 참여와 논쟁, 비판은 결코 자신의 영혼에 이로울 것이 없다. 우리는 현재의 행동과 자신의 영혼과의 관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현재 자신이 하는 일이 영적인 피해를 끼친다면 단호하게 끊을 수 있어야 한다. TV, 드라마, 스포츠, 영화. 자신과 상관없는 일에 대해 신경을 끊어라 호기심은 영혼의 고요함과 균형을 깨트리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 재판관이나 배심원이 될 필요는 없다. 이 시대는 정보의 홍수 시대이다 정보는 유익한 것도 있지만 무익한 것이 더 많다. 국제 정세 타국에서 일어나는 전쟁, 국내 정치, 경제 문제, 국제 정세와 같은 호기심을 발동시키고 모이면 대화의 꽃을 피울 수 있는 소재들이 너무나 많다. 어제 뉴스를 보았으면 다음날 대화는 뉴스의 내용으로 이어진다.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고 많이 알려고 하지 말며 아는 것을 자랑삼아 말하려고 하지 말라. 필요 없는 일에 근심하지 말고 많이 가지려고도 말며 억 메이지 말라. 겸손과 영성. 겸손과 정직함이 기독인들의 본질적인 삶이다.(어거스틴) 겸손은 본질이며 덕목이다. 아빌라의 테레사는겸손은 영성의 기초이며 겸손하지 않으면 영성이 성장할 수 없다 라고 말했다. 종은 겸손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름을 받았으며 믿는 그 순간 구원을 받으며 종이 되기로 서약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겸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약속을 스스로 파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겸손은 신앙의 집의 기둥이다. 두 가지 진리는 하나님은 전부이며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이다. 영성은 낮아져야 비로써 일어나며 작아져야 성장한다. 겸손은 믿음의 에너지원이다. 자신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겸손해 질 수밖에 없다.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가장 미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확한 자기 인식과 겸손은 하나이다. 자신을 알고 파악하는 일은 세상의 어떤 일보다 중요하며 가치 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겸손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 우리 내면에 자신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존재하고 성취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이 두 가지의 소망이 모두다 겸손과 연결되어야 한다. 겸손한 사람이 되고 싶어하고 또는 겸손의 성품을 성취하는 자가 되어야한다. 영적인 화장, 가면. 우리는 겉만 번지르르한 자신의 모습과 속과 같이 다른 경건을 유지하려고 얼마나 에를 쓰는가. 자신을 외적으로 꾸미려고 할수록 내적으로는 황폐해져가며 곤고해진다. 겉은 화려해 질지 모르나 영혼은 초라해지고 병들어 가며 자신을 분실하게 된다 ,또한 드러난 모습 가면을 쓴 모습에 도취하여 자신을 스스로 인정하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화장을 지우고 가면을 벗어버리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솔직한 모습을 드러내라. 우리가 잘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온통 죄와 허물로 가득한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자신을 꾸미고 가장하면 할수록 교만과 허영에 빠지게 된다.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두려워해야 한다. 우리의 삶은 연극이 되며 자신은 화장을 짙게 한 배우가 되게 된다. 자신의 인생이 아닌 가장된 인생을 살게 된다.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과 그들로부터 받는 찬사와 인기와 자신의 영광의 성취를 위해 살지 말라.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나쁜 것도 좋다고 말해야하며 쓴 것 도 달다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거짓되고 가장하며 살 때 우리는 진실을 잃게 되고 영성은 퇴보하며 곡예사와 같은 위태한 삶을 살게 된다. 우리는 거룩한 척, 겸손한 척은 할 수 있으며 사람들은 이에 속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속지 않으신다. 자신의 약점을 하나님께 고백하면 그 약점은 사단이 공격할 수 없도록 막아주신다 그러나 감춘다면 사단의 공격목표가 되고 하나님은 보호하시지 않는다. 겸손은 낮아지는 것이지만 올라가는 것이다, 작아지지만 커지는 것이다. 겸손은 진정한 자유와 편안을 소유하게 해준다. 자신의 평판을 유지하려고 지나치게 애쓰지 말라, 사람들에게 위대하게 보이려고 겸손하게 보이려고 애쓰지 말라. 사람에게 인정받고 보이기보다는 하나님에게 보이려고 하라. 