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방정식 (릴리언 피크) 삼중당 R-40 1983년 Man out of reach 조종 옮김 1장 로잘리는 기다림에 지쳐 있었다. 명문 사립 남자학교의 교사에서 이 대학의 강사로 전임해 와서 오늘이 그 첫 출근날이었다. 아침에 차 속에서 '수업이 끝나면 내 방으로 오너라, 같이 집으로 돌아가자. 오늘부터 나는 네 운전사가 됐잖니' 하고 기쁜 듯이 말하던 아버지가 아직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시간에 느긋한 아버지라서 어느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으나 수업이 끝난 지 삼십 분 이상이 지났으므로 아버지의 비서인 젠도 벌써 퇴근한 후였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읽고 있던 아버지의 서류에서 얼굴을 들어 로잘리가 몇 번째의 한숨을 쉬고 있을 때에야 겨우 복도 쪽의 문이 열렸다. 로잘리는 웃음을 띤 명랑한 얼굴로 아버지를 기다렸다. 로잘리의 웃음띤 얼굴 표정이 갑자기 얼어붙었다. 문간에 나타난 사람은 본 적도 없는 남자였다. 키가 크고 건강한 체격에 아주 의지가 굳세어 보이는 얼굴 생김새, 그리고 갈색 눈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남자는 서슴없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앉아 있는 자세가 도대체 그게 뭐요?" 입을 열자마자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지적당한 로잘리의 자세는 확실히 그다지 얌전한 자세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회전의자에 깊숙이 앉아서 빈 휴지통 위에 다리를 올려놓고, 더욱이 신발은 벗은 채였다. 책상 위에는 먹다 남은 초콜릿 포장지가 어지러져 있었다. 로잘리는 얼굴을 붉히며, 책상의 본래 있던 자리에 서류를 갖다 놓고 신발을 신고 일어섰다. "저… 이거, 정말 실례했습니다." 몹시 애쓴 끝에 그녀가 생각해 낸 것은 겨우 이 말뿐이었다. 남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은 새로 온 교직원이오?" "네, 오늘 처음 나왔습니다. 오늘이 개강 첫날이므로…" 로잘리는 멋없는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소. 내가 긍금한 것은 당신이 이 방에 슬그머니 들어온 까닭이야. 당신은 글씨를 읽지 못해요, 문에 <이수학과 주임교수실>이라고 똑똑히 씌어져 있는데? 당신 어느 학과 소속이오?" "일반교양학과입니다. 그리고 저는 사회학 담당 강사입니다." 그러자 남자는 호주머니에서 수첩을 끄집어내더니 방금 로잘리가 한 말을 메모했다. "그럼 이름은?" 로잘리의 놀람은 분노로 변해 버렸다. 도대체 이 남자는 무슨 권리로 이렇게도 고자세로 남을 심문하는 것일까? "왜 그러지? 빨리 이름을 말해 봐요." 로잘리는 그래도 계속 침묵을 지켰다. "남의 이름을 물으려면 먼저 자기 이름부터 대라, 이 말이군? 그럼 말하지, 나는 이 학과의 부주임이오." 로잘리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버지가 '아주 뛰어난 사나이다.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대성할 거야'라고 입의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그 부주임이란 사람이 바로 이 남자인 것 같았다. 그는 다시 계속해서 말했다. "따라서 주임 부재시는 이 방의 관리 책임자는 나요. 그런 위치에서 허가없이 주임교수의 책상을 점령하고, 더욱이 서류까지 훔쳐 읽은 자에게 묻고 있는 거요. 이젠 체념하고 이름을 말하는 것이 어때?" "미안하지만 말씀드리고 싶지 않아요." 로잘리는 쌀쌀하게 대꾸하며, '이름을 듣고 당황할 쪽은 당신이에요'라고 말할까 했으나 그 말만은 참기로 했다. "당신이 말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라면 그래도 좋아. 이름쯤은 알아보면 곧 알 수 있겠지. 덧붙여서 당신의 반항적인 태도도 인사과에 보고해 두지." 남자는 수첩을 호주머니에 넣었다. "자, 그럼 이쪽 일은 끝났으니 당신도 서둘러 짐을 챙겨 이 방에서 나가 주시지." 노여움으로 얼굴이 빨개진 채 복도로 달려나가던 로잘리는 때마침 돌아온 아버지와 맞부딪치고 말았다. "로잘리! 늦어서 미안해. 화가 나서 돌아가려던 참이었나? 부탁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 나도 곧 돌아갈 채비를… 아니, 클레이포드 박사, 자네도 여기 있었던가?" 로잘리는 아버지 곁에 다가서서 얄미운 상대방의 얼굴을 의기양양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로잘리를 곁눈질로 힐끔 보면서 태연하게 말했다. "너무나 매력적인 여성이기에 따님인 줄 모르고 그만 이야기에 열중하고 말았습니다, 팔람 박사님." 프랭클린 팔람은 새삼스럽게 두 사람을 소개했다. "로잘리, 이분은 전에도 말한 에이드리언 클레이포드― 클레이포드 박사란다. 얘는 나의 외동딸 로잘리야. 로잘리는 오늘부터 우리와 함께 근무하게 됐지. 일반교양학과의 강사이지만." 아버지가 짓는 쓴웃음의 뜻을 로잘리는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라는 입장을 떠나서 말한다면, 나는 이 대학과 같은 기술계 대학에서는 일반 교양 따위는 무용지물이라고 생각한다고 무심코 말했다가 얘의 핀잔을 받기도 했지. 그렇지, 로잘리?" "네, 아버지." 로잘리는 아버지를 바라보던 눈길을 클레이포드 박사에게 돌렸다. "그럼 당신도 저 현명한 이과계 자연과학자님들과 한동아리인가요?" "아버님과 같은 학문에 종사하는 한 사람이지만, 현명한지 어떤지는…" "곧이듣지 마, 로잘리. 겸손으로 하는 말이니까." "이분이 겸손하시다고요? 믿어지지 않는데요." "그러면 실례야, 로잘리. 용서해 주게, 클레이포드 박사. 실은 나의 아내도 수학자야. 수학에 관한 이야기를 자장가처럼 듣고 자랐으므로, 이애의 표현을 빌린다면 '이과계 인간 알레르기'에 걸려 있다는 게야." "저런…" 진기한 동물이라도 보는 듯한 남자의 시선에 로잘리는 울컥 화가 치밀었다. "빨리 돌아가요, 아버지. 몹시 짜증나는 일이 있어서 왠지 지쳐 버린 기분이에요." "짜증나는 일이라니, 수업 중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니?" "아뇨, 아버지. 수업은 대단히 즐거웠어요― 수업은요." 로잘리는 남자에게 짐짓 보란 듯이 명랑하게 말했다. 프랭클린은 서류 가방을 들고 딸의 팔을 잡았다. "자, 오늘은 이만 실례하네, 클레이포드 박사. '그 일'은 다른 날 천천히 상의하기로 하세. 로잘리, 내가 새로운 수학 참고서를 만들고 싶다고 전부터 생각해 온 것은 너도 알고 있지? 이번에 저 친구가 자진해서 도와 주겠다고 해서 오랫동안의 꿈이 실현될 수 있게 됐어." "어머나, 아주 친절한 분이시군요!" 로잘리는 비꼬듯이 말했으나, 클레이포드 박사는 통쾌한 듯이 입술을 일그러뜨릴 뿐이었다. 집에 돌아온 로잘리는 이층으로 올라가는 아버지를 보고 부엌에서 물었다. "엄마는 늦으신데요?" "아냐, 식사 시간까지는 돌아온다고 했어!" 로잘리는 재빨리 에이프런을 두르고, 문명의 이기(利器)에 감사하면서 타이머가 붙은 오븐 속을 들여다보았다. 출근하면서 넣어둔 스테이크 용 고기가 석쇠 위에서 맛있는 소리를 내면서 구워지고 있었다. 요리와 디저트의 준비가 다 끝났을 때에야 어머니가 돌아왔다. "다녀왔다, 로잘리." 부엌과 식당을 바쁘게 오가고 있는 딸에게 샐리 팔람은 말했다. 다갈색의 머리에 흰머리가 약간 섞여 있기는 하지만, 도저히 사십대의 여성으로는 보이지 않는 젊음과 미모였다. "어머! 벌써 다 됐어? 어쩌지, 늘 수고만 끼쳐서." 로잘리는 달려가서 어머니의 날씬한 몸을 양팔로 꼭 껴안았다. "엄마는 요리 걱정 안하셔도 돼요. 저에게 맡기세요." 샐리는 딸을 가볍게 밀치면서 급하게 말했다. "오늘 학생이 질문한 수학 문제가 아무리 해도 풀리지 않았어. 너희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야겠어. 아버지는 이층에 계시니?" 한 동아리에서 따돌림을 당한 것 같은 허전함을 뿌리치면서 로잘리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잰걸음으로 자리를 뜨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식사 준비가 다 끝났는데도 양친은 전혀 내려올 기미가 없었다. 기다리다 못해 로잘리가 혼자서 식사를 시작하자, 그때서야 겨우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났다. 손을 잡고 식당으로 내려오는 두 사람을 보는 순간, 로잘리는 또다시 따돌림을 당한 듯한 쓰라림을 가슴에 느꼈으나, 곧 그런 자기를 스스로 엄하게 꾸짖었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야 샐리는 오늘이 딸의 첫 출근날인 것을 알아차렸다. "깜박 잊고 있었어. 미안해, 로잘리. 새 직장은 마음에 들었니?" 로잘리는 신이 나서 대화에 끼어들었다. "물론이죠, 어머니. 단지 묵묵히 이쪽 말만 듣고 있는 양가의 아이들과는 달리, 대학생들은 민감하게 반응을 보이거든요. 가르치는 쪽도 보람이 있어요." 로잘리는 오늘 클레이포드 박사와 서로 아는 사이가 됐소." 아버지가 옆에서 말했다. "그래서 생각났는데 샐리, 좋은 뉴스가 있어요. 바로 그 참고서 만드는 일인데, 마침내 착수할 수 있게 됐어. 그가 도와 주겠다고 약속했거든." "친절한 사람인 것 같군요. 내가 안고 있는 어려운 문제도 그에게 도움을 청할 수 없을지." "부탁하면 싫다곤 하지 않겠지. 꽤 마음씨가 고운 사람이니깐." 듣고 있던 로잘리는 하마터면 짖궂은 웃음소리를 낼 뻔했다. "조만간에 그를 저녁식사에 초대해서 참고서에 관한 구체적인 상의를 하려던 참인데, 그때에 당신이 직접 부탁하는 것이 좋겠어. 좋은 일은 때를 놓치지 말고 서둘러 하라는 말처럼. 내일 그를 대학에서 만나면 곧… 아니아니, 안 되지. 나는 내일 런던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해야 되니까. 로잘리, 네가 내일 그의 형편을 알아보고 우리쪽 생각을 전해라." "저… 제가요?" "그래, 부탁한다. 자! 그럼 며칠쯤이 좋을까. 모레는 어때, 샐리?" 어머니는 수첩을 끄집어 내더니 스케줄을 살폈다. "모레라, 수요일인가요? 마침 수업이 없어요. 로잘리, 너도 괜찮지, 식사 준비를 1인분만 더 하면 되니깐? 부탁해." 되어가는 상황에 놀라면서도 로잘리는 하는수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머릿속으로는 그날의 식단을 짜기 시작했다. 식사를 끝내고 남편과 둘이서 이층으로 다시 올라가면서 샐리가 말했다. "그릇은 그대로 놔둬라, 로잘리. 내가 나중에 치울 테니." 로잘리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으나, 양친의 모습이 사라지자 익숙한 솜씨로 설거지를 시작했다. 이튿날 오후, 로잘리는 대학 복도에서 클레이포드 박사와 마주쳤다. 전혀 무관심한 체하면서 스쳐 지나가려는 상대를 로잘리는 조심스럽게 불러세웠으나, 돌아보면서 의아스러워하는 그의 표정에는 애써 낸 용기가 꺾이면서 도망치고 싶은 기분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오, 미스 팔람?" "저… 아버지가 박사님을… 내일 저녁식사에 초대하고자 하는데, 그쪽 형편이 어떤지 알아보라고 부탁하시기에…" 클레이포드 박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래도 어떤 다른 이야기를 예상했던 것 같았다. "그것은 매우 감사한 일이군. 그러나 사양하는 것이 좋을 듯하군. 바쁘신 어머님에게 폐를 끼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니까." "아버지는 참고서 문제를 꼭 상의하고 싶어하시고, 어머니도 아무리 해도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에 도움을 받고 싶으시다니까 사양할 필요는 없습니다. 더구나 어머니께 수고를 끼친다는 염려는 하지 않아도 좋아요. 우리 집의 요리 담당은 저니까요." "당신이?" 갈색 눈이 의심스럽다는 듯이 빛났다. "그렇게 걱정 안하셔도 돼요, 클레이포드 박사님. 저는 어떤 손님에게도 요리 접시에 독을 타서 드린 일은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앞으로의 일은 무어라고 보증할 수는 없지만." 그의 입술이 웃는 듯이 잠깐 비뚤어지더니 곧 본래대로 꼭 다물어졌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안 간다면 겁쟁이라는 비난을 받겠지. 그럼 죽든 살든 그 위험스럽기 그지없는 식사를 대접받기로 하지. 부모님에게 잘 전해요. 그러나 아무리 아버님의 분부라고는 하지만 싫은 사람을 저녁식사에 초대해야 하니, 당신도 어지간히 고역이겠군." "그것은 피차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쓸데없는 질문에는 대답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그는 홱 몸을 돌려 등을 보이면서 복도를 걸어갔다. 다음 날 방과 후 로잘리는 또다시 아버지의 사무실에서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버지의 회전의자에 앉을 용기가 나지 않아 문 뒤에 있는 작은 의자에 얌전히 앉아서 대학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자 문이 열리면서 에이드리언 클레이포드가 방 안을 들여다봤다. 대충 휘휘 둘러보더니,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지 곧 문을 닫으려고 했다. 로잘리는 작은 소리로 그를 불러세웠다. "아버지를 찾고 계신가요, 클레이포드 박사님?" 그는 흠칫하며 돌아보더니 마치 숨어 있는 범인이라도 발견한 듯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아니, 당신을 찾던 중이오. 아버님께서 회의로 늦어지겠으니, 우리 두 사람이 먼저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거든. 내 차로 당신을 모시고 가기로 했지." 자못 마음이 내키지도 않는 역할을 맡은 듯한 말투였다. 로잘리도 그에 못지않게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하는수없이 키 큰 남자의 뒤를 따라 방을 나왔다. 차의 시동을 건 후 클레이포드 박사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참고서 이야기를 하는 데에 필요한 서류를 집에 두고 와버렸군. 잠깐 들렀다 오겠소. 아니, 잠깐이면 돼요. 한 이삼 분쯤이면 족해." 상대가 입을 꽉 다물고 있는 것이 몹시 비위에 거슬린 로잘리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 물었다. "댁에는 사모님과 아이들도 계십니까, 클레이포드 박사님?" "가정을 가진 남자가 겨우 두 칸밖에 없는 하숙생활 따위를 할 것이라고 생각해?" 쓸데없는 일로 입을 여는 것은 귀찮다는 투로 그는 말했다. 그러나 그러는 그와는 반대로 로잘리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물론이죠. 선생님 정도의 나이라면 혼자서 부임하는 것도 드문 일이 아니니까요." "나를 마치 늙은이 취급을 하는 것 같군 그래. 어쨌든간에 나는 단신으로 부임하는 일에는 찬성할 수 없소. 부부가 떨어져서 산다는 것은 아이들에게도 좋지 않거든." 그렇게 말한 뒤, 그의 입 언저리가 쓴웃음으로 일그러졌다. "내가 아내나 아이들 걱정 따위를 하다니, 묘한 이야기로군. 자유분방한 외돌토리 늑대생활을 한평생 버릴 마음도 없으면서." "연애를 해본 적은 있으시겠죠?" "옛날에 딱 한 번. 여자가 딴 남자에게로 갔을 때는 정말 마음 아프더군. 이성교제 같은 것엔 이젠 넌더리가 났소. 그후부터 여자하고는 두번 다시 가까이하지 않기로 했지." "그것은 저한테 하는 경고인가요. 그렇지 않으면 도전인가요? 저는요, 남한테 도전을 받으면 그 도전을 받아들여 꼭 맞서지 않고는 못 배기는 별난 성격이거든요." "어느 쪽도 아니오. 그저 단순한 사실을 말할 뿐이야." 조용한 거리에 면한 현대식 단독주택 앞에서 그는 차를 멈추었다. "저… 여기가 방금 말씀하신 하숙인가요?" "이층만이오. 아래층에는 주인이 살고 있지." 그렇게 말하더니, 그는 차의 문을 닫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로잘리는 충동적으로 차의 창문을 열고 소리를 질렀다. "따라가도 괜찮을까요?" 몇 초 동안이 지난 뒤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이 꼭 따라오겠다고 하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소." 이층으로 통하는 전용 계단을 올라가면서 그는 말했다.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져 있거든, 남을 데려오리라고는 전혀 예상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이오." 확실히 볼 만한 광경이었다. 거실 겸 식당인 듯한 그 방의 테이블에는 아침식사를 한 그릇이 그대로 놓여 있었고, 마루에는 내팽개친 책과 잡지로 발을 들여놓을 틈도 없을 정도였다. 로잘리의 표정을 살피면서 방의 주인은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라니까, 이러니 차에서 기다리고 있는 편이 훨씬 좋았을 텐데." "비난할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다만 여성으로서의 내 본능이 '청소하고 싶다'고 아우성치고 있을 뿐이에요." 뭇방치기는 필요없다는 그의 어조에서는 뜻밖에도 약간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여자들이란 뭐든지 곧 치워 버리고 싶어해서 곤란하거든. 