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계역에서
-임윤

추수 끝난 들판에 눈이 내린다
고라니 귀에 걸렸던 아침이 천천히 걸어 나오면
눈은 소리 없이 밝아진다
하늘 눈썹을 들춰 까마귀 떼가 먹물처럼 번지는 동천강
호계역을 향해 달려오는
무궁화호 열차의 걸음이 가볍다
가난의 장막을 걷어
노동자의 지문으로 만들어진 도시
살아 숨 쉬는 입김만으로도
우리는 불멸이라 말할 수 있으리
눈은 소리 없이 쌓여 참새들 발자국이 소복하다
소란스러운 아침
함박눈 속으로 천천히 떠나가는 기차
거친 숨결이여
폭설 앞에 당당한 걸음이여

달리역 약사

태화강 철교를 넘는 바퀴가 요란하다
운동장에 줄지어 서서 조례가 한창인데
간이역에 도착한 비둘기호
간수의 호루라기 소리
운동장 마이크 잡음이 뒤섞인 메아리
한줄기 회오리바람이 흙먼지를 일으킨다
철길을 돌아 정문으로 등교하기엔 먼 거리
먼저 담장을 넘어온 책가방
연이어 통학생 몇몇이 뛰어넘는데
지켜보던 선생님에게 들켜
한차례 원산폭격과 몽둥이가 날아다닌다
더러는 퇴학당하고 더러는 졸업했다
기차를 타고 떠나고 싶던
학생인지 학도병인지 아리송하던 공고 시절
같은 장면을 매일 찍어내던 달리역
울산공고라는 이름 대신
우리는 수시로 달리공고라고 불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