은밀한 중에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것에서 생각과 마음에 숨겨진 비밀까지도 알고 헤아리고 계신다. 겸손은 자신을 비하하는 것도 아니라 자신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대로 인정하며 가면을 벗으며 자신의 실체를 인정하는 것이다. 겸손은 정직이며 단점을 인정하며 회복하려는 자세이다. 사람들이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인정하게 하려는 가식적인 행동을 버리라. 테레사는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가능한 진실하게 행해야한다. 특히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실제의 이상으로 보거나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서 쌓은 대인 관계는 모래위에 쌓은 성과 같다. 겸손의 뿌리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뿌리로 향해 나아가야 한다. 뿌리로부터 생명력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은 완전하시나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가 태양빛이라면 우리는 촛불이나 다름이 없다. 우리는 겸손 밖에는 선택할 여지가 없다. 오직 겸손을 선택하고 하나님을 경험하고 만나지 않고는 겸손해지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한다. 능력을 받기 위해 만나기보다는 우리를 겸손케 하시는 온전하신 하나님을 만나야한다. 그로부터 겸손을 배우고 받아야한다. (내 마음은 겸손하고 온유하니 내게서 배우다). 우물 안에 개구리는 자신의 왜소함을 알지 못하고 자신이 가장 위대한 존재라고 착각하며 산다. 개구리처럼 우리도 많은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다. 이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을 보고 그보다 자신이 더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하며 살고 있다, 우물 안 개구리는 교만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오면 겸손해진다. 작은 인간관계, 사람들을 통해 보는 자신, 거울에 비춰진 모습 우리를 속이고 기만하지만 전혀 깨닫지 못하고 살아간다. 위대한 하나님 앞에 비춰진 자신의 흉한모습, 죄로 얼룩진 자신의 영혼을 보면 그제야 자신의 가난함, 무지함을 발견하고 애총하며 울게 된다. 자신을 비로써 깨닫게 되고 자신과 함께 살면서 한번도 볼 수 없었던 자신을 보며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을 알려고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자신을 알게 되며 볼 수 있게 된다.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잘못을 용서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교만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증거는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겸손하며 남을 불쌍히 여기며 온유함이다. 성숙은 자신에게 높은 기준을 세우고 타인에게는 관대함을 말한다. 교만한 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메스컴을 통해 세상에서 벌어지는 악한 일들을 많이 본다. 그들과 자신과 비교 하여 자신을 선하다고 인정하는 것은 큰 실수 이다. 죄는 마찬가지이다. 크던 적던 죄는 죄이기 때문이다. 강도와 살인자와 자신을 비교하지 말라. 겸손을 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것이다. 겸손을 배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를 예수님과 비교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환경 장점과 이점을 가졌다면 그들은 나보다 훨씬 더 충실한 인생을 살았을 것이며 자신이 그들이 가진 어려움과 단점을 가졌다면 그들보다 훨씬 악한 일을 저지르고 깊은 죄악 속에 빠졌을 것이다. 비교하지 말고 불쌍히 여기라 그리고 배우고 깨달으라. 다윗이 우리보다 못해서 간음을 저질렀을까, 베드로가 우리보다 못해서 예수님을 부인했을까, 롯이 우리보다 못해서 소돔과 고모라 땅으로 이주했겠는가?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는가,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어떠한가? 우리 안에 간음한 다윗이 있고, 부인한 베드로와 유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존재한다. 단지 그런 상황을 만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도 정죄할 수도 무시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다. 겸손을 우리로 하여금 파도에 밀려가지 않도록 제자리를 지키게 해주는 닻이다. 그리고 겸손은 바람을 받아 멀리 갈수 잇도록 해주는 돛대이다. 