나는 이런 장소가 아니면 침착해지지 못하는 성격이란 말이오." 두 사람은 처음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띠었다. 로잘리는 가슴이 기묘하게 그리고 뜨겁게 소용돌이치는 것을 느끼고 급히 창가에 있는 작은 테이블로 걸어갔다. 높게 쌓인 책과 서류 뒤에 은테를 두른 액자가 세워져 있었다. 로잘리는 액자를 들고 그 속의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언 클레이포드는 이미 서류를 들고 문간에 서서 재촉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으나, 로잘리는 그것을 무시한 채 말했다. "이 사진은 박사님의 어머님이신가요?"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얼굴과 사진을 로잘리는 번갈아 보면서 비교했다. "눈언저리가 꼭 닮았군요. 그리고 콧날이 선 것과 광대뼈가 불거져 나온 것도." "내 얼굴의 구조 분석은 그쯤 해두고 슬슬 떠나지 않겠소?" 로잘리는 그래도 사진을 놓지 않았다. 웬일인지 아주 그리운 사람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좀처럼 떠나기가 싫었다. "어머님은 어떤 분이세요, 클레이포드 박사님?" 그는 서슴없이 방 안으로 되돌아오더니 로잘리의 어깨너머로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보시는 바와 같이 몸집이 자그마하고 뚱뚱하시지. 마음씨 곱고 명랑한 성격이어서 이기적인 데란 조금도 없는 극히 평범한 분이오." "어디에 살고 계신가요?" "더럼 주의 작은 마을에서 살고 계시지. 미망인의 혼자 살림이오." 그는 로잘리의 손에서 사진을 빼앗아 본디 장소에 세웠다. "왜 남의 어머니에 대해 흥미를 갖지요? 어머니는 당신하고는 타입이 전혀 다른 여성인걸." "그래요?" 로잘리는 쌀쌀하게 반문하고 나서 걸음을 떼놓기 시작했다. 개암나무 빛깔의 동그랗고 귀여운 눈은 눈물에 젖어 있었다. "어쩐 일이야, 뭔가 기분이 언짢은 일이라도 있소?" "아뇨, 별로." 차에 타서도 침묵을 지키는 로잘리에게 기분이 상한 듯한 소리로 그가 말을 걸어왔다. "방이 몹시 어질러져 있어서 기분이 상한 것 같은데, 뭐 내가 억지로 부탁해서 와달라고 한 것도 아니잖소." "그 일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 이야기해도 어차피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이해할지도 모르지 않소. 시험삼아 이야기해 봐요." "괜찮습니다. 저는 남을 믿지 않는 주의예요." "젊은 나이에 꽤 앵돌아져 세상을 등지고 있구먼." 고개를 약간 가로 흔들 뿐 로잘리는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짧은 침묵을 깨고 그가 말했다. "당신 양친 앞에서도 이런 상태를 계속했다간 이상하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어. 적어도 오늘 밤만은 임시 휴전을 하지 않겠소?" 로잘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방긋이 웃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답답했던 가슴이 거짓말처럼 후련해졌다. 그녀는 장난기 어린 말투로 입을 열었다. "전날의 제 행동을 벌써 인사부장에게 보고했어요?" "아직 생각중이야." 로살리는 놀랐다. "설마, 본심은 아니겠죠?" "진심이야.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요." "전, 별로 나쁜 일은 하지 않았어요." "그런가? 단정하지 못한 자세로 책상을 차지하고 서류를 함부로 읽은 데에 대해서는?" "어린 시절에는 그 방에서 그보다 더 심한 장난을 쳤어요. 그래도 꾸지람을 듣진 않았어요." "옛날은 옛날이고 현재는 현재야. 대학의 일원이 된 이상 구분을 지을 줄 알아야 할 게 아뇨." 로잘리는 얼굴을 숙였다. "저…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해도 용서해 주시지 않겠어요?" 대답이 없었다. 놀라서 쳐다보니, 그의 엄한 표정이 약간 누그러져 있었다. 차가 집에 가까와졌을 때 그는 말했다. "결국, 나는 그런 발칙한 행동을 한 범인으로부터 아직까지도 이름을 듣지 못한 채 그대로군." 사나이다운 얼굴에 관대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로잘리는 감사하다는 표정을 담뿍 얼굴에 띠고 미소로써 답했다. 손님을 거실로 안내한 로잘리는, "아버지가 돌아오실 때까지 여기서 편히 쉬고 계세요." 하고는 종종걸음으로 주방으로 들어갔다. 오븐 안에서는 감자와 불고기가 순조롭게 한창 구워지는 중이었다. 어젯밤에 구워 놓은 애플 파이에는 생크림으로 장식만 하면 된다. 그것과… "좋은 냄새군." 에이드리언 클레이포드가 흥미진진한 듯이 주방을 들여다보았다. "훌륭한 솜씨로군. 내 솜씨로는 도저히 이런 요리는 하지 못해." "직접 요리를 하세요? 거짓말이죠? 어려운 수학을 가르치는 학자 선생께서 요리 만드는 일 따위의 세속적인 것까지 손수 하시다니 믿어지지 않아요." "거짓말이 아냐, 가정부든 청소부든 여자라는 명칭이 붙은 존재는 일체 방 안에 들여놓고 싶지 않은 이상엔 죄다 스스로 하는 수밖에 도리 없잖소?" 로잘리는 종종걸음으로 식당에 가서 갓 세탁해 놓은 테이블 보를 힘차게 펼쳤다. "세탁이나 다리미질은 어떻게 하세요?" "그것만은 하는수없이 집주인에게 부탁했지. 단 세탁물은 반드시 계단에서 교환한다는 조건을 붙여서 말이야." 너무나 지나친 철저함에 로잘리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왜 그렇게까지 여자를 싫어하세요. 여자가 무슨 해악이라도 끼친다는 말씀인가요?" "해악까지는 아니지만 몹시 눈에 거슬리거든. 남이 중요한 일을 생각하거나 일을 하고 있으면, 여자는 반드시 정신을 흐트러뜨려 놓는단 말이야." 갈색 눈이 웬일인지 로잘리를 찬찬히 응시했다. "매력적인 여자일수록 이쪽의 정신이 산란해지는 정도도 커지게 마련이고. 그래서 여자는 일체 사절이라는 방침을 고수하는 편이 만사 무난하다 이런 말이지." 즐거움에 가득찬 양친의 목소리가 현관에서 들렸다. "안성맞춤이군요. 두 분의 귀가가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여성의 권리와 남녀평등에 관해, 여기서 일대 격론이 전개됐을 것을." "그건 유감스럽군. 꼭 해보았으면 했는데." 아무리 해도 상대를 꼼짝 못하게 할 수 없는 자신에게 스스로 화를 내며 로잘리는 양친을 마중나갔다. "손님은 벌써 식당에 와 계세요. 아빠와 엄마가 돌아오시기를 몹시 기다리고 계세요." 양친은 딸의 뒤에 나타난 클레이포드 박사와 마주보며 명랑하게 웃고 악수를 교환했다. 어머니가 매력적인 웃음을 얼굴에 띠며 말했다. "잘 오셨습니다, 클레이포드 박사님. 이야길 들었을 줄로 생각합니다만, 저는 지금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를 안고 있답니다…" 남편이 웃으면서 나무랐다. "먼저 식사부터 하지. 애써 만든 로잘리의 음식이 엉망이 되겠어." "고맙습니다, 아버지. 그럼 두 분 빨리 옷을 갈아입고 오세요. 요리는 벌써 돼 있으니까요." 양친을 이층으로 올라가게 한 뒤 로잘리는 주방과 식당 사이를 종종걸음으로 오가며 식탁을 차렸다. 그런 모양을 선 채 보고 있던 오늘의 손님이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 당신이 총알에 튕기듯이 서두르고 있는데, 내가 얼빠진 사람 모양 이대로 서 있을 수만은 없는걸." 로잘리는 참다못해 웃음을 터뜨리며, 조금 동작을 늦추었다. "제가 그렇게 우스꽝스럽게 보여요? 그러나 도와 주시는 건 싫어요. 언제나 혼자서 하고 있으니까요." "그럴 테지." 그는 중얼거리고 나서도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 프랭클린은 수학에 관한 이야기를 못하게 했다. "3대 l이라면 로잘리가 가엾어. 이애가 우리와 같은 길을 선택했더라면 모두가 공통된 화제를 가졌을 텐데." 말없이 식사만 하던 로잘리는 자기의 시무룩한 얼굴을 다른 사람들이 주목한다는 사실을 겨우 알아차리고는 어색한 웃음을 띠며 적당히 얼버무렸다. "클레이포드 박사님, 어머니는 사실은 나를 낳고 싶지 않았대요. 그렇죠, 엄마?" "그… 그렇지 않아요, 로잘리. 임신한 것을 안 직후에 약간 정신이 흔들렸을 뿐이야." "그래도 엄마는 사내아이를 바랬죠?" 도움을 청하는 어머니의 시선을 받은 아버지가 얼버무리듯이 말했다. "로잘리는 남의 관심을 끌려고 하는 버릇이 있다네, 에이드리언. 그러므로 간혹 저렇게 엉뚱한 말을 잘하지. 이애가 입고 있는 옷을 봐도 잘 알 수 있지 않은가?" "저 강렬한 빛깔의 드레스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는 잘 어울린다고 생각됩니다만?" "로잘리, 들었지? 너를 칭찬해 주는 남성이 나타났어!" 그 말에 로잘리는 벌떡 일어나 빈 접시를 치우기 시작했다. "주방에 옮겨 놓기만 해라, 나중에 내가 치울 테니까." 이렇게 말하며, 어머니도 일어섰다. "이쪽으로 오세요, 클레이포드 박사님. 서재에서 저의 고민거리를 좀 들어주세요." 양친이 서재로 간 뒤에도 에이드리언은 문 앞에서 왠지 망설이고 있었다. 로잘리는 억지로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한 마음에도 없는 아첨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니 다시는 하지 마세요." "같은 편이 돼 줄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다짜고짜로 대들다가는 한평생 동지가 생기지 않을 거요." "그래도 끄떡없어요. 저는 외돌토리 생활에는 익숙하니까요." 갈색 눈이 갑자기 험하게 빛났다. "그럼 바라는 대로 정직하게 말해 드리지. 당신의 색채 감각은 빵점이야." 유유히 서재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에 대고, 로잘리는 마음속에 생각나는 모든 욕설을 퍼부으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요란하게 물을 튀기면서 설거지를 시작한 지 십 분쯤 지났을 무렵, 로잘리는 등뒤에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서재에 있어야 할 에이드리언 클레이포드가 묵묵히 접시를 닦고 있었다. "제발, 클레이포드 박사님…" "도와 줄까 하는 따위의 질문은 하지 않겠소. 그러니까 당신은 거절할 수도 없겠지." 두 사람은 잠시동안 말없이 부지런히 일만 했다. 그러다가 그가 불쑥 말했다. "어머님이 씻는다고 말씀하셨는데, 왜 당신이?" "그것은 어머니의 단순한 입버릇이랍니다. 실천한 예가 없는걸요." "실천할 기회를 당신이 빼앗아 버린 것은 아닐까?" "환상은 갖지 않기로 했어요. 제가 지금 설거지하지 않는다면 더러워진 식기는 내일 아침까지 그대로 있을 것이고, 제가 출근 전에 저녁식사를 준비해 두지 않으면 저녁식사 때 식탁 위에는 아무것도 오르지 못할 거예요." 상대는 물러나지 않았다. "당신한테 주방을 빼앗겨 버린 어머님이 도리어 쓸쓸하게 생각하고 계실지 모르지. 애초부터 당신이 너무나 잘 해내니까 양친도 어느 새 당신에게 맡겨 버리고 만 거겠지." 로잘리는 냉정하게 말했다.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저의 머리로는 알 수 없군요." "당신도 때로는 저녁을 밖에서 먹을 때가 있을 텐데?" "네, 그래요. 그런 날에도 사전에 준비를 해둔 요리가 타이머가 붙어 있는 오븐에 들어 있으므로, 양친은 그것을 끄집어 내어 드시기만 하면 돼요. 물론 뒤치닥거리는 제가 돌아와서 하지만… 도저히 믿어지지 않지요? 그러나 사실이에요. 머리가 둔한 제가 할 수 있는 효도는 기껏해야 집안 일을 하는 것 정도예요." "당신 역시 훌륭하게 학문을 닦고 있지 않소?" "그래봤자 사회학인걸요. 그러나 우리 집의 수치이므로 큰소리로 말씀하지 마세요. 이 집에서는 수학 이외의 학문은 학문으로 인정하지 않아요." 로잘리는 추궁하는 듯한 시선에 견딜 수 없어 얼굴을 숙였다. "저… 두 분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요?" "그 문제를 풀고 계실 거요. 내가 한마디 힌트를 드렸더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하시며… 아마 내가 자리를 비운 것도 모르고 계시겠지." "아마 그럴 거예요. 양친은 정말로 사이가 좋아요. 두 분을 보고 있으면 저 따위는 불필요한 존재라는 것이 절실히 느껴집니다." "무슨 쓸데없는 소리." "그러나 사실이 그런걸요. 저에 관한 일 따위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거든요." "유감스럽게도 내가 관심을 갖고 있소. 아무것에나 달라붙는 성가신 파리 같다고 생각하거든. 다소 귀찮기 때문에 언젠가는 파리채로 철썩 때려 잡으려고 생각하고 있지." 성을 내며 눈을 부라려 노려보려고 하던 로잘리는 도리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저 같은 여자에게 왜 그렇게 관심을 가지셨어요?" 명랑한 웃음을 띠고 있던 얼굴이 갑자기 냉정하게 변했다. "당신을 한 여성으로서 인식하고 있다는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소." 로잘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양친에게서 성인 취급을 받지 못하는 일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을 텐데, 왜 이렇게 마음이 상하는 것일까? "닦을 것 더 없소? 이젠 끝났어요?" "네, 대단히 고맙습니다." 개수대를 닦고 있는 로잘리를 보면서 에이드리언은 행주를 본래 장소에 걸고 팔짱을 끼고 문에 기대었다. "조금 전에 한 내 말에 약간 보충설명을 해야겠군. 나는 인간으로서의 당신에게 다소 관심이 있소. 젊은 나이에 당신만큼 비뚤어진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도 드물거든. 그러나 그런 당신 태도가 나에게는 가식적인 행위로 보이오. 스스로를 가엾다고 생각하거나 사물을 비뚤어진 면으로만 보는 자세는 빨리 고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소?" "저의 정신분석을 부탁한 적은 없어요." "내 충고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군. 그럼 한 가지 제안을 하지. 쓸데없는 일로 우울해지면 나를 꼼짝 못하게 만들어 시름을 풀도록 해봐요. 당신이 말한 대로 나는 남이므로 어떤 말을 해도 끄떡하지 않으니까." 서재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클레이포드 박사님, 어디 계시죠? 덕분에 겨우 풀렸어요!" "곧 갑니다! 덕분이라니 원 별말씀을. 별로 도와드린 것도 없는데…" 뒷말은 중얼거리듯 작은 소리로 말하면서 그는 주방에서 나갔다. 개수대를 다 닦은 로잘리는 이층으로 올라가서 강의할 교재 연구에 들어갔다. 두 시간쯤 지났을 무렵, 아래층의 전화벨이 울리고, 이어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계단 아래에서 들려왔다. "로잘리 니콜에게서 전화 왔다!" "곧 갈게요!" 계단을 달려내려오니까 조금 열린 문 안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남자 친구야. 얼마 전까지 로잘리가 근무하던 학교에서 고대 그리스 어와 라틴 어를 가르치는 모양인데, 나는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거든…" 로잘리는 보라는 듯이 서재의 문을 닫고 수화기를 들었다. "오래간만이야, 니콜. 응, 건강해요. 응, 그러나 보람이 있고 즐거워요." 어머니가 서새에서 나와서 주방으로 들어갔다. "물론 쓸쓸했어요. 싫어요! 없어요. 난 동시에 두 남자를 사귀지는 않아. 알고 있으면서, 괜히! 어머나! 내일 밤? 기뻐요. 새 직장에선 처음 이삼 일 동안 약간 우울했거든. 아니야. 응? 그래, 두세 번 키스해 주면 곧 나을 거야. 그럼 내일 밤에 만나요, 안녕." 전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어머니가 주방에서 나왔다. "이제 곧 커피 시간이 된 듯한데, 네가 별일 없다면…" "알았어요, 엄마. 곧 준비하겠어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잔을 네 개 쟁반에 얹어 로잘리가 서재로 들어가자, 아버지가 하던 이야기를 그치고 웃는 얼굴로 쳐다봤다. "저는 제 방에서 마시겠어요, 아빠." "아아, 그렇게 하렴. 우리는 평소처럼 네가 제일 싫어하는 수학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어. 그러니까 너는 여기 있어 봤자 따분하기만 하겠지." 그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에이드리언이 갑자기 얼굴을 들었다. 그의 호소하는 듯한 눈이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듯했으나, 로잘리는 끝끝내 알 수가 없었다. 2 오래간만에 만나는 남자 친구를 위해 로잘리는 노란색과 붉은색 그리고 보라색이 대담하게 섞인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남의 관심을 끌고 싶어한다고 말한 아버지의 말이 머릿속을 스쳤으나, 그녀는 단호히 그것을 잊어버리기로 했다. 현관의 초인종이 울리자 로잘리는 계단을 달려내려가 문을 활짝 열었다. "어서 와요, 달링…" "여어, 미스 팔람. 아니면 나도 '달링'이라고 불러야 할까?" 에이드리언 클레이포드가 짖궂은 미소를 띠며 거기 서 있었다. "실례했습니다. 착각했어요. 저… 아버지께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 그는 로잘리의 화려한 드레스를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고말고. 당신의 즐거운 일을 방해하러 온 것은 아니니까 안심해요." "어머, 무슨 뜻인가요?" 에이드리언은 놀리듯이 눈썹을 씰룩거리고는 지체하지 않고 서재로 향했다. 니콜은 잠시 뒤에 찾아왔다. 핸섬하고 키가 큰 청년은 집 안으로 안내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두 팔을 내밀어 부드럽게 키스했다. "이게 얼마 만이야. 적적했어, 달링." "나도. 정원으로 갈까요? 이야기할 것이 태산같이 쌓였어." 봄꽃의 달콤한 향기에 싸인 밤의 정원을 거닐면서 로잘리는 서재의 창 너머로 보고 있을 어느 사람에게 보란 듯이 니콜에게 꼭 달라붙었다. 그런데 언제나 말이 많은 남자 친구가 오늘따라 아무 말이 없음을 이윽고 알아차렸다. "나의 새 생활에 관해 알고 싶지 않아요?" 로잘리는 장난삼아 입을 삐죽거렸다. "미안, 잠깐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어." "고백해. 그 여자가 그렇게도 미인이에요? 그 여자를 생각했지?" 약간 여성적인 니콜의 얼굴이 한순간 굳어지더니 다음에는 쓴웃음으로 변했다. "당신에겐 가슴속까지 죄다 들여다보이고 만단 말이야. 그 여자는… 굉장한 미인이야." 그저 농담삼아 한 말이 적중하자, 이번에는 로잘리가 놀라고 말았다. "그래요? 그 사람이 누군데?" "당신 후임으로 이번 학기부터 우리 학교에…" "알았어 " 로잘리가 뿌리치려고 하는 손을 니콜은 허둥대며 다시 잡았다. "참아요, 참아. 그 여자는 이미 결혼한… 몸이라고 생각돼." "결혼반지나 다른 무엇을 보여 주던가요?" "아냐, 그러나…" "그렇다면 희망을 버리기는 빨라요." 로잘리는 상냥하게 말하고 나서 혼자 종종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니콜은 뒤쫓아가 매달리면서 보통때와는 달리 격렬하게 키스했다. "이상하게 지레짐작하여 의심하지 마. 그 여자는 검은 머리에다 균형이 잘 잡힌 굉장한 미인이지만, 그래도 그 여자는 당신이 아니잖아. 당신을 당신만이 내 것이야. 알고 있으면서." 니콜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새치름하게 울렸다. 갑자기 엄습해 오는 불안과 서재의 창 너머로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피하기 위해 로잘리는 니콜을 재촉하여 거실로 돌아와서 소파에 나란히 앉았으나, 그래도 마음의 응어리는 풀리지 않았다. "나 따위는 없어져도 당신은 그런대로 즐겁게 지내고 있었군요?" "아니라니깐! 이젠 허튼소리는 그만두고 정식으로 키스해 줘." 그의 차분하고 부드러운 키스에 로잘리의 기분은 겨우 풀렸다. '나를 정당하게 평가해 주는 사람이 적어도 한 사람은 있다'라고 로잘리는 내심 중얼거렸으나, 그녀 자신도 상대를 평가하며 사랑하고 있는지 어떤지, 그 점에 대해서는 전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로잘리의 기분이 풀어진 것을 직감한 니콜은 여느 때와 같이 기세좋게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동료에 관한 일, 학생에 관한 일, 그리고 사회의 동정에 대한 감상… 아무리 기다려도 이야기할 기회가 돌아오지 않자, 로잘리는 비로소 짜증이 났다. "로잘리, 괜찮겠니?" 문 앞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오세요, 아빠!" 아버지가 얼굴을 내밀었다. "커피 마실 준비를 해주지 않겠니? 엄마가 돌아올 시간도 다 됐으니…" 로잘리는 곧 일어서서 주방으로 들어갔다. 니콜은 뒤따라와서, 자기는 편안히 의자에 앉아 분주히 일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언제 끝날지도 모를 이야기를 계속 지껄이고 있었다. 로잘리는 서재에 있을 사나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잔이 한 개 많지 않아?" 니콜의 말에 로잘리는 퍼뜩 제정신이 들었다. "아버지 친구가 와 있어요, 물론 수학자고." "또야?" 니콜은 비명을 질렀으나, 로잘리는 어쩐지 오늘따라 그와 같이 웃을 기분이 나지 않았다. "어차피 호감이 안 가는 노인이겠지? 수학자 따위는 죄다 그렇지. 미안, 네 부모님만은 예외이지만." "그는 젊을 뿐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호감을 주는 사람이에요." 자기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로잘리가 놀랐을 때, 니콜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과연, 그런 일이었던가?" "무엇이 '그런 일'이에요?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나와는 정말 기분에 맞지 않아요. 얼굴만 맞대면 말다툼만 하는걸 뭐!" "이젠 됐어, 달링. 네가 지나치게 정색을 하고 화를 내면 나는 정말로 이상하게 생각할 거다." "자기에게 꺼림칙한 일이 있다고 해서 나까지 그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말아 주시지." 로잘리는 커피 세트를 거실의 테이블에 난폭하게 내려놓고, 그대로 서재로 가서 노크도 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거실에서 커피를 드셔야죠!" 가시 돋친 목소리에 놀라서 얼굴을 든 남자들의 면전에서 로잘리는 거칠게 문을 닫고 주방으로 돌아왔다. 니콜은 거실로 도망친 듯 이미 주방에는 없었다. 커피에 곁들일 쿠키와 비스킷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에 기분이 어느 정도 진정됐다. 로잘리가 거실에서 니콜 옆에 앉아 커피 포트의 커피를 잔에 따르고 있을 때, 아버지가 에이드리언과 함께 거실에 나타났다. 니콜을 소개받은 에이드리언은 핸섬한 청년을 무례하게 바라본 뒤에, 힐문하는 듯한 시선으로 로잘리를 보았다. 로잘리는 노여움으로 뺨을 붉히면서 얼굴을 돌렸다. 어색한 분위기를 구제라도 하듯이 어머니의 쾌활한 구두 소리가 집 안에 울려 퍼졌다. "다녀왔어요. 어머나! 잘 오셨습니다, 여러분." 어머니가 명랑하게 손을 흔들면서 이층으로 사라지고 나자, 아버지가 허둥지둥 일어섰다. "엄마의 커피를 타 주겠니. 로잘리? 들고 올라가겠어." 니콜 앞에서 피할 만한 구실을 발견하고 한숨 돌리는 모양이었다. 로잘리는 몰래 쓴웃음을 지었다. "제발 천천히 놀다 가게, 에이드리언. 나는 아내와 급한 이야기가 있어서 이만 실례하겠네." 아버지가 나가자, 그때까지 잠잠히 있던 니콜이 갑자기 로잘리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말했다. "유해무익한 자연과학에 속하는 학문은 즐겁습니까, 클레이포드 박사님?" 로잘리는 놀라서 니콜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다음 순간 버럭 화를 낼 것임에 틀림없는 또 다른 한 남자에게 몹시 겁에 질린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그는 뜻밖에도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마치 사태를 즐기고 있는 것처럼 천천히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당신의 그런 발언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아요. 전공은 라틴 어라고 했던가? 일반적으로 과거를 고집하는 전통신봉주의자들은 항상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우리 자연과학자를 눈의 가시처럼 생각하고 있으니까 말이오." 기습공격을 가볍게 받아넘겨 버리는 것에 충격을 받은 니콜은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고 두 번째의 펀치를 날려 보냈다. "과학자들이 사용법과 제어하는 방법도 모르면서 차례차례로 위험한 발명을 하는 것은 실로 문제거든요." "흔히 듣는 소리지요." 그는 성적이 나쁜 학생을 상대하는 말투였다. "그러나 당신이 말한 '위험한 발명'을 실제로 사용하고 싶어하는 것은 과학자 자신이 아니라 정치가나 군부가 아닐까요? 물론 군부의 권력 밑에서 연구에 몰두하는 과학자도 있으나, 그들의 태반은 파괴적인 것보다 오히려 생산적인 과제를 연구하고 있는 실정이오. 극히 일부 패거리의 행위를 들어 과학자 전체를 지탄할 수는 없을 것이며, 무엇을 연구 대상으로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학문의 자유는 어디까지나 보장되어야 해요." "그 점이 위험해요. 과학자에게는 책임감이라는 것이 완전히 결여돼 있으니까요." "그래서는 이야기가 겉돌지. 과학자는 과학적 진리의 탐구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여기에서 과학적 진리란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그만두기로 합시다. 우리는 서로의 의사 소통에 필요한 공통 언어를 갖고 있지 않는 것 같으니까 말이오." 로잘리가 분연히 말참견을 했다. "결국 우리와 같은 팔푼이들은 당신들의 말 따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석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생각해요." 니콜이 기세좋게 말했다. "로잘리, 알겠지? 과학자란 인간적인 교양이나 감수성 따위는 전혀 없는 사람들이야." "그것은 그야말로 인간적인 문제지, 직업이나 전문 분야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닌 거요." "과학자는 자기들은 위대한 인간이며 세계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믿고 있지요?" "공상과학 소설을 지나치게 읽었구먼." 그는 유쾌한 듯이 웃었다. 니콜은 노여움으로 안면근육을 씰룩거리며 눈앞의 남자에게 보란 듯이 로잘리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우리 문화인은 훌륭한 옛 전통을 파괴하는 당신들의 수중에서 그것을 반드시 지켜낼 겁니다!" "결국 인류의 진보를 저지하겠다는 게로군. 맘대로들 해봐요. 그러나 당신들의 무기는 말뿐이잖소? 그러나 우리는 행동으로 나타내지요. 그래서 인류는 착실히 진보해 나가는 겁니다." 그가 채 말도 끝내기 전에 니콜은 일어서 버렸다. 형세가 불리함을 알고 물러날 작정이었던 모양이나, 에이드리언은 다시 다그쳤다. "나에게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하겠어요. 일정한 과학적 지식 없이는 미래나 문화를 논할 자격이 없다고. 자연과학은 현재와 미래를 영역으로 삼는 학문이지만, 라틴 어나 고대 그리이스 어 따위는 아무리 생각해도 과거의 학문이거든." 니콜은 무뚝뚝하게 작별인사를 중얼거리며, 로잘리를 억지로 끌고 거실 밖으로 나갔다. "나는 돌아가겠어, 로잘리." "아직 이른 시간인데?" "다른 사람이 있어서는 이야기도 할 수 없잖아. 자, 그럼, 기분이 내키면 또 전화할게." 로잘리의 뺨에 겉치레 인사로 키스를 한 다음 니콜은 잰걸음으로 떠나 버렸다. 니콜의 말투에 발끈해진 로잘리는 전송도 하지 않고 거실로 돌아와서 남아 있는 남자의 눈앞에서 묵묵히 커피 잔을 치우기 시작했다. "당신 친구를 쫓아낸 꼴이 되어서 유감스럽군." "어머, 일부러 한 짓이에요?" "설마. 걸어온 논전에 응했을 뿐이오." 확실히 그대로였다. "그건 그렇다치고, 당신은 완전히 그 친구의 편을 들더군. 그렇지만 마음속으로는 내 주장에 찬성했던 게 아니오?" 로잘리는 입술을 깨물며 그릇을 마구 다루어 테이블 위에 있는 것을 죄다 쟁반에 담아 주방으로 갔다. 문을 닫으려고 하다가 그녀는 상대가 뻔뻔스럽게도 곧 뒤를 따라온 것을 알았다. "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 바로 적중한 것 같군." "좋을 대로 해석하세요." 그녀는 힘껏 수도꼭지를 틀며 주위에 아랑곳없다는 듯 물을 튀기면서 그릇을 씻었다. 에이드리언이 수건걸이의 행주에 손을 대는 것을 곁눈으로 보고 그녀는 그 행주를 왁살스럽게 낚아챘다. "아니, 내가 닦지." 뜻하지 않은 부드러운 목소리에 로잘리는 기가 꺾이어 얌전히 행주를 돌려 주고 씻을 것이 있는 데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까 한 토론은 재미가 있었소. 요즘 그 정도로 시대착오를 범하는 젊은이는 골동품이야. 수박 겉핥기 식의 지식을 그대로 외어 가지고는 자연과학이나 과학자들에 대해 구제불능의 편견을 갖고 있으니 말이오." 로잘리는 홱 돌아보았다. "당신이야말로 자연과학자 이외의 인간에게 편견을 갖고 계시지 않아요? 제가 담당하고 있는 강의의 주된 테마는 그런 독선적인 예비 과학자들에게 다소나마 인간다운 교양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과학자는 본래부터 교양이 없다고 말하고 싶소? 친구의 이야기를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과 똑같군 그래. 그러나 그건 그렇다치고 당신과 나 어느 쪽이 옳은가는 멀지 않아 자연히 알 게 될 거요." 그는 행주를 치우고 로잘리의 뾰로통한 얼굴을 보며 싱긋 웃었다. "당신 남자 친구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시시한 트집을 잡아 과학자를 괴롭히는 일만을 사는 보람으로 느끼는 것 같아. 그들이 기세를 올리면 올릴수록 우리는 자신의 존재 의미를 더욱 재인식할 따름이오." "그들이라고 말씀하신 가운데에는 당연히 저도 포함되겠지요? 제가 시시한 트집을 잡아 당신을 괴롭히고 있다고 생각하고 계시죠?" "듣고 보니, 과연 그렇군." "클레이포드 박사님, 그렇게 뽐내고 싶다면 제발 다른 장소에 가서 하세요. 여기는 저의 주방입니다. 나가 주세요!" 주먹을 꽉 쥐고 말하던 로잘리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러내려 당황했다. 상대방의 얼굴에서 험한 기색이 갑자기 사라졌다. "미안해요. 당신의 고집스러움은 실은 외면뿐인 것 같군. 그것을 깊이 명심해 두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데." 그는 문을 열고 돌아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잘 자요, 로잘리." 로잘리의 강의는 1학년 학생 전원의 필수과목으로 돼 있었다. 다행히 어느 학급에서나 학생들의 학습 의욕은 왕성해서 그녀에게 커다란 보람을 느끼게 해주었으나, 그런 반면에 의론이 비등한 나머지 준비한 강의 스케줄이 전혀 쓸모없게 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약간 속상한 로잘리는 어느 날 일반교양학과의 주임에게 상의하러 갔다. 젊은 여성과 이야기하고 있던 웰리스 메이슨 주임은 로잘리를 보자 일어섰다. "메리온, 이쪽은 이번 학기부터 우리 학과의 강사가 되신 미스 팔람― 이수학과 팔람 박사의 따님으로, 이름은 로잘리…였지요? 미스 팔람, 이 사람은 비서인 메리온 허링이오." 소개를 끝낸 웰리스 메이슨은 비서를 물러가게 하고, 로잘리에게 의자를 권했다. 어딘지 모르게 호색가 같은 시선을 느끼면서, 그녀는 의자에 앉아 자기의 고민거리를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자 주임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학생들이 그렇게 활발하다는 것은 당신 수업이 성공하고 있다는 무엇보다도 훌륭한 증거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도 좋을까요?" "당신은 아직 여기 실정을 잘 모르겠지만, 이곳 학생들을 보면 공부는 열심히 해도 표현 능력에서는 초등학교 학생 정도밖에 안 되는 학생들이 놀랄 정도로 많아요. 우리가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자기 표현의 기회를 준다는 것은 동시에 사회에 공헌하는 일도 돼요. 젊은이의 비행이나 범죄의 대부분은 올바른 자기 표현 방법을 모르는 안타까움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오." 약간 자신이 생긴 로잘리는 감사하다는 미소를 지었다. 그에 대한 답으로 조금 지나칠 정도의 미소를 지어 보이는 주임을 무시해 버리고, 그녀는 다시 질문했다. "예를 들면 '인간관계에 대하여'라는 제목을 토론 대상으로 했을 때, 저는 책상이나 의자를 교실 귀퉁이에 치우게 해놓고 학생들과 마룻바닥에 빙 둘러앉아서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보다 솔직하게 되리라고 여겨져서… 그러나 이런 수업 방법은 허가되어 있지 않겠죠?" "그것 참 기발한 착상인데, 나는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해. 앞으로 시시한 전례에 얽매이지 말고 의욕적으로 해주시오. 곤란할 때에는 언제라도 내가 도와 줄 테니까." 그는 손목시계를 보면서 일어섰다. "조금은 도움이 되었소?" "네,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런데 때마침 커피 타임이 됐는데, 괜찮다면 함께 마시는 게 어떨까?" 로잘리는 장깐 망설였으나, 비서인 메리온과 함께 셋이서 식당으로 가는 것을 알고 안심하고 권유에 응했다. 교직원 식당의 4인용 테이블에 세 사람이 앉자, 웰리스 메이슨은 로잘리가 전에 근무하던 학교에 관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댔다. "양가의 자제들을 모아 놓은 명문교입니다만, 마치 전세기의 유물 같아요. 고대 그리스 어를 가르치는 학급까지 있답니다. 더욱이 그것을 선택하고자 하는 부모가 있다니까요!" "그런 것은 현대 사회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이 당신 견해요?" "적어도 현실 문제의 해결에는 쓸모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로잘리는 자기가 어느 새 그 남자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문득 이상한 예감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아니나다를까 바로 앞 테이블에 앉은 그 남자가 돌아보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에이드리언 클레이포드는 분명히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얼른 고개를 숙인 로잘리는 마주앉아 있는 두 사람이 다른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세차게 뛰는 가슴의 고동을 진정시키려고 혼자서 안간힘을 썼다. 