죽음: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원치 않는다 그러나 누구나 죽는다. (아켐피스) 항상 죽음의 순간을 생각하며 매일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인간은 삶과 죽음의 순간에 존재한다, 삶이란 죽음과 연결된 고리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지만 사람들은 죽음을 생각하기도 논하기도 싫어한다. 그러나 바드시 찾아온다. 죽음을 준비하지 않고 무시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죽음앞에 가장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미래를 준비하면서 산다. 모든 준비 중에 가장 절실히 필요한 준비는 죽음의 준비이다. 사람들은 염려나 계획한 일들이 100% 이루지 못한다. 그러나 100%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사람들은 죽음보다는 사는 것을 먼저 생각한다. 사는 것을 더 좋아 한다.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인들도 죽음을 깊이 생각하기를 싫어한다. 삶보다 죽음의 더 중요하다. 삶은 육체로 사는 것이요 죽음은 영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삶은 끝이 있지만 죽음과 연결된 영혼의 삶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식이 장례식이다. 그러나 자신은 그 식에 참석하지 못한다. 죽는 다는 것을 인식은 하지만 먼 미래의 일로 여기며 현재에는 전혀 자신과 무관하다고 여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무시한 채로 살다가 죽어간다. 또한 죽어가면서도 죽음의 실체와 준비를 못하고 갑자기 죽어간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죽음을 준비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무관심한 삶이다. 죽음을 준비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갑작스러운 일이고 슬픈 일이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도 슬퍼하는 것도 죽음이다. 그 이유는 죽음을 모르고 준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을 무시하고 거부하는 상태에서 영성의 성장을 논할 수 없다. 우리가 근시안적이며 현재 누리는 낙과 세상의 기쁨, 사랑, 관심, 소유에 대한 욕심, 분주함, 쾌락과 탐닉이 시야를 가리고 발등만 보게 하기 때문이다. 눈은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는 있어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당신은 오늘 죽을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를 살고 죽을 것처럼 생각과 행동을 정리하면서 살아가라 라고 말한다. 만약 당신이 7주일 후에 죽는다면 무엇을 할 것 인가? 단연 영적인 일에 대한 관심을 가질 것이다. 빌려준 돈을 받으러 가지 않을 것이며 새 옷을 사려고 백화점에 가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삶을 돌아볼 것이며 자신 때문에 슬퍼했고 자신이 고통을 주었던 사람들을 찾아갈 것이다.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고 준비하는 것 외에 중요한 일이 없을 것이다. 죽음은 모든 것이 다 드러나게 된다. 그동안 감추고 속인 모든 것들이 다 드러난다. 영성가 들은 인간의 죽음에서 가장 심오한 깨달음을 발견했으며 자신의 죽음을 미리 준비하고 살았던 사람들이다. 죽음을 통해 영적 유익을 발견했으며 삶의 실상을 파악했으며 삶을 정비했다. 죽음 앞에서는 지나온 모든 세월이 허상이 되며 부질없음이 되며 낙엽과 같다. 용맹한 장군도 거부도 세상의 많은 지식을 소유한 학자도 구걸하면서 살아가던 걸인도 다 똑같아진다.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누구나 같다 그러나 살아가는 삶은 천태만상이다. 부하고 귀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천하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도 있다. 행복하게 사는가 하면 일평생 고통과 불행 속에서 살다가 간 사람도 있다. 100수를 하고 죽는 사람도 있지만 태어나서 얼마 있지 않아서 죽는 죽음도 잇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는 다 똑같다. 다 떠난다, 빈손으로 세상의 부귀도 살아오면서 받았던 서러움도 고통도 다 잊어버리고 버리고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떠난다. 당신은 오늘을 마지막으로 생각한다면 그날을 경건하게 보낼 수 있다. 마지막이라고 한다면 어떠한 죄의 유혹도 슬픔도 고통도 이길 수 있다. 죽음은 형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며 축복이다. 우리를 안식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청장이다. 