그날 밤 이래 애써 이 남자를 피해 온 이유를 그녀는 비로소 깨달았다. 옆에 있기만 해도 언제나 이런 식으로 가슴이 답답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런 반면, 만나지 않으면 뭔지 모를 고독감에 사로잡혀 괴로와하기도 했다. 불안하게 설레는 가슴을 진정하기 위해 로잘리는 자기가 먼저 웰리스 메이슨에게 이야기를 걸었다. 그러자 상대방은 그것을 자기에게 관심이 있어서 그러는 줄로 알았는지 이상하게도 허물없는 투로 말했다. "밤에는 바쁜가, 로잘리?" 후회하는 기색을 감추고 그녀는 단호히 대답했다. "예, 남자 친구와 데이트하지 않는 밤은 집에서 강의할 교제 연구에 바쁘기 때문에요." 분명한 거절이 상대의 기선을 제압한 것 같았으나, 그의 시선은 그 정도로는 단념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 에이드리언이 또 돌아보았다. 무슨 말인가를 전하고 싶어하는 그 얼굴을 로잘리는 당당하게 노려보았다. 며칠이 지난 뒤, 로잘리는 메리온과 이야기하는 중에 아주 기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메리온도 자연 속을 산책하는 것이 취미이며, 그녀 역시 유스호스텔의 회원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매일 함께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일과처럼 됐다. 그런 두 사람의 자리에 웰리스 메이슨이 끼는 일이 간혹 있기도 했다. 로잘리는 그가 접근할 틈을 전혀 주지 않았으나, 그것이 오히려 그의 욕구를 자극하고 있는 것 같은 낌새가 엿보였다. 어느 날의 커피 타임에 교직원 식당에서 홀로 사색에 잠겨 있던 로잘리는 누군가가 갑자기 부르는 바람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머… 안녕하세요, 클레이포드 박사님." "아냐, 에이드리언이야. 그렇게 불러봐요." "에이드리언." 그는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좋아요. 기억력이 좋은 생도로군. 그 정도면 수학에도 장래성이 있을 것 같아. 멀지 않아 수학도 가르쳐 드리지." 로잘리는 이상하게 마음이 설레여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시간 낭비예요. 저는 수학에는 완전 제로예요." "마치 부추김을 당하는 것같이 들리는걸." "아니예요. 요즘은 제 전공만으로도 쉴새없이 바쁘니까요. 그러나 저의 가능성에 대해 과대평가해 주신 점에 대해서는 심심한 감사를 드리겠어요." 에이드리언은 커피에 설탕을 넣어 꽤 정성들여 저으며 말했다. "아버님께 들었는데, 당신 방 텔레비전이 고장이 났다고?" "네, 수리점에 전화해서 고쳐 달라고 부탁하려 했는데 그만 차일피일 늦어지고 말았어요." "내가 한번 고장 상태를 조사해 볼까?" "당신이 텔레비전에 대한 지식이 있으세요?" "텔레비전이나 오디오 따위 기계 만지는 일이 나의 취미거든. 지금도 우리 집에서 스테레오를 만들고 있는 중이오." "손수요? 어머, 멋져요! 믿어지지 않아요." "그렇게 놀라니, 내가 도리어 놀라겠는걸." "하지만 스테레오를 손수 만드는 사람이 있다니,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거든요. 더군다나 당신과 같은…" 로잘리는 깜짝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당신과 같은 속세를 떠난 돌대가리 수학자가, 라고 말하고 싶은 게지? 당신 편견은 조금도 고쳐지지 않은 것 같군. 그건 그렇고, 텔레비전 건은 어쩔 셈이오?" "그럼, 부탁합니다… 에이드리언. 정말 말씀대로 부탁해도 괜찮겠어요?" "언제나 당신 집에서 환대해 주는 것에 비한다면 약소하지요." 그 말을 듣자 로잘리는 왠지 가벼운 실망을 맛보았다. "그럼 언제 착수할까? 오늘 밤은 또 그 남자 친구와 데이트?" "아니예요. 그럴 예정은 없어요." "그 사람, 이름이 니콜이던가?" 로잘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이드리언은 갈색 눈에 익살맞은 웃음을 띠고 말했다. "모처럼 당신과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된 마당에 '요 수다스런 개구장이'하는 따위의 험담은 하지 않겠소." 분위기를 유쾌하게 하려고 말한 것 같았으나, 로잘리는 도리어 뾰로통해져서 일어섰다. 그는 재빨리 손을 뻗어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여기서 싸운 채 헤어지면 당신 텔레비전은 어떻게 되지요? 요즘 수리점에 부탁하면 엄청난 수리비를 물게 될 텐데." "알았어요." 로잘리는 잡힌 손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살며시 빼면서 말했다. "오늘 밤에 괜찮겠소?" "네." 그에게 잡혔던 손에는 아직 그의 감촉이 남아 있었다. "부모님의 승낙을 받지 않아도 괜찮을까?" "당신이라면 언제라도 대환영일 거예요. 당신이 오시지 않는 밤은 두 분이 다 재미가 없는 듯해요." "양친이 그렇게 여기시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솔직히 말해서 왜 그렇게 나를 마음에 들어하시는지 나는 잘 모르겠소." "사내아이를 갖겠다는 꿈이 깨져 버렸으니까 당신을 아들처럼 생각하고 계시는 것이겠죠." "두 분 다 서른네 살이나 되는 아들을 가질 정도의 연세는 아닐 텐데. 만약 그렇다고 친다면 우리 둘은 오빠와 누이동생이 돼야겠군. 그렇게 된다면 당신 기분은 어떻겠소?" "당신이 제 오빠라구요? 생각할 필요조차 없어요." "허, 그런가?" 찬찬히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로잘리는 마음이 불안해졌다. "저는 다음 시간에 강의가 있기 때문에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그 전에 시간 약속을 해두지." "괜찮으시다면 방과 후 곧. 아버지는 오늘 집에 늦게 돌아오신다고 했어요." "알았소. 그럼 5시에 마중하러 가겠소." 에이드리언은 약속한 대로 5시 정각에 직원실에 나타나 로잘리를 자기 차에 태우고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일에는 이미 익숙해졌지요?" "네, 그래도 요즘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에는 때때로 놀라지 않을 수 없어요." "그다지 나이도 많이 먹지 않은 주제에! 당신은 몇 살이오?" "스물넷. 그렇게 젊은 편도 아니죠?" "벌써, 초로의 부류에 들다니!" 운전석에 앉은 남자는 웃으면서 로잘리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고 손을 살그머니 감추며 중얼거렸다. "저는 메리온 허링하고 친한 사이가 됐어요." "메이슨의 비서 말이오? 그녀는 좋은 여자야. 일도 잘하고. 당신 아버님 비서보다도 훨씬 유능하지. 다만 젠 같은 미인에게 일하는 솜씨가 좋지 않다고 잔소리를 할 사람은 없겠지만." 그는 시큰둥한 로잘리를 곁눈으로 쳐다보고는 빙긋이 웃었다. "메리온과 저는 야산을 산책하는 것이 취미예요. 5월 말의 학기 중간 휴가 때는 둘이서 요크셔 근처로 도보여행을 할 작정이에요." "당신이 도보여행을? 메리온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지만 당신같이 호강스럽게 자란 아가씨가 배낭을 메고 걸어가다니 전혀 믿어지지 않는데." "기대에 어긋나서 대단히 미안합니다. 이래뵈도 저는요 이때까지 도보여행한 거리를 합치면 몇백 킬로나 걸어온 베테랑이라구요." "유스호스텔에서 숙박하는 거요?" "물론이죠. 그런데 당신은 휴가를 어떻게 보낼 예정인가요?" "휴가 중에는 대개 어머니 곁에서 보내지." 마침 차가 집에 도착했으므로 이야기는 그것으로 중단되었다. 이층 계단을 중간쯤 올라갔을 때, 로잘리는 오늘 아침 방을 정돈할 틈도 없이 출근한 일이 문득 생각나는 것이었다. "어질러져 있습니다만, 놀라지 마세요." "당신 방 말이오? 종잇조각 하나라도 떨어져 있는 걸 꼭 보고 싶군." 로잘리는 웃으면서 방문을 열었다. 온 마루에 책과 파일이 내팽개쳐져 있고, 침대 위에는 리포트 용지가 어질러져 있으며, 팔걸이의자는 드레스와 스커트로 반쯤 묻혀 있었다. 방으로 들어오려던 에이드리언 클레이포드는 힘없이 이마에 손을 대고 비틀거리는 시늉을 했다. "내 방에 와서 여성의 본능이 이러니저러니 말한 사람이 어디의 누구였더라?" 로잘리는 목을 움츠리고 웃었다. "그래서 놀라지 마시라고 말씀드렸지 않아요. 그런데, 보면 볼수록 확실히 엉망진창이군요. 남이 어질러 놓은 것에는 신경이 쓰이면서도 자기가 한 일에는 조금도 걱정이 안 되는 것이 인지상정인가 봐요." "옹색한 변명이군." 그러면서 로잘리를 노려보고는 웃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 집에 돌아온 것 같아서 마음이 가라앉아요. 앉아도 괜찮겠지?" 로잘리는 서둘러 옷가지를 침대로 옮기고 팔걸이의자를 비웠다. "홍차나 뭐 다른 것을 드시겠어요?" "고맙소." "그럼 아래층에 가서 준비해 오겠어요." "형편없는 구식이군." 그는 이미 손을 뻗어 텔레비전의 스위치를 넣고 있었다. "이전에 거실에서 쓰던 낡은 거예요." 로잘리가 홍차와 비스킷을 쟁반에 담아서 방으로 돌아와 보니, 벼락치기 전기 기사가 된 그는 텔레비전의 뒤쪽 뚜껑을 떼어내고 일에 몰두한 나머지 홍차를 권했는데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그런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몹시 믿음직스럽게 느껴져 넋을 잃고 바라보던 로잘리가 갑자기 홍차 잔을 들어올렸다. "홍차가 다 식어 버리겠어요." 에이드리언은 그때서야 비로소 일어서서 무릎에 묻은 먼지를 떨고 더러워진 손가락 끝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소탈한 사나이다운 태도를 바라보는 로잘리의 가슴속에 무엇이라고 형용할 수 없는 기묘한 감정이 들끓었다. "어디가 고장났는지 알아내셨어요?" "아니, 배선도가 없으니 조사할 수가 있어야지." 그는 비스킷을 집으면서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머릿속에는 텔레비전의 배선도로 가득차 있는 것 같았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서 배선도와 다른 도구들도 가지고 와야 되겠소. 오늘은 아버님과 참고서 일을 하는 날이니까 이 일은 그 일이 끝난 뒤에 계속해야 되겠는데, 그래도 상관없겠지요?" "네, 저는 언제나 늦게까지 안 자고 있으니까 관계없어요." 홍차를 다 마시자 에이드리언은 돌아갔다. 저녁식사가 끝난 뒤 로잘리가 주방에서 그 뒤치닥거리를 하고 있을 때, 현관의 초인종이 울리고 에이드리언이 어머니의 환영을 받고 들어오면서 말하는 목소리가 집 안을 가득 채웠다. 로잘리의 심장은 이상야릇한 빠르기로 뛰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샐리. 프랭클린은 벌써 돌아오셨습니까?" 로잘리는 기묘한 질투에 사로잡혀, '이 집에서는 아무나 퍼스트네임으로 서로 부르는 모양이군' 하고 중얼거렸으나, 다음 순간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로잘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직 주방에 있습니까?" 어머니의 웃음소리가 났다. "그래요, 딸만 일을 시키는 지독한 어머니죠?" "멀지 않아 따님에게 자동식 접시 닦는 기계를 선사하겠습니다― 저의 사랑을 담뿍 담아서!" 두 사람은 웃으면서 아버지가 있는 서재로 들어갔다. 로잘리는 방으로 올라가서 내일 있을 강의에 대비하여 꼼꼼하게 노트 작성을 하기 시작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 무렵, 몹시 기다리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괜찮아요?" "어서 오세요, 에이드리언." 그는 손에 공구 상자를 들고 있었다. "어머나, 진짜 전기 기사님 같군요!" 빙긋이 웃으며 에이드리언은 곧 일을 시작했고, 로잘리도 자기 일로 돌아갔다. 조금 지나자 타는 냄새가 방에 가득찼다. 에이드리언이 납땜 인두를 사용하는 중이었다. "고장난 곳이 고쳐지겠어요?" "접촉이 불량한 곳은 방금 고쳤으나, 완전히 바꿔야 할 부품이 한두 개 있어야 되겠소. 이 근처에 있는 가게에서는 팔지 않을 테니, 내일쯤 주문해 두지요." 그는 텔레비전의 뒤쪽 뚜껑을 끼우고, 공구 상자를 치웠다. "여러 가지로 미안해요. 어머나, 커피 타임이네. 잠깐 실례하겠어요." "이따금은 어머님께 도와 달라고 하는 것이 어때요, 당신은 지금 한창 일하는 도중이잖소?" "어머니가 해주는 것을 기다렸다가는 커피는 영원히 얻어마시지 못해요. 그래서… 커피는 서재에서 드시겠어요, 그렇잖으면 저와 여기서 드시겠어요?" "여기서 마시겠소." 여느 때와는 달리 신나게 커피를 끓이고 있는 로잘리에게 니콜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네, 건강해요, 달링. 어머, 내일은 안 되겠다구? 왜? 어머나, 그 여자가? 아냐, 나는 괜찮아. 다녀와요. 그럼 토요일에 만나요." 아무렇지 않다고는 대답했으나, 로잘리는 그다지 유쾌하지는 못했다. 니콜은 그 미인에게 초대를 받았다고 한다. 단순한 호기심이라고 그는 말했으나… 로잘리는 쟁반에 커피 잔을 두 개만 담아서 양친이 있는 서재로 들어갔다. "에이드리언은 제 방에서 마시겠대요." 양친이 놀라는 것을 모른 체하면서 그녀는 주방으로 돌아와 남은 잔을 쟁반에 담아 계단을 올라갔다. 에이드리언은 책상 위에 있는 강의 노트를 열심히 읽고 있었다. "갑자기 힘이 빠진 것 같군. 아까 온 전화는 니콜한테서 걸려온 거지요?" "그래요." "싸움이라도 했소?"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맞았소, 그럼 화제를 바꾸지. 당신 노트를 허가도 없이 읽어보았는데, 일반 교양이라는 이름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이렇게 광범위한 내용을 단 한 사람이 담당하고 있는 줄은 생각지도 못했거든. 당신은 정말 자신을 갖고 가르치고 있겠지요? 예를 들면…" 그는 노트를 슬슬 넘겼다. "이봐, 이것이야― <이성 친구와의 교제에서 유의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진실한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과 성적 충동의 상위점에 대해 논하라> 나도 흥미가 있소. 바른 답을 가르쳐 주시오, 미스 팔람." 로잘리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왜 그런 데만 골라서 읽으셨어요? 그밖의 테마도 많이 씌어져 있었을 텐데. 노동조합의 역할이라든지, 정부의 기능이라든지…" "안 돼요, 안 돼. 당신은 내 질문에 아직 대답을 안했소. 그런 식으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당신은 특수한 사람인걸요. 당신은 당신 어머님 이외의 여성은 안 받아들이는 주의잖아요? 그런 사람에게 남녀간의 사랑을 설명하는 것은 당신이 저에게 <과학적 진리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것과 같아요. 당신의 이론에 의하면, 의사소통에 필요한 공통 언어가 없는 상대에게는 어떤 말을 해도 소용없는 게 아녜요?" "훌륭해! 질문의 화살을 피하는 데에는 정부의 답변과 맞먹을 정도군. 그러나 학생들 앞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이상 당신도 사랑에 대해서는 죄다 알고 있어야 하잖소?" 로잘리는 힘없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는 득의양양한 얼굴로 웃으며 천천히 커피 잔을 들어 다 마신 뒤에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되는 학생들을 상대로 당신이 인생의 기미(機微)에 관한 문제에 대해 강의를 하다니, 약간 기묘한 느낌이 드는군. 요컨대 인생이나 인간관계에서 정말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학생이 당신 수업을 받으므로써 그 괴로움을 해결할 수가 있을까?" "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해결책을 찾는 실마리는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기에 저는 노력하고 있어요."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에이드리언은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로잘리는 화제를 바꾸었다. "박사 학위를 획득할 때까지 무척 열심히 공부하셨겠죠?" "몇 년 동안은 그럭저럭 한눈도 팔지 않고 오로지 학문이란 외길 생활로 보낸 것만은 사실이오." "그래서 애인을 만들 틈도 없었다는 말이군요?" "여가가 있고 없고는 관계가 없소. 전에도 말했듯이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게 내 신념이기 때문이오." 짧은 침묵이 흐른 뒤 로잘리는 갑자기 생각이 난 듯 말했다. "제 어머니도 박사 학위를 획득하려고 공부를 했어요. 그러나 저를 낳기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해 버리고… 그 일에 관해서는 지금도 저를 용서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해요."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의도는 없었다. 그러나 갑자기 그가 호통을 치는 바람에 로잘리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신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훌쩍거리고 싶다면 나는 돌아갈 거요!" 그러나 에이드리언은 일어서는 대신 천천히 자세를 고쳐 앉더니 긴 다리를 포갰다. "나는 남과― 하물며 여자를 상대로 하여 신상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은 없으나, 때로는 예외라는 것이 있어도 좋겠지." 그는 천천히 지껄이기 시작했다. "우리 아버지는 농부였소. 농장주는 아냐. 가난한 소작농이었지. 내가 두 살 때 아버지는 가난 때문에 과로로 쓰러져 한번도 일어나지 못한 채 일 년 후에 돌아가셨소. 그후 어머니는 여자의 손으로 나를 키워서 대학까지 보내 주셨어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칠 만큼 빈곤과 고생의 연속이었으나, 어머니는 한번도 불평하는 말을 하지 않으셨지. 우리 모자의 경우에 비교하면, 당신 같은 사람이 무슨 불평이 있다는 거요? 부모자식간의 친밀한 사랑 때문이오? 그런 것은 자기가 가정을 가지면 얼마든지 체험할 수 있을 거요." "당신은… 당신 어머님은 아주 훌륭한 분이시군요. 당신은 행복한 분이에요, 에이드리언." 그는 답답하다는 듯이 일어섰다. "당신은 지금 중요한 것을 조금도 모르고 있어. 어버이의 사랑에 굶주리고 있다는 따위의 쓸데없는 망상에 사로잡혀 진실에 눈을 뜨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야." 화가 난 듯이 문에 다가간 에이드리언은 갑자기 돌아서더니 로잘리에게로 걸어와서 가만히 두 손을 꼭 잡았다. "여하튼 당신이 어머니가 되면 최대한의 애정을 자식들에게 쏟을 것이 틀림없어. 나는 그것을 확실히 알 수 있어요… 자, 그럼 잘 자요, 로잘리." 갑자기 쏟아지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로잘리는 얼굴을 돌렸다. 에이드리언은 잡았던 손을 풀고 조용히 방을 나갔다. 3 "야아, 로잘리… 들어가도 괜찮아?" 토요일 저녁에 니콜은 현관에서 어색하게 말했다. "당연하잖아, 어서 들어와요." 로잘리는 그를 거실로 안내하여 여느 때처럼 소파에 앉도록 권한 뒤, 자기는 거기에 앉지 않고 안락의자에 옆으로 돌아앉았다. "요전번 전화 때문에 화가 난 거야? 사과할게. 그런 덫에 걸리다니, 나도 후회하고 있어." "어머, 무슨 일인데?" "그 여자가 나를 부모님께 소개하겠다고 하잖아. 태연하게 따라갔더니, 그 여자의… 약혼자도 거기 와 있지 않겠어?" 로잘리는 눈물이 날 정도로 깔깔대며 웃었다. "그 여자의 기분, 나도 알 것 같아요. 훼방꾼을 퇴치하는 데는 그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거든. 당신이 그 여자를 어지간히 귀찮게 했던 모양이군요?" "그런 건 아냐. 단지 약간 흥미를 가졌을 뿐이야. 그 여자는 왜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았을까?" "당신은 솔직하게 말했어요, 나와의 관계를?" 뽀얀 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로잘리, 소원이야. 이리 와." 그가 시키는 대로 로잘리가 곁으로 다가가자, 니콜은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남에게 알릴 만한 사이도 아니잖아? 물론 내 마음은 결정돼 있어. 당신만 좋다면 내일이라도 결혼하고 싶을 정도야." 니콜은 로잘리를 끌어안고 입맞추었으나, 그녀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아차리고 안타까운 듯이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까짓 일을 가지고 아직도 화가 안 풀린 거야? 어지간하면 용서해 줘도 괜찮을 텐데, 안 그래?" 로잘리는 자기자신도 놀랄 만큼 객관적인 눈으로 니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잘생기긴 했지만 여성적이고 의지가 약해 보이는 얼굴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러니 에이드리언과 논쟁 상대가 될 까닭이 없었지. "용서하고 안하고가 문제가 아니예요, 니콜. 당신이 말한 대로 우리는 특별한 관계도 아니며, 앞으로도 이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난 생각해요." 니골은 분명히 마음을 놓은 모양이었다. "그렇군. 당분간은 이 상태대로 있기로 하지. 그러면 오늘 밤은 어떻게 하지? 식사와 댄스?" "그래요, 여느 때처럼." 두 사람은 자그만한 호텔에서 식사를 하고 춤을 추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데이트였으나, 데이트가 끝나고 집까지 바래다 준 니콜의 차가 떠나자, 로잘리는 왠지 한시름 놓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웰리스 메이슨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로잘리에게 데이트를 신청하곤 했다. 그를 별로 나쁘게 생각하진 않았는데도 로잘리는 왠지 허락하고 싶지 않아, 언제나 실례가 안 될 정도로 단호하게 거절하곤 했다. 단지 점심때는 메리온도 같이 있었으므로 웰리스와 셋이서 교직원 식당으로 가는 것이 어느 사이에 일과처럼 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메리온이 말했다. "내일부터 나는 집에서 점심을 먹고 오기로 했어요." 집에서 개를 기르기로 했는데, 양친은 모두 일터로 나가기 때문에 가족 중에서 직장이 집과 가장 가까이 있는 그녀가 개를 돌보기로 했다는 것이다. 로잘리는 이것으로 점심식사를 함께 하는 그룹이 해산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웰리스는 이튿날부터 혼자서 로잘리를 데리러 왔다. 단둘이서 복도를 걸어가거나 식사를 하게 되자, 로잘리는 어쩐지 주위로부터 끊임없이 주목을 받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테이블에 앉아 점심을 끝냈을 때 웰리스가 로잘리에게 담배를 권했다. "저는 아직 담배를 피워 본 적이 없습니다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로잘리는 내민 담배를 한 개비 집어들어 웰리스에게 불을 붙이게 했다. "담배 피우는 솜씨가 제법 세련되었구먼. 처음이라니, 거짓말하면 못 써요!" 두 사람이 깔깔대는 웃음소리에 다시 온 식당의 시선이 집중됐다. 로잘리는 갑자기 반발심이 일어나 여느 때와는 달리 웰리스에게 상냥하게 미소지었다. 그러나 그는 기분이 썩 좋은 듯이 상반신을 앞으로 내밀면서 테이블에 얹힌 로잘리의 손에 자기 손을 포개며 말했다. "오늘 밤은 괜찮겠지?" 쌀쌀하게 거절하려던 로잘리는 문득 주저했다. 한두번쯤 저녁식사에 응한다고 해서 그렇게 나쁠 것은 없지 않겠는가. 니콜도 이전처럼 그렇게 번번이 전화를 걸어오지도 않고, 정작 만나자는 권유를 받고 싶은 상대는 '여자는 절대로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고 잘라 말하고 있으니. "네, 기꺼이." 로살리는 대답했다. 약간 후회하는 마음으로 웰리스와 식당의 출입문을 나서던 로잘리는 에이드리언의 시선과 마주쳤다. 얼굴 전체에 불쾌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로잘리는 웰리스와 일부러 친밀하게 대화를 했다. 복도에 나오자 웰리스가 말했다. "그럼, 7시 반에 당신 집 앞의 작은길에서 큰길로 나오는 모퉁이에 차를 세우고 기다리고 있겠어. 약속을 잊지 말아요, 로잘리." 약속 시간을 앞두고 로잘리는 전에 입었던 화려한 색의 드레스로 갈아입고 그 위에 눈부실 정도의 진홍빛 재킷을 껴입었다. 거울 앞에 선 그녀의 귀에 어디선지 에이드리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색채 감각은 최악이군!" 깜짝 놀라 돌아본 그녀는 단지 환상이었음을 알아차렸다. 로잘리는 방문을 쾅 소리가 나게 힘껏 닫고 현관으로 달려갔다. "어머, 어디 가니?" 아버지와 함께 현관으로 들어오던 어머니가 놀란 듯이 물었다. "데이트하러 가요." 양친의 질문공세가 시작되기 전에 로잘리는 서둘러 문밖으로 달려나갔다. "누구와?" 아버지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체해 버리고 그녀는 급하게 뛰어갔다. 왠지 웰리스 메이슨의 이름을 대면 아버지가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제 곧 에이드리언이 올 텐데." 시동을 걸어 놓은 채 스포츠 카의 문을 열고 웰리스가 웃는 얼굴로 손짓을 했다. 차가 달리기 시작한 바로 그 때 작은길로 들어서는 차가 한 대 있었다. 그 차의 운전사가 로잘리를 노려보았다. 그는 바로 에이드리언이었다. 그날 밤 로잘리는 약간 자포자기한 듯이 쾌활하게 떠들어댔다. 식사를 하고 춤을 추는 동안 웰리스는 끝까지 신사적으로 행동했으므로, 로잘리는 지금까지 지나치게 경계해 온 자기자신을 비웃고 싶을 정도였다. 다만 그가 돌아갈 때도 큰길 모퉁이에 차를 세운 것이 로잘리에겐 조금 부자연스럽게 느껴졌으나, 큰 차를 작은길에 넣었다가는 되돌리기도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고 의심했던 것을 곧 지워 버렸다. 웰리스가 로잘리의 뺨에 가볍에 손을 대더니 자기 쪽으로 돌렸다. "이것으로 마지막이란 말은 하지 않겠지?" 로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자라는 키스를 해도 괜찮겠나?" 다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작별인사치고는 약간 긴 키스를 하는 동안에 몇 대의 차가 그들 곁을 통과했다. 현관에는 아버지가 서 있었다. "얘, 로살리, 예상 외로 빨리 돌아왔군. 에이드리언과 못 만났어? 방금 돌아갔는데." "이봐요, 젠. 아버지는 아직…" 이튿날 저녁때 아버지 방에서 비서실로 가려고 하던 로잘리는 허둥지둥 걸음을 멈췄다. "방해를 해서 죄송합니다." 타이프를 치는 젠에게 몸을 깊숙이 구부리고 있던 에이드리언이 돌아섰다. "야아 로잘리, 우리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소?" 우리라니! 로잘리는 두세 걸음 뒤로 물러났다. 젠이 돌아보며 쾌활하게 불렀다. "어서 들어와요. 우린 비밀 이야기 따위는 하지 않아요. 그렇죠, 클레이포드 박사님?" "그렇게 말해 버리니 할 말이 없군!"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보며 즐거운 듯이 웃었다. "아버지가 돌아오실 때까지 말동무가 되어 주었으면 했을 뿐이에요. 상관하지 말고 일을 계속해요, 젠." 그렇게 말하고 나서 로잘리는 무심코 아버지의 회전의자에 앉았다. 그러나 에이드리언의 시선을 눈치챈 로잘리는 책상 위에 있는 팜플렛을 집어들어 일부러 열심히 읽는 체했다. 에이드리언이 아버지의 방으로 들어와서 문을 닫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젠가 한 약속은 어떻게 됐소?" 로잘리는 팜플렛을 책상에 내동댕이쳤다. "이것이 비밀 서류라도 된다는 말인가요? 남이 하는 일에 대해 하나하나 간섭하지 하세요. 마치 감시를 받고 있는 것 같단 말이에요!" 그녀는 일어서서 창문으로 걸어가서는 밖을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언은 훌훌 팜플렛을 넘기고 있더니, 이윽고 그것을 덮으며 조용히 말했다. "간섭이나 감시를 할 생각은 조금도 없소. 그저 사회생활의 상식을 가르치려고 했을 뿐이오. 그런데 주문해 둔 부품이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어요. 이번 주말에라도 텔레비전 수리를 끝내 버리고 싶은데, 당신은 토요일과 일요일 중 어느 날이 한가해요?" "이틀 모두 한가해요." "데이트하느라 바쁘지 않아요? 그럼 토요일로 결정하지… 그다지 환영은 받지 못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감사하고 있어요." 복도 쪽의 문이 열리며 아버지가 들어왔다. "미안해 로잘리. 또 늦어 버렸어. 여어, 에이드리언, 그 건을 젠에게 전해 주었는가?" "아차,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에이드리언이 비서실의 문을 열었다. "이쪽으로 왕림해 주시겠습니까, 미스 헤일우드?" 로잘리는 천천히 책상으로 걸어가서 아까 본 팜플렛을 집어들었다. "저어, 아빠 기다리는 동안 이것을 읽었는데, 괜찮지요?" "좋고말고. 남이 봐서는 안 될 것을 내가 책상 위에 내던져 둘 리가 있나?" 득의양양하게 에이드리언을 바라본 뒤 로잘리는 창에 기대서서 팜플렛을 펼쳤다. 아버지와 에이드리언은 지금까지 다 작성해 놓은 참고서의 초고를 타이프로 쳐달라고 젠에게 부탁하고 있었다. 참고서 건을 일단락짓고 나면 수학용의 타이프라이터를 대학에서 빌려 집으로 운반할 작정이라고 아버지는 말했다.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 팔람 박사님." 젠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 웃음 띤 얼굴은 오로지 다른 한 남자에게 쏠리고 있었다. "그러나 익숙해질 때까지 여러 가지로 지도를 받지 않으면…" "클레이포드 박사가 가르쳐 줄 거야." 젠의 보수와 오늘 밤부터 일을 시작하는 것들이 결정되자, 아버지와 에이드리언은 몇 번이고 젠에게 감사했다. 끝으로 에이드리언이 말했다. "집으로 돌아가야지, 젠? 내가 배웅해 주지, 어차피 지나는 길이니까." 그는 젠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사이좋게 방을 나갔다. 그날 밤, 로잘리는 어제 난생 처음으로 산 담배를 피우면서 비참한 기분으로 강의 노트를 펼치고 있었다. 아래층 서재에서는 어머니도 낀 네 사람의 이야기 소리와 한층 맑은 젠의 웃음소리가 들려왔으나,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타이프 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 "일은 무슨 놈의 일이야. 단지 이야기 파티잖아!" 로잘리가 혼자서 투덜대고 있을 때, 아래층에 있는 전화 벨이 울렸다. 곧 계단 아래에서 에이드리언의 큰소리가 들려왔다. "로잘리, 기다리고 기다리던 니콜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얼굴을 찡그리면서 담배를 끄고 로잘리는 급히 전화를 받으러 내려갔다. "어머, 오래간만이에요, 니콜. 방금 그 사람? 그래요, 에이드리언이야. 설마? 아버지에게 와 계셔. 어제? 그래, 잠깐. 아냐, 당신은 모르는 사람. 다르다니깐! 에이드리언 같은 남자와는 나가지 않아요. 금요일? 그래 그날은 괜찮아요. 그래?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 수화기를 놓은 로잘리는 뒤에서 누가 팔꿈치를 쿡쿡 찔렀으므로 돌아보았다. 에이드리언이 짓궂은 웃음을 띠고 서 있었다. "교제가 많아서 몹시 힘들겠군. 그러나 토요일의 상대는 나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래요." 로잘리는 발소리를 요란하게 내면서 계단을 올라갔다. "잠깐 기다려요. 나는 당신 러브 콜을 엿듣기 위해 나온 것은 아니야. 아버님이 당신한테 커피를 준비해 달라는 지시를… 이거 실례, 부탁하러 온 거요. 바쁘면 거절해도 괜찮소." "알았어요." 한숨을 쉬면서 내려오는 로잘리를 보고 에이드리언은 짖궂은 표정을 거두어들였다. "도와 드릴까?" "아니예요. 서재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텐데요!" 에이드리언은 어깨를 움츠리며 서재로 갔다. 로잘리가 커피를 서재로 가져가자, 에이드리언은 타이프라이터 옆에 구부리고 서서 젠에게 무엇인지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중이었다. 젠은 어린아이 같은 커다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수고했어요, 젠. 몹시 지쳤지요?" 로잘리가 비꼰다는 것을 알아차린 에이드리언이 나무라듯이 눈살을 찌푸렸으나 상냥하게 대답했다. "아뇨, 조금도." 어머니가 손을 뻗쳐서 쟁반을 받았다. "고마와, 로잘리. 너도 여기서 마시고 가는 게 어때?" "일이 남아 있어서 가지고 올라가겠어요." "그래? 바쁜데 안 됐구나. 엄만 너에게 항상 감사하고 있단다." 로잘리의 뺨이 발그레해지면서 기쁜 빛이 감도는 것을 에이드리언은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니콜은 약속한 금요일에 찾아와 값비싼 초콜릿 상자와 꽃다발을 내밀었다. "어머, 기뻐요, 니콜. 하지만 왜?"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을 하는데 따로 무슨 이유가 있어." 로잘리는 '경쟁상대가 나타난 줄 알고 당황하고 있는 거지?'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로잘리, 기뻐해 주지 않는 거야?" "천만의 말씀. 정말 고마와요." "말만으로는 안 돼, 태도로 보여 주지 않으면." 로잘리는 선물을 현관 옆에 있는 테이블 위에 놓고, 니콜의 얼굴을 끌어당겨 키스를 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그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한 듯 그녀를 껴안고 더 열렬한 키스를 퍼부었다. "오늘은 젊은 아가씨로부터 키스를 받는 그런 특별한 날인가 보군? 그렇다면 나도 한패에 끼고 싶은걸." 굵직한 목소리에 두 사람은 날쌔게 떨어졌다. 서재의 문앞에 에이드리언이 서 있었다. 로잘리는 선물 꾸러미를 안고 니콜의 손을 잡았다. "거실로 가요. 거기라면 다른 사람들도 다소 조심하겠지 뭐." 주방으로 들어가는 에이드리언을 잠깐 이상하다고 여기면서도, 로잘리는 니콜과 거실로 들어갔다. 