만약 육신으로 영원히 산다면 우리에게 하나님은 필요 없는 존재가 된다. 죽음은 우리에게 초점을 맞춰준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가서 지난 일생동안 살아오면서 해온 일에 대한 손익을 계산해야한다. 삶을 편안하게 하려고 하지 말고 죽음을 편하게 하려고 하라. 이 땅에서 애쓰고 수고하면 죽음은 편안하게 될 것이다. 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뜻을 따르고 순종하면서 살아간다면 세상에서는 낙과 즐거움을 누리지는 못하나 죽음은 편안할 것이다. 죽음의 순간 두려워하고 절망하는 것은 그동안의 삶이 그랬기에 다음 세계에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삶이 두렵기 때문이다. 거지와 나사로의 죽음을 기억하라. 두 사람은 세상 즐거움을 누리고 산 사람과 고생하면서 살아온 사람의 끝을 말해준다. 부자 죽음에 대해 전혀 준비하지 않았다. 부자는 늘 곳간을 보고 늘어가는 재산과 돈쓰는 일로 인해서 늘 바쁘게 지냈을 것이다. 그렇게 오래 오래 살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에게도 죽음은 다가 왔다. 눅12:16-21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 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파스칼은 우리의 열정을 해로운 일에 쓰지 않으려면 우리가 살날이 많지 않은 사람처럼 행동하라. 자신의 현재 삶이 얼마나 편안하게 할까 생각하기 보다는 죽음의 순간에 얼마나 편안해 질까를 생각하라. 죽음을 생각한다면 자신을 더욱 발전시킬 것이다. 육은 죽고 영은 살아날 것이다. 육체의 욕심을 쫒지 않고 성령을 쫒아갈 것이다. 현재의 고통을 넉넉히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무질서와 죄의 습관은 언젠가는 바로 정리될 것이다 세월이 지나면 잘 될 것이라는 생각은 망상이며 불가능한 일이다. 현재 살아가는 일에 충실하고 즐김과 쾌락을 추구한다면 점점 더 나쁘게 될 것이다. 허겁지겁 들어갈 것이가, 어디로 가는 줄 모르고 막연하게 갈 것 인가, 절망과 후회를 하면서 껄 껄 하면서 갈 것인가 지금부터 준비하라. 최선을 다해 살다가 떠나 가야한다, 깨야 있다가 가여 한다, 기다리고 준비하다가 가야한다, 선한 싸움을 싸우다가 가야한다. 천국은 우리에게 위험이 아니라 위로이다. 이는 사람과의 이별이며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세상을 뒤로하고 천국 앞으로 가는 것이다. 모든 짐을 내려놓고 영원한 안식과 평안으로 가는 것이다. 고전 15: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죽음을 살아있게 하라. 성자들의 삶을 보라. 그들이 살다가 죽은 일생을 보라. 그들의 수고와 주를 위해 살았으며 그들의 죽음은 얼마나 영광스러웠을 까 죽음을 준비하고 기다렸던 분들을 기억하라. 우리는 그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기 전에 살아 있는 동안 만나야 한다. 그리고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앞으로 죽는 날 까지 살아가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살아계시는 동안 늘 죽음과 함께 계셨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죽음을 맞이하셨다. 인류 역사상 가장 가치 있고 거룩한 죽음의 순간이다. 그렇게 거룩한 죽음을 맞이하셨던 이유 중의 하나는 오랫동안 준비하셨기 때문이다. 이 땅에 오시기 이전부터 준비하신 죽음이셨기 때문이다. 고통과 영적 성장. 누구나 고통을 싫어하고 기피 한다 본능적으로 고통을 싫어하지만 인생에서 고통을 만나게 된다. 영성과 고통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것은 고통당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베네롱- 고통을 받고 천국에 간 성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그들은 영광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고통을 모르고 영원한 비극에 빠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윌리암 로우-. 나는 달콤하고 편안함 가운데 거하려고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렇게 하여 영성을 성장한다면 그 어떤 것도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존 클리마 쿠스- 마리아와 요셉의 경우에 그들이 받는 고통은 그들의 영혼을 성숙시켜 주었다. 마리아의 임신은 그녀에게 처절한 고통이었다. 처녀의 몸에 생명이 잉태된다는 것은 마리아에게 죽음과 같은 것이었다. 당시 간음한 여인에게는 돌에 맞아 죽게 되어 있었다. 또한 요셉에게도 엄청난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두 사람에게 충분한 고통 뒤에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요셉이 고통 하는 날 밤 천사가 찾아와 그간의 일들을 설명해 주었다. 왜 좀더 일찍 찾아오시지 않고 왜 고통을 한 후에 오셨을까. 