얼마 동안 니콜의 수다에 맞장구를 쳐주고 나서 그녀는 꽃다발을 안고 주방으로 갔다 에이드리언은 아직 주방에서, 더욱이 혼자서 커피를 준비하고 있었다. 로잘리가 놀라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 그의 얼굴은 가면처럼 굳어져 있었다. "무슨 볼일이라도 있소? 커피라면 나에게 맡겨 두고, 당신은 당신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고 있으면 되잖소!" 그가 왜 화를 내는지 그 까닭을 알지 못한 채, 로잘리는 찬장에서 꽃병을 꺼냈다. "저는 이 꽃을 꽂으러 왔을 뿐이에요." 에이드리언의 매서운 시선을 의식하면서, 그녀는 꽃병에 물을 붓고서 가지고 온 꽃을 재빨리 꽂았다. 주방을 나오기 전에 그녀는 약간 후회스런 마음으로 부드럽게 말했다. "커피는 제 담당인데, 대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이드리언은 꽃병을 가슴에 안은 로잘리를 날카롭게 쏘아보더니, 홱 등을 돌리고 커피 잔을 치우기 시작했다. 토요일 오후, 로잘리는 에이드리언이 온다고 약속한 4시가 되기를 붕 뜬 기분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는 데도 예상 밖의 시간이 걸렸다. 지칠 정도로 갈팡질팡한 나머지 그녀가 고른 것은 가장 단순한 흰 블라우스와 스커트, 그리고 긴 은 사슬로 된 목걸이였다. 시계바늘이 4시를 가리킴과 동시에 현관의 초인종이 울렸다. 무슨 소리나 듣지 않을까 두려워하면서 문을 연 로잘리의 복장을 보고, 에이드리언은 만족한 듯이 활짝 웃었다. 그러자 로잘리는 하루의 쌓인 피로가 싹 가시는 것 같았다. "언제나 그런 모양을 하고 있으면 좋겠는데." 에이드리언은 중얼거리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공구 상자와 작은 꾸러미를 안은 그는 오픈셔츠와 여벌 옷차림의 간편한 차림새였다. "바로 위층으로 갈까요?" "네, 어서 그렇게 하세요. 홍차를 끓이는 즉시 저도 곧 갈게요. 홍차 드시죠?" "물론." 계단을 두 단씩 성큼성큼 올라가는 에이드리언을 바라보다가, 로잘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주방으로 들어갔다. 천장에서 그의 발소리가 들렸다. 봄의 산들바람 같은 따뜻한 기운이 로잘리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방문을 연 로잘리는 홍차를 얹은 쟁반을 든 채 주춤했다. 텔레비전이 완전히 분해되어 온 마루에 갖가지 부품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녀의 표정을 보고 에이드리언은 참다못해 웃음을 터뜨렸다. "걱정 안해도 돼요. 내가 마법의 지팡이를 한번 휘두르기만 하면 금세 본디 모습으로 되돌아갈 테니까." 로잘리는 방 안으로 들어가서 에이드리언이 일하는 모습을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어때, 존경받을 만하지?" "네." 로잘리는 솔직하게 말했다. "약간의 지식만 있으면 아주 손쉬운 일이오. 하지만 그런 얼굴은 나의 자존심을 크게 만족시켜 주니까, 당신한테는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겠소." 그는 부품 하나하나를 텔레비전 속에 익숙한 솜씨로 짜맞추면서 말했다. "요즘에 와서는 내 생각이 좀 바뀌었소. 물론 결혼할 생각은 없으나, 여자 친구 한 사람쯤은 있는 게 좋겠다고 말이야. 귀여운 아가씨한테 하는 일마다 감탄을 받는다는 것은 그다지 기분 나쁜 일은 아니거든. 그런데 누구를 택할까? 당신은 선약으로 가득찬 것 같으니… 그렇지, 젠이라면 유망하겠군. 한번 도전해 볼까." 로잘리를 힐끔 보면서 에이드리언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홍차를 여기 두겠어요." 로잘리는 쌀쌀하게 말하고, 책상 앞에 앉아 강의 노트를 펼쳤다. "휴일에도 일을 하나요, 미스 팔람?" "네, 달리 할 일이 있어야죠." "착한 애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요, 이것이 끝나면 아저씨가 같이 놀아 줄 테니. 그런데 양친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데, 집에 안 계시는가요?" "런던에 가셨어요. 늦게 돌아오신대요." 마지막 볼트를 다 죈 에이드리언은 텔레비전을 원상태로 돌려 놓고 스위치를 넣었다. 몇 초 후, 스피커에서 이야기 소리가 나오더니, 이어서 브라운관에 선명한 화면이 나타났다. "이렇게 깨끗한 화면, 몇 개월 만이에요!" 로잘리는 손뼉을 치면서 환성을 질렀다. 에이드리언은 채널을 돌려 모든 국의 화면을 조정했다. "이것으로 됐어. 지금 보겠소?" 로잘리가 머리를 가로 흔들자, 그는 텔레비전을 끄고 공구 상자를 치우고는 천천히 홍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새로 갈아끼운 부품값 얼마예요?" "그것은 내가 선심 쓴 거로 합시다." "안 돼요, 그래선…" "당신이 기뻐해 주는 그것만으로 충분해요." "정말 고맙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해요." 에이드리언은 무엇을 말하려다가 말고 공구 상자를 끌어당겼다. "아니… 벌써 돌아가시게요?" "그럴 생각이지만, 돌아가지 않는 쪽이 좋겠지?" 로잘리는 망설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무엇을 하지? 그럴싸한 계획이라도 있소?" 로잘리는 아무러면 어떠냐는 듯이 어깨를 움츠렸다. 하고 싶은 것은 얼마쯤 있긴 하지만… 그러자 에이드리언이 그답지 않게 망설이면서 말을 끄집어냈다. "당신이 너무 한가해서 할 일이 없다면… 내가 하고 있는 스테레오 제작을 견학하러 가는 것이 어때요?" 로잘리는 자기의 감정을 감추려고 이만큼 애쓴 일은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노력은 가까스로 성공했고, 대답을 들은 에이드리언은 불만스러운 듯이 말했다. "좀더 기뻐해 주리라 생각했는데." "굉장히 고맙고 기뻐요." 차창 밖을 지나치는 마을의 봄경치가 로잘리에게 유난히도 화려하게 보였다. 그녀는 에이드리언이 자진해서 자기 방으로 초대해 준 것이 마치 꿈인 것처럼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방은 그 후부터 조금은 정리됐어요?" "전보다 더 엉망이야. 어때, 돌아가고 싶소?" 로잘리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실로 안내된 로잘리는 곧장 창가에 있는 작은 테이블로 다가가서 전날 본 사진을 들고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이 내 사진이라도 된다고 당신은 그렇게 정신을 잃고 보는 거요?" 그는 놀려댔다. 이미 대답할 말을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로잘리는 웃으면서 가볍게 받아넘겼다. "이 사진 속의 분과 달리 당신에게선 자상한 감정이 어느 곳에도 느껴지지 않거든요." "그런 것이 소망이라면 빨랑빨랑 결혼해 버리면 돼. 니콜이 기다리고 있잖소?" "그래도 제가 결혼한다고 하면…" 로잘리는 당황해서 뒷말은 삼켜 버렸다. "당신이 결혼한다고 하면, 어떻다는 거요?" "결혼식에는 꼭 참석해 달라고 말하려고 했어요." 에이드리언은 공구 상자의 뚜껑을 거칠게 열고 안에 든 도구를 끄집어냈다. "물론 초대에는 응하고말고. 다만 내쪽에서는 갚아 달라는 뜻으로 보내는 초대장을 영원히 발송할 수 없는 것이 괴롭지만." 로잘리는 아직도 사진을 응시하고 있었다. "에이드리언, 당신도 나이를 먹으면 어머님처럼 살이 찔 거라고 생각해요?" "어머니에게 일러바칠 거요! 나라면 살찔 걱정은 없지. 남자가 살찌는 것은 아내의 지나친 요리 공세를 받기 때문이거든. 그런데 아까 한 이야기지만, 당신은 왜 남에게 애정을 구하고만 있는 거요? 자기가 남에게 애정을 주는 일은 생각하지 않고 말이오." "말씀하시는 뜻을 모르겠어요." "그렇겠지. 행복한 가정에서 불만만 터뜨리고 있는 당신은 모르는 것이 당연하지." 에이드리언은 갑자기 일어서서 침실이라고 생각되는 옆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올 때에는 커다란 나무 상자를 소중한 것인 양 안고 있었다. "자아, 이것이 나의 노력과 인내의 결정이오." 그는 나무 상자를 가만히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어머나, 굉장해요!" "아직 일러,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훌륭해 보이는 것만 해도 반쯤은 성공한 것이잖아요." "겉모양 따위는 아무러면 어때. 요는 알맹이란 말이오." 로잘리는 벽에 걸린 거울을 들여다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럼 저에게도 아직 희망이 있다는 거죠?" "그 수단에 넘어가 아첨을 할 정도로 나는 한가하지 않아요." 에이드리언은 방구석에 있는 허섭쓰레기 속에서 커다란 원추형의 부품― 스피커 같은―을 두 개 집어내어 그것을 라디오 속에 접속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문득 배고픔을 느낀 로잘리는 자기가 아침부터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것을 알았다. 그러나 식사를 재촉하기도 무엇하고, 더구나 남자가 하는 일을 방해하지 않는 여성도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생각도 나서, 로잘리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의자에 눌러앉아 있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에이드리언이 돌아보면서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계속 그러고 있었소? 무슨 여자가 그렇게도 조용하게 있담!" "여성에 대한 공부가 아직 미숙한 것 같군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그는 스피커를 하나씩 의자 위에 얹었다. "조용히. 지금부터 제1차 청취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정말로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그럼…" 에이드리언이 스위치를 넣자마자 방 안은 한 개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웅장한 클래식의 멜로디로 가득찼다. "굉장해요! 정말 소리가 나오네요!" "무례하군." 그러면서도 에이드리언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크고 작은 다이얼을 이리저리 돌려 음향을 조절했다. "풍부한 음량, 뛰어난 감도. 만점이야. 오해하지 말아요, 내가 한 말은 여성에 관해서 하는 말이 아니니까." 로잘리는 웃으면서 볼륨을 한껏 올린 음악에 뒤질세라 큰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시끄럽게 해도 집주인이 불평하지 않아요?" "오늘 아침 분명히 양해를 얻어 놨거든." 에이드리언은 볼륨을 적당히 조절해 놓고 일어서서 로잘리의 어깨에 팔을 얹고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이오. 당신은 그의 음악을 좋아해요?" 로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도 그렇다고 대답하고는 에이드리언과 마주보며 생긋이 웃었다. "당신은 어머니를 꼭 닮았군." 그는 중얼거렸다. "그러시면 어머니가 불쌍해요. 저는 미인이 아니거든요." "당신이 미인이라고는 하지 않았소. 그러나 당신한테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어. 아마 그 눈 때문일 거요. 남에게 호소하는 듯한,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달리 어떻게 표현할 순 없지만." 음악이 한층 높아지다가 뚝 그쳤다. 에이드리언이 스위치를 끄자, 로잘리는 약간 쓸쓸함을 느꼈다. 그리고 얼마 동안 잊고 있던 공복감이 엄습해 왔다. "저어, 에이드리언, 저는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그는 놀라서 막대 모양으로 곧추섰다. "정말 미안하게 됐군. 여성을 대접할 줄을 모르니 말이야. 정말 미안해요. 그럼 어떻게 할까? 밖에서 식사를 할까, 그렇잖으면 여기서 우선 있는 것으로 때울까? 나는 어느 쪽이라도 좋은데." "재료만 있으면 제가 샌드위치를 만들어도 돼요." 자기가 주방에 들어가는 것을 그가 싫어할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로잘리는 말했다. 그런데 에이드리언은 겨우 안심했다는 듯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살았군, 실은 아직 스테레오의 손질을 계속하고 싶었거든. 자아, 주방에 가서 마음내키는 대로 해봐요." 어안이벙벙해진 로잘리를 그는 무람없이 재촉했다. "주방은 저쪽이오. 나는 여기 있을 테니,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해요." 로잘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거기도 어질러져 있기는 방 못지 않았으며, 더러워진 식기는 개수대에 산처럼 쌓여 있었다. 홍차통과 주전자를 찾아냈으나 빵 케이스 안에는 얇은 한 조각 빵이 있을 뿐이었다. 로잘리는 거실로 돌아가서 에이드리언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이 시간에 문을 열고 있는 가게는 없겠지. 그렇지, 아래층에서 빌려줄 거요. 내친김에 냉장고에 보관해 놓은 내 식료품도 가지고 와요." 로잘리는 집주인 이름을 묻고 나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노크를 하자 부엌문이 열리며 인간성이 좋아 보이는 중년 부인이 얼굴을 내밀었다. "피루즈 부인이십니까? 저는 위층 클레이포드 박사의… 방에 와 있는 사람입니다만, 샌드위치를 만들 빵을 빌릴 수 없을까 하고…" 로잘리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피루즈 부인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그녀는 로잘리를 주방으로 불러들여 찬장에서 커다란 빵 뭉치를 집어내 주었다. "쓸 만큼 가지고 가세요. 참, 선생님이 맡기신 것도 드려야지." 햄, 밀크, 버터 따위가 냉장고에서 차례로 나왔다. "그밖에 필요한 것은?" "그러시다면 토마토나 다른 과일은 없는지요?" "있고말고요. 몇 개… 두 개면 되나요?" 피루즈 부인은 쌓아올린 식료품 위에다 토마토 두 개를 요령있게 얹었다. "나중에 또 필요한 것이 있으면 사양하지 말고 얘기하우." 피루즈 부인의 친절에 감사하면서 로잘리가 주방에서 나오려고 했을 때, 한 중년 남자가 뜰에서 들어왔다. "어머나, 짐. 이쪽은 이층 선생님 댁에 온 손님인데, 이름은…" "로잘리 팔람이라고 합니다." "그러세요. 이쪽은 우리 주인이랍니다." 로잘리가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자, 피루즈 씨가 말했다. "아가씨는 선생님의 친구입니까?" "같은 대학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밝혀졌다는 듯이 피루즈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쪼록 편히, 아가씨. 그리고 이따금 놀러오세요." 식료품을 듬뿍 안고 로잘리는 이층 주방으로 돌아왔다. 거실에서는 에이드리언이 골똘하게 스테레오에 맞붙어 있었다. 그 사이에 로잘리는 더러워진 주방을 치우려고 마음먹었다. 정신없이 설거지를 하고 있는 로잘리의 어깨에 묵직한 손이 얹혀졌다. "누구 허가를 받고 이런 짓을 하는 거요?" 로잘리는 조심스럽게 뒤돌아봤으나, 예상과는 달리 갈색 눈에 웃음을 담고 있는 그를 보고 안심했다는 듯이 어깨의 힘을 뺐다. "괜찮겠지요? 그대로 내버려 두고는 요리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요." "아니, 간섭을 많이 해야겠소. 집에서 지나칠 정도로 일을 하는 당신을 여기까지 와서 일을 시키려고 초대한 것은 아니란 말이오." 에이드리언은 행주를 집어내어 부지런히 접시를 닦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우리는 함께 접시닦기를 해야 할 숙명인 것 같군." "아래층 부부는 사이가 좋은 분들인 것 같았어요. 그런데 저를 꽤 이상한 눈으로 관찰하더군요." "무리가 아니지. 여자 손님이 찾아온 것은 당신이 처음이니까 말이오." "당신에게 폐가 되지 않았을까요?" "뭐, 아무 일도 없겠지." 씻는 작업이 끝나자, 에이드리언은 또다시 스테레오 앞으로 돌아갔다. 로잘리는 재빨리 요리를 끝내고 식탁 준비를 하려고 거실로 갔다. 그러나 식탁 위에는 스테레오의 부품과 책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 위에 있는 것을 마루에 내려놓으면 안 될까요?" "안 되는데." "그렇다면 우리 둘은 마룻바닥에 앉아서 식사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도 좋아요?" 에이드리언이 좋다고 했으므로 로잘리는 마루에다 식탁보를 펼쳐 그 위에 식기를 늘어놓았다. 피크닉에서 먹는 것 같은 식사가 시작됐다. "많이 먹어요." "우선 체면을 차리고 먹고 있어요." 비평가 같은 눈초리로 로잘리를 바라보면서, 에이드리언은 한손으로 쉴새없이 스테레오의 코드를 만지작거리더니 어느 새 코드를 플러그에서 빼버렸다. "미안해요." 로잘리는 반사적으로 엉겁결에 말했다. "누가 당신 탓이라고 했소?" 그 말 이외에는 둘은 아무 말도 않고 식사만 했으나, 로잘리는 그 침묵이 도리어 즐겁게만 느껴졌다. 식사 후 함께 접시 씻기를 끝마친 두 사람은 거실로 돌아왔다. 에이드리언은 작은 걸상에 앉아서 다시 스테레오의 조정을 시작했고, 로잘리는 그 발밑의 마룻바닥에 앉아서 교묘하게 움직이는 드라이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무심히 얼굴을 든 로잘리의 시선은 그대로 못박힌 듯이 굳어져 버렸다. 