그들이 고통 받아야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통에는 이유가 있다. 고통은 영성을 성장시키는 기폭제 역할을 한다. 인간은 고통이 와야 비로서 자신을 돌아보고 하늘을 쳐다본다. 시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주님의 일생을 기억해 보라 태여남에서 죽음의 십자가 까지 안락하고 쾌적한 환경, 진수 성찬이 어디에도 없다 오직 고난의 연속이셨다. 그는 그가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기꺼이 쓴잔을 받아 마셨다. 우리는 고난을 거부한다. 그리고 즐거움을 찾아간다. 이 부분이 옛날의 신앙인들과 다른 부분이다. 이러한 현상은 앞으로 더해 갈 것이다. 더 편안함과 더 풍성함과 과학과 문화를 즐기려고 할 것이다. 자연은 점점 더 파괴되어 갈 것이며 사람들은 고통을 자신에게서 더 멀리 던져버리려고 할 것이다. 인간은 왜 고통을 피할 수 없는가? 1) 육체적인 존재이므로 장애와 한계. 육신의 힘과 주장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이다.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에 약하므로 번번이 넘어간다. 금식하고 싶지만 위장이 참아주지 않는다. 고통을 주고 몸의 기운이 빠진다. 영은 금식을 원하지만 육체는 죽기로 막는다. 왜냐하면 먹는 것은 육신의 즐거움이며 먹는 것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금식은 영은 살고 육이 죽이는 길이다. 누구나 자기가 죽으려고 하겠는가. 육신은 자기 죽을 짓을 하기 싫어한다. 몸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며 우리를 지배하려고 한다. 육체적 경제적인 어려움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고난을 격는다. 2) 사회적인 고통. 우리는 죄인으로 둘려 싸여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상처도 주지만 상처도 받는다. 사랑도 하지만 미움도 한다. 부모와 자식간에 서로 상처를 주며 아내와 남편 사이에도 갈등이 있다.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고통은 늘 우리를 기다린다. 고통은 멀리 있는 사람보다 가까운데 있는 사람으로부터 받는다. 그러나 고통을 외면하고 떠날 수 없다. 고통과 함께 살아야한다. 받는 고통을 자신을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에너지원으로 사용하자. 그러기 위해서 고통을 받을 이유와 목적이 있음을 깨달아야한다. 고통에는 반드시 숨겨진 은총이 기다리고 있다. 3) 죄를 지으려는 경향. 죄 가운데서 태여나 죄를 지으면서 일샹을 보낸다. 인간의 일생은 죄의 역사이다. 우리를 죄 가운데로 이끌고 가는 원수는 위에 있고 옆에 있고 안에 있다. 4) 죄의 유혹.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나니 라고 경고 한다. 마귀는 죄의 유혹을 통해 우리들을 넘어트리고 타락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 마기는 우리가 기도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형제들과 부부간에 화목하게 지내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절대로 원치 않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유혹한다. 5) 속이는 마음. 간교한 자신의 마음이다. 스스로를 속이고 하나님과 사람을 속이는 습성이 마음속에 있다. 가장 많이 속이는 존재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남에게는 속지 않아도 자신에게는 속는다. 자신에게 있는 고통을 인정하지 않고 버린다면 더 무거운 고통이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고통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고통으로 인해 많은 수확을 얻게 될 것이다. 고난을 받아들이면 고난의 유익과 달콤함을 맛볼 수 있다고 테레사는 말했다. 배불리 먹는 기쁨도 있지만 금식하고 속이 통비지만 영혼에서 피어오르는 기쁨과 평안이 있다. 고후 4:17 배부를 때에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기가 힘들지만 금식할 때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기가 힘들다. 영성을 성장시키려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쉽지 않을 것이다. 적당히 살려고 하면 쉽고 재미있다 그러나 진리를 탐구하고 삶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리스도를 섬기려고 하면 세상은 결코 가만히 두지 않고 도전을 해온다. 그리고 고통이라는 선물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쉽지 않다 단순하지 않다 적당히 되는 데로 살아가기란 우리의 인생이 너무나 가치 있으며 하나님의 뜻이 너무나 강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