윤곽이 뚜렷한 사나이다운 그 옆얼굴을 만지고 싶은 강한 충동이 그녀 가슴속에 용솟음치고 있었다. 에이드리언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그녀를 내려다봤다. 드라이버가 마루에 떨어졌다. 다음 순간 에이드리언은 몹시 거칠게 로잘리를 끌어당겨 입술을 훔쳤다. 기나긴 키스가 겨우 끝났을 때, 로잘리의 몸은 충격과 흥분으로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에이드리언은 로잘리를 가만히 떼어놓고 드라이버를 집어들고 다시 스테레오를 향해 고쳐 앉았다. "용서해 줘요. 하지만 당신도 나빠. 키스해 달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잖어, 눈이 확실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어." "거짓말! 거짓말이에요!" "거짓말이 아녜요. 이제부터는 남자를 바라볼 때 그 귀여운 눈을 가릴 커튼이라도 매다는 것이 좋겠소. 그렇지 않으면 어떤 재난을 초래할지 모르니까." 로잘리는 타는 듯한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 일어서서 멍하니 방 안을 돌아다녔다. 정말로 얼굴에 나타내고 말았을까― 에이드리언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까지? 에이드리언이 취한 행동에 멍해져 있던 로잘리는 또다시 그가 하는 말에 놀라고 말았다. "처자가 있는 남자와 놀러다니는 것이 그렇게도 즐겁소?" 4 로잘리는 천천히 돌아섰다. "처자가 있다니… 그건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죠?" "물론 웰리스 메이슨의 일이오. 그러나 그는 현재 아내와 별거 중이지." 로잘리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에이드리언은 목소리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당신이 모르고 있었던 것 같으니까 조금은 동정할 여지도 있지만, 당신네들 일이 교내에 꽤 소문이 나 있는 형편이란 말이오." 로잘리는 여러 사람들이 쳐다보던 시선의 뜻을 비로소 깨닫고 깜짝 놀랐다. "그분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요?" "당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그 사실을 알면 자기를 피해 버릴까 봐 그랬겠지." "별거 중이라면, 부인은?" "남편의 복잡한 여성관계에 정나미가 떨어져 약 반 년 전에 가출한 채 행방불명이 된 것 같아요." "그분이 그런 사람이라니, 믿어지지 않아요." "그는 머리가 좋은 사내니까 당신의 결벽한 성격을 알아차리고, 현재는 점잔을 빼고 있을 뿐이오." "부인은 혼자서 가출했나요?" "아아, 일곱 살 먹은 딸을 남겨 놓고 떠났지.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불행한 딸이 하나 있지." 로잘리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백을 열고 담뱃갑을 끄집어냈다. "피워도 괜찮을까요?" "아니, 좋지 않아." 날카로운 목소리를 무시하고, 로잘리는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성냥을 그었다. 그 순간, 에이드리언은 성냥불을 끄고 그녀의 입에서 담배를 비틀어 빼았더니 멀리 던져 버렸다. 발끈 화를 내며 다른 한 개비를 집어내려고 하는 로잘리의 손을 꽉 누르면서 그는 말했다. "그 담뱃값이 얼마요?"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한 채 로잘리가 값을 말하자, 에이드리언은 자기 호주머니에서 그 액수의 잔돈을 집어내어 그녀의 핸드백에 던져넣더니, 다음 순간 담뱃갑을 낚아채서 자기 바지 호주머니에 쑤셔 넣어 버렸다. "제 담배예요. 돌려 줘요!" "값을 지불한 이상 이미 내 거요." "당신은 담배를 피우지도 않으면서 뭘 그래요!" "당신도 두번 다시 피우면 안 돼." 로잘리는 에이드리언의 바지 호주머니에 마구 손을 넣어 담배를 끄집어내려고 했다. 에이드리언에게 손목을 세게 붙잡힌 로잘리는 너무 아픈 나머지 소리를 지르려고 하다가 퍼뜩 제정신이 들었다. 남자 호주머니에 손을 넣다니. 로잘리는 부끄러움과 뉘우침으로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면서 힘껏 에이드리언의 손을 뿌리쳤다. "당신 설교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아요. 당신은 미워요, 미워!" 에이드리언은 스테레오 앞으로 가서 또 작은 의자에 앉았다. "사랑한다는 말보다는 훨씬 낫군. 잘못으로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그럴 가망은 전혀 없으니까 말이오." 로잘리는 핸드백을 움켜잡고 떨리는 목소리를 억누르면서 말했다. "돌아갈래요. 보내 주세요." "잠깐만 더 기다려요. 지금은 손을 뗄 수가 없어." 로잘리는 방 안을 초조하게 돌아다녔다. "서성거리지 말아요, 눈에 거슬리니까." 로잘리는 서가에서 제목도 보지 않고 책을 한 권 빼내어 에이드리언에게 등을 돌리고 펼쳤다. 그러나 활자가 흐릿해지며, 마침내는 읽을 수 없게 되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더니, 이윽고 방울방울 책장 위로 떨어졌다. "그런 책을 읽는 것을 보니, 당신도 이제 수학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 모양이군." 온화한 목소리에 로잘리가 얼굴을 들자,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눈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자기가 들고 있는 것이 수학 교과서라는 것을 알고는 눈물에 젖은 얼굴에 가냘픈 미소를 떠올렸다. 에이드리언이 손수건을 건넸다. "이것으로 눈물을 닦아요. 그러지 않고는 그 책을 탈수기에 넣어서 말리기 전에는 못 쓰게 되겠잖아." 로잘리가 순순히 눈물을 닦자, 그는 이어 말했다. "미안미안, 보기와는 달리 당신이 섬세하고 온순하다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소. 자, 화해하는 뜻으로 악수." 두 사람은 웃으면서 악수를 교환했다. "이제 됐군. 사과하는 뜻으로 아주 맛있는 커피를 타겠소." 그로부터 한 시간 후, 에이드리언은 로잘리를 집까지 바래다 주었다. "약간 말썽이 있었지만, 대체로 즐거웠잖소?" 로잘리는 진심으로 수긍했다. "나도 즐거웠소. 잘 자요, 로잘리." 이튿날, 딸이 어제 어떻게 행동했는지 알게 된 양친은 뜻있는 미소를 주고받고는 판에 박은 질문을 했다. 로잘리는 단호히 부정했다. "정말 그것뿐이에요. 그 이상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래도 마주보고 웃는 양친을 남겨 놓고, 로잘리는 재빨리 이층으로 올라갔다. 월요일, 로잘리는 웰리스 메이슨을 피해 평소보다 빨리 직원식당으로 갔다. 셀프서비스의 창구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보니, 아버지를 둘러싸고 이수학과 교직원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로잘리는 창구에서 식사 쟁반을 받아들고 곧장 그 테이블로 걸어갔다. 에이드리언이 웃는 얼굴로 맞으며 자기 옆의 빈자리를 가리켰다. "여기가 비어 있어요." 그는 로살리의 쟁반을 받아 테이블에 놓았다. 아버지가 가만히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도 끼게 해주세요, 아빠." "못 보던 얼굴인데, 누구의 따님인가?" 아버지가 언제나 다른 자리에서 식사를 하던 딸을 비꼬자, 에이드리언이 재빨리 로잘리를 편들었다. "미용과 건강을 위해서는 역시 이쪽 자리가 좋다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테이블에 쾌활한 웃음소리가 났을 때, 웰리스가 식당으로 들어와 로잘리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에이드리언이 마치 그 시선을 가로막기라도 하듯이 몸을 앞으로 내밀며 명랑하게 이야기를 걸었다. 식사를 마친 이수학과의 사람들과 함께 로잘리도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나왔다. 일행이 직원실 앞까지 다다랐을 때, 에이드리언은 그녀의 아버지와 동료들을 먼저 가게 하고는 복도의 벽에 기대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호기심에 찬 시선을 당당히 받아넘기면서 매우 친숙한 사이처럼 로잘리와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내에 일어난 좋지 못한 평판을 지워 버리려고 한 것 같았다. 웰리스가 불쾌한 얼굴로 지나가 버리자, 그때서야 에이드리언은 겨우 벽에서 떨어졌다. "오늘 밤은 참고서에 대해 협의하는 날이오. 당신도 집에 있을 거요?" 로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때 또 만날 수 있겠군." 에이드리언은 미소를 지으면서 자리를 떴다. 그날 밤, 자기 방에서 연구 노트를 훑어보던 로잘리는 층계 아래에서 들려오는 에이드리언의 목소리에 하마터면 펜을 떨어뜨릴 뻔했다. 계단을 달려내려가서 그 늠름한 가슴에 뛰어들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와 키스를… 로잘리는 갑자기 현실로 되돌아왔다. '가망은 전혀 없다'고 말하던 그의 무자비한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에이드리언이 아무리 친절하게 해준다고 해도 그것은 남녀간의 사랑하고는 상관없는 것에 불과하다. 로잘리는 한숨을 쉬고 나서 다시 보고 있던 노트에 집중했다. 밤이 깊어갈 무렵, 아버지가 계단 밑에서 불렀다. "로잘리, 커피 좀 타 주겠니?" 네 개의 커피 잔 중 세 개만을 내려놓고 서재에서 나오려고 하는 로잘리를 에이드리언이 불러세웠다. "당신도 여기서 마시고 가는 게 어떻소?" 말하자마자 그는 재빨리 일어서서 로잘리의 손을 잡아 자기가 앉았던 의자에 앉히고, 자기는 그 의자의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그곳이 아니라도 빈 의자는 얼마든지 있는데." 아버지가 말했다. "괜찮습니다, 박사님. 여기가 훨씬 편합니다." 에이드리언은 비스킷을 담은 쟁반을 자기 곁으로 끌어당겨 놓고, 로잘리의 등에 팔을 둘러 다시 수학 이야기로 되돌아갔다. 다가앉은 두 사람의 모습을 양친은 즐거운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로잘리는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두 분은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우리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거짓말이라고 생각되면 에이드리언에게 직접 물어보세요!' 로잘리는 문득 자기가 화제거리가 되어 있는 것을 눈치챘다. 에이드리언이 지껄이고 있었다. "… 테이블을 쓸 수 없게 되자, 댁의 아가씨가 어떻게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로잘리를 흘낏 보고 유쾌하게 웃었다. "당황하지도 떠들지도 않고 테이블 보를 마룻바닥에 깔더니 방 안에서 피크닉을 하자고 말하지 않겠어요.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정말 즐거웠어요!" 어머니는 웃으면서 감탄했다는 듯이 말했다. "훌륭하구나, 로잘리. 만약 내가 너였다면 도저히 그렇게 재치있게 해내지는 못했을 게다." "그렇지 않아요, 샐리. 그리고 그 당시는 둘뿐이었으니 아무것이라도 진수성찬이 아니었을라구. 사랑을 할 때는 으레 그렇잖어?" 로잘리는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의 숨은 뜻을 알아차리자 볼을 붉히면서 에이드리언을 훔쳐봤다. 뜻밖에도 그는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머니가 일어서더니, '오늘은 꼭 내가 씻으마' 하고는 빈 잔을 모으기 시작했다. 로잘리가 허겁지겁 일어나려고 하자, 에이드리언이 말렸다. 아버지도 돕겠다면서 일어났다. 나란히 서재를 나가는 양친을 로잘리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언, 왜…?" "그것보다 당신한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드리지. 피루즈 씨가 그러더군. 당신은 '매우 뛰어난 미인'이라고 말이오. 또 그 부인은 '잘 어울리는 한 쌍입니다. 식은 언제 올립니까?' 하잖겠소!" 로잘리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서 당신은 뭐라고 대답했어요?" "아직 결정 안했다고만 했지." 에이드리언은 일어서서 방 안을 걸어다녔다. "모처럼의 기대를 어긋나게 해서는 가엾을 것 같아서 말이오." "그러나 언제까지 속일 수 있을까요?" "일단 유사시에는, 사실은 싸우고 헤어졌다고 말하면 되지 뭐." 로잘리도 일어섰다. "아직 일이 남아 있어서 이만 실례하겠어요. 편히 쉬세요, 에이드리언." 로잘리는 문쪽으로 나갔다. "로잘리." "네?" "잠깐, 이리 와요." 에이드리언은 돌아와서 자기 앞에 선 로잘리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개암나무 빛깔 눈을 응시하더니 입술에 부드럽게 키스를 했다. "잘 자요, 로잘리."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서재에 되돌아온 양친은 뺨이 발그레해진 딸과 그 맞은편에 서 있는 에이드리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본 다음에 서로 마주보고 만족스러운 웃음을 교환했다. 다음날 점심때에도 에이드리언은 로잘리에 대해 마치 애인 같은 배려를 보였으며, 전날처럼 직원실 앞에서 이야기에 열중했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웰리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사무적인 투로 말했다. "미스 팔람, 할 이야기가 있으니 지금 곧 내 방으로 와주어야겠소." 웰리스가 가버리자 에이드리언은 분개해서 그가 자기 지위를 이용해 비열한 방법을 쓴다고 비난했으나, 상사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점은 인정했다. 로잘리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웰리스의 방에 들어섰다. 들을 필요도 없이 이야기의 내용은 뻔했다. 문제는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있는 것이다. "어서 와요. 자 앉으시지." 웰리스는 책상 앞에서 책망하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야기란 다른 것이 아냐. 당신은 왜 나를 피하지?" 로잘리는 난단히 각오했다. "저는 당신에게 부인이 계시다는 것을 며칠 전에 알았어요." "하지만 나는 당신이 알고 있을 거라고…" "몰랐어요. 알고 있었다면 교수님의 사적인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예요, 절대로." "왜? 뜻이 맞는 동료랑 식사나 댄스에 같이 갔다고 해서 어디가 나쁜가? 그리고 아내는 좋아하는 남자가 생겨 멋대로 가출한 거야. 나는 피해자란 말이오." "그랬군요! 부인이 가출한 이유가…" "내 바람끼 때문이라고 누가 귀띔했군? 근거 없는 중상이오. 불쌍한 것은 내버려 두고 간 딸애지. 매일처럼 제 어머니가 돌아오는 날을 묻지만, 나는 모른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어요." 눈을 내리뜨고만 있던 웰리스는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하더니 얼굴을 들었다. "그 딸애 때문에 당신 힘을 얻고 싶소." 로잘리는 가슴이 덜컹했다. 어머니에게 버림을 받은 딸은 어떤 생각으로 나날을 지내고 있을까? "그러나 웰리스, 제가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가끔 내 집에 와서 같이 이야기를 하며 놀아 주기만 하면 돼요. 내가 집을 비울 때는 이웃 부인이 맡아서 친절하게 돌봐 주고 있지만, 아무튼 나이 차이가 너무 심해서 아이의 기분을 맞추는 것은 무리거든." 웰리스는 일어서서 로잘리에게 다가왔다. "제발 부탁이오, 로잘리. 한번만이라도 딸을 만나 줘요. 그러면 나의 딱한 처지를 알게 될 거야." 로잘리는 진퇴양난에 빠져 버렸다. 그애를 달래고 힘이 돼 주고 싶다. 그러자면 웰리스와 교제를 계속해야 한다. 에이드리언은 어떻게 생각할까? 절대로 이해해 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망설이는 로잘리의 손을 잡고 웰리스는 거기다 입술을 댔다. "부탁해, 로잘리." 로잘리는 얼른 손을 빼면서 키스 흔적을 살짝 훔쳐 버렸다. "한번만 따님을 만나겠어요. 지금으로서는 이 이상은 약속할 수 없군요." "고맙소. 그럼 언제? 오늘 밤이라도 좋은가?" 로잘리는 어깨를 움츠렸다. "네, 하여튼…" "그럼, 7시에 그 장소에서 기다리겠어. 고마와, 진심으로 감사하오." 에이드리언이 찾아오기 전에 집을 나서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로잘리가 종종걸음으로 아래층에 내려왔을 때, 현관의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여는 그녀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야아, 로잘리." 역시 에이드리언이었다. "어서 오세요." 로잘리는 돌아보며 양친을 불렀다. "저, 볼일이 있어 나가요." 그렇게 말하고 곁을 빠져 나가려고 했으나, 그가 팔을 잡고 제지했다. "오늘 밤은 집에 있겠다고 했잖소?" "기분이 달라졌어요." 로잘리는 팔을 빼고 달아났다. 웰리스의 차에 타기 전에 돌아보니 에이드리언이 문에서 몸을 내밀어 노려보고 있었다. 몇 초 후, 거리가 떠나갈 듯한 문 소리에 로잘리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다. 달리는 차 안에서 웰리스는 로잘리에게 딸에 대한 예비지식을 알려 주었다. 몹시 낯가림을 하는 애라서 그 일로 기분을 상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사정이 사정이니까 알 만도 하군요." "그래요. 한밤중에 혼자서 울 때도 있어. 내가 아무리 달래도 어머니 같지는 않거든." 웰리스는 현대식 단독주택 앞에 차를 세우고 로잘리를 집 안으로 안내했다. "잠깐 기다려요. 맡겨 놓은 집에 가서 멜라니를 데리고 올 테 니." 아버지 손에 이끌려 나타난 애는 금빛 고수머리의 귀염성 있는 소녀였다. 몹시 파란 눈으로 생면부지의 내방자를 두려운 듯이 쳐다보며, 소녀는 가냘픈 목소리로 말했다. "이 사람은 엄마가 아니야. 엄마는 언제 돌아와요, 아빠?" 웰리스는 로잘리를 보면서 '이런 꼴이라니까' 하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로잘리는 허리를 낮게 구부려 소녀의 눈을 수평으로 응시했다. "안녕, 나는 로잘리라고 해. 너는 멜라니지? 로잘리와 멜라니― 마치 쌍동이 이름 같다고 생각되지 않니?" 소녀의 얼굴에 번지는 미소에 힘을 얻어, 로잘리는 부드럽게 말을 계속했다. "멜라니, 너의 아빠는 대학 선생님이시지? 저어 말이야, 우리 아빠도 대학 선생님이란다." 멜라니는 아빠의 손을 놓고 조심스럽게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아줌마 아빠도 주임?" "그래요. 너 대학에 가본 일이 있니?" 멜라니는 까딱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 방에도 가보았니?" "네, 빙글빙글 도는 의자가 있어요." "우리 아빠 방에도 있단다. 이것은 비밀인데, 나는 아빠의 의자에 앉아 빙글빙글 돌면서 놀아요. 굉장히 재미있거든." 소녀가 가만히 로잘리의 팔에 손을 올려놓았다. "멜라니도 그렇게 해본 적이 있어요? 멜라니는 아빠에게 돌려 달라고 해요. 아빠도 그것을 제일 좋아할 거야." 소녀는 아빠를 쳐다봤다. "또, 놀러가도 돼?" "그럼, 좋고말고. 언제 데리고 갈까?" "꼭요, 아빠. 로잘리 아줌마도 대학 선생인가요?" "그래, 얼마 안 된 애숭이야." "아줌마 방도 있나요? "다른 선생님들과 같이 쓰는 방인걸. 그러나 빙글빙글 도는 의자 따위는 없어요." 그러면서 로잘리는 울상을 지어 보였다. "아줌마, 아빠 방에 가면 되잖아요." "어머, 그렇군. 그것을 잊고 있었네." 로잘리의 손 안으로 작은 손이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이층에 가서 내 인형을 볼래요?" "그렇게 해도 괜찮을까요, 웰리스?" "괜찮고말고. 딸과 사이좋게 지내 줘요." 힘차게 달려가는 소녀의 뒤를 쫓아 올라간 이층에서, 로잘리는 작은 여주인으로부터 여러 가지 인형을 소개받았다. 이윽고 목욕을 하고 침대에 들어간 멜라니는 로잘리의 손을 꼭 쥐었다. "또 올 거죠?" 소녀의 애처로운 표정에 눈시울이 뜨거워진 로잘리는 무릎을 꿇고 잘 자라는 키스를 했다. "그래, 꼭 오겠어. 기다리고 있어요." 소녀는 만족스럽게 숨을 내쉬고 눈을 감았다. "잘 자요, 로잘리." "잘 자요, 멜라니." 로잘리가 조용히 방을 나오자 웰리스가 그녀를 꼭 껴안았다. "당신은 훌륭한 사람이군, 로잘리. 나의 이 고마운 기분을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어." 로잘리는 머리를 저었다. "전, 제가 얼마나 무력한지 절실히 느꼈는걸요." "그렇지 않아요. 저 아이가 한번도 소동을 벌이지 않고 잠든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어." 웰리스는 로잘리의 손을 잡았다. "지쳤지? 감사의 뜻으로 지금부터 밖에 나가 식사를 대접하고 싶은데 어떨까? 멜라니는 나중에 스미드 부인이 와서 돌볼 테니 걱정없어요." "하지만 내일 수업을 위해 조사할 것이…" "하루쯤 기초조사를 게을리했다고 해서 당신 상사가 화를 내지는 않아요. 본인이 말하는 것이니 틀림없소!" 웰리스는 로잘리의 허리에 손을 대고 끌어당겼다. 목덜미에 숨소리가 들렸다. 로잘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몸을 돌려 피하며 말했다.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저녁식사라면 이미 하고 왔어요. 정말 이젠 실례하겠습니다." "자, 그럼 가볍게 한 잔만. 괜찮겠지?" 로잘리는 아직도 집에 있을 에이드리언의 얼굴을 마음속으로 그려봤다. 오늘 밤의 일은 내가 그의 호의를 완전히 무시해 버린 것이다. 아무리 변명해도 그는 두번 다시 믿어 주지 않으리라. "그럼 정말 한 잔만이에요." 될대로 되라는 기분으로 로잘리는 대답했다. 웰리스는 로잘리를 마을에 있는 작은 술집으로 안내했다. "건배하지. 무엇을 위해서 하는 것이 좋을까?" "멜라니의 어머니가 하루빨리 집으로 돌아오시기를 위해서." 웰리스의 얼굴이 한순간 불끈해졌으나 곧 잔을 쳐들었다. "그럼 아내의 귀가를 빌면서― 건배!" 잔을 비우자 로잘리는 일어섰다. "잘 마셨습니다, 메이슨 교수님. 이제 전 돌아가겠어요." 인적이 드문 주차장의 한모퉁이에서 웰리스가 난폭하게 로잘리를 끌어안았다. "돌아가기 전에 무슨 일이 있어도 키스를 허락해 줘." 그의 말투와 술 냄새에 로잘리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에이드리언의 얼굴이 머리에 떠오르는 순간, 그녀는 저항력을 잃고 말았다. 웰리스의 키스는 길고 집요했다. 차를 그 장소에 멈췄을 때에야 웰리스는 겨우 예의바른 목소리로 되돌아왔다. "용서해 줘요. 딸과도 만나고 싶지 않다는 말은 제발 하지 말도록. 가까운 시일 내에 또 집에 좀 와줘. 부탁하겠소." 멜라니를 위해서라고 말하는 바람에 로잘리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집 앞에 아직도 에이드리언의 차가 있는 것을 본 로잘리는 발소리를 죽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서재 앞까지 왔을 때 안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잘리? 잠깐 들어와." 문을 연 딸의 얼굴을 보고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안색이 좋지 않구나. 무슨 일이라도 있었니?" 에이드리언의 냉소 띤 얼굴을 외면하며 로잘리는 일부러 쾌활하게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예요. 무슨 일이죠?" "니콜이 전화를 걸어왔어. 내일 밤에 집으로 와도 좋으냐고 묻던걸." "내일은 안 돼요. 학기 중간 휴가 때에 떠날 여행 일을 상의하기 위해 메리온과 약속을 해버렸어요." "아니, 여행이라니. 이번에는 어디로 떠날 예정이니?" "요크셔를 한 바퀴 돌 작정이에요." 아버지가 얼굴을 들었다. "자네도 요크셔의 본가로 돌아간다고 했지, 에이드리언? 어쩌면 그곳에서 로잘리와 만날지도 모르겠군." "만날 수 없겠지요. 요크셔라고 간단히 말해도 땅이 워낙 넓어서." 냉담한 목소리를 들으며 로잘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니콜에게 전화해서 모레 오라고 할게요." 전화를 걸고 난 뒤 로잘리는 방으로 올라가서 내일 강의의 교재 연구를 시작했다. 얼마 지난 뒤 아래에서 아버지의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이드리언이 돌아간단다, 로잘리!… 어찌 된 거야? 들리지 않는 것 같군, 에이드리언. 이층에 올라가서 어찌 된 일인지 형편을 보고 오는 것이 어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볼일도 없으니까요." 들으란 듯이 빗대어 큰소리로 말하고 나서, 에이드리언은 로잘리의 양친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문을 닫았다. 달려가는 자동차 소리를 로잘리는 얼빠진 사람같이 멍청히 듣고만 있었다. 5 목요일 밤, 로잘리는 서재에서 들려오는 에이드리언과 젠의 웃음소리에 시달리면서 강의의 교재 연구를 하고 있었으나 전혀 진척되지 않았다. 현판의 초인종이 울리자, 로잘리는 방을 뛰쳐 나와 자신도 놀랄 정도로 환호성을 지르면서 니콜의 가슴으로 뛰어들었다. 뜻밖의 환영에 몹시 기쁜 나머지 니콜은 그녀를 높이 안아들고 춤추며 돌았다. "도대체 무슨 소동인가?" 서재에서 얼굴을 내민 아버지가 열렬한 키스를 교환하고 있는 젊은 두 사람을 보자, '이거 실례했군' 하면서 곧 문을 닫았다. 아버지가 목격한 광경을 알린 듯, 서재에서는 왁자하게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키스하는 사이사이에 니콜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어떤 때는 나에게 홀딱 반한 것같이 보이다가는, 또 어떤 때는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얼굴을 보이니. 물론 그런 점이 당신 매력이기도 하지만." 니콜은 로잘리에게 이끌려 거실의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계속 혼자 지껄여댔다. "잠깐 실례하네." 그렇게 말하면서 아버지가 들어왔다. "니콜, 자네를 만나고 싶어하는 여성이 계시다네." 아버지가 돌아보면서 손짓을 하여 불렀다. "내 비서를 소개하겠네. 젠 헤일우드 양이야. 이쪽은 덴톤 군. 실은 말이야 니콜, 젠은 자네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어." 니콜은 이미 로잘리 아버지의 이야기를 건성으로 들으면서 넋을 잃고 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젠은 귀염성스러운 뺨을 붉게 물들이면서 손을 내밀었다. "마을의 성인 교양 센터에서 프랑스 어와 독일 어를 가르치신 덴톤 선생님이 아니세요? 이전에 저희 아버님도 선생님한테 강의를 받으셨다고 여겨집니다만…" 아직도 멍하니 젠의 손을 꼭 쥐고 있던 니콜은 당황하여 손을 떼고 고개를 끄덕였다. 젠의 뒤에 무표정한 에이드리언의 얼굴이 나타났다. "로잘리, 커피를 타 주겠니? 이 두 사람에게는 방금 한 이야기를 계속하도록 하고, 나는 서재에 있겠다." 아버지가 말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이미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헤일우드 씨라고 하면, 검은 머리에 약간 몸집이 작고 안경을 쓴 분입니까?" "바로 그래요. 여기에서 선생님을 만나뵈었다고 하면 아버지는 깜짝 놀라실 것입니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합시다. 아버님께서는 요즘 어떻게 소일하고 계십니까?" 말없이 두 사람을 응시하는 에이드리언에게 로잘리는 짖궂게 웃어 보이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에이드리언도 뒤따라 들어와서 커피 준비를 돕겠다고 말했다. "그것보다 여자 친구 곁에 있어 주는 게 어때요?" "지금은 내가 나설 차례가 아닌걸― 당신과 마찬가지로." 에이드리언은 제멋대로 커피 잔을 집어내어 쟁반 위에 늘어놓았다. 오기를 부려서라도 그를 무시하리라고 생각했던 로잘리의 결심은 일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무너지고 말았다. "저어, 에이드리언?" 대답이 없었다. "에이드리언, 제 이야기 들어보실래요?" "당신이 말하는 것을 막지는 않겠지만, 듣고 안 듣고는 내 자유요." "제가 메이슨 씨와 교제하는 것은 그의 딸 때문이에요.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가엾은 그애의 기분을 저는 잘 알고 있어요." "당신이, 훌륭한 양친을 모신 당신이 무엇을 알 수 있단 말이오? 허튼소리 좀 작작하시지!" 그의 노기등등한 말에 로잘리는 기가 질리고 말았다. "이번에는 내가 말할 차례요. 당신에게는 자기 행동을 하나하나 나에게 설명할 의무 따위는 전혀 없소. 당신이 누구와 무슨 짓을 하건 나와는 무관하며, 또한 관심도 없어. 앞으로 우리 인생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두 줄의 평행선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 주기 바래. 알았소?" 노여움은 로잘리에게도 전염됐다. "그것은 제가 할 말이에요. 불행한 어린애에게 손을 내밀었다는 것만으로 끝나는 우정이라면, 그건 우정이란 이름에 합당하지 않아요. 그런 친구가 무슨 말라빠진 친구란 말예요?" 내팽개치듯이 로잘리는 말했으나,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상대방의 얼굴을 보는 순간 맑은 눈동자에서 눈물이 주르륵 쏟아졌다. "전 양심에 부끄러운 일 따위는 하나도 하지 않았어요. 진실을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비난만 하다니 너무해요. 당신 우정 따위는 제 쪽에서 거절하겠어요!"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은 당신 쪽이야. 웰리스 메이슨은 일단 눈에 든 여자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내요. 제 딸을 미끼로 하여 당신을 꾀어내다니 그 작자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 냈군. 당신은 미끼에 걸려 스스로 함정에 빠져들어가고 있어. 그것은 당신이 선택한 길이니까, 나중에 어떻게 되든 나에게는 상관이 없는 일이지만. 그건 그렇고, 이제 커피 준비는 끝난 것 같군." 에이드리언은 냉정한 말투로 다시 덧붙였다. "그런 얼굴로는 남 앞에 나가지 못하겠는걸. 서재와 거실에는 내가 커피를 나를 테니, 당신은 방에 가서 얼굴을 매만지고 오도록 해요." 얼굴을 씻고 입술 연지를 다시 칠한 다음 로잘리가 아래로 내려가니, 젠과 니콜은 아주 친숙해진 듯 허물없이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에이드리언은 안락의자에 앉아서 마치 쇼라도 보고 있는 듯한 얼굴로 두 사람의 친밀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잘리는 일부러 니콜 곁에 앉았다. 그는 젠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수첩에 적고 있는 중이었다. "아버님께서 언어 문제로 그렇게 난처해 하신다면 기꺼이 공부를 봐드리겠습니다. 며칠 안으로 전화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아버지는 사업상 해외에 나가시는 기회가 많으신데, 통역을 통할 경우에는 될 일도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늘 불평을 하시거든요." 젠이 날씬한 다리를 포개며 이번에는 로잘리에게 말머리를 돌렸다. "오늘 학기말의 댄스 파티 일정이 발표됐지요. 참석할 거예요?" "당신은?" 에이드리언이 몸을 내밀었다. "내가 모시고 가지. 나는 춤은 전혀 못 추지만, 그래도 이 아가씨가 좋다고 하니까." "물론입니다. 이렇게 멋진 남자분이 에스코트해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영광인걸요." 니콜이 로잘리의 손을 잡았다. "나는 당신 청을 받을 수 없을까?" "내가 다른 사람에게 청할 까닭이 없잖아요?" 니콜은 로잘리의 손을 가볍게 토닥거리며 에이드리언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댄스를 못 추신다니 안 됐군요. 로잘리의 춤솜씨는 천하일품인데." 에이드리언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보라는 듯이 로잘리가 니콜에게 바싹 다가앉자, 에이드리언이 갑자기 일어서며 말했다. "젠, 슬슬 서재로 돌아가야지?" "어머, 나 좀 봐, 일을 깜빡 잊고 수다를 떨고 있다니. 미안해요, 에이드리언. 그럼 이만 실례합니다, 덴톤 씨.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니콜은 일어서서 손을 내밀었다. "또, 뵐 수 있겠지요, 미스 헤일우드?" 젠이 대답하기도 전에 에이드리언은 재빨리 그녀를 서재로 데리고 가버렸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도 로잘리는 주위의 노골적인 시선을 받으면서 웰리스와 점심을 같이 했고, 그의 집에도 줄곧 드나들었다. 멜라니하고는 대단히 좋은 사이가 됐으나, 멜라니가 자기를 따르면 따를수록 로잘리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듯한 불안을 느꼈다. 웰리스의 태도는 더욱더 노골적이 됐고, 로잘리는 그에 대한 혐오감과 멜라니에 대한 애정의 틈바구니에 끼여서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에이드리언과의 관계는 그 이상 더 악화될 수 없는 막다른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그는 로잘리와 우연히 지나칠 때면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보듯이 얼굴을 돌렸다. 로잘리의 가슴은 송곳에 찔린 듯이 아팠으며, 그녀는 그럴 때마다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다고 처음부터 떠벌린 남자를 사랑한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스스로를 꾸짖었다. 어느 날, 점심때가 될 때까지 잡담이라도 하면서 보낼까 하고 메리온의 방으로 갔더니, 무엇이 로잘리의 가슴속으로 뛰어들어왔다. "멜라니! 어찌 된 일이야?" "감기에 걸려 이틀 동안 학교를 쉬고 있대요." 쓴웃음을 지으면서 메리온이 말했다. "얌전히 누워 있은 상으로 여기까지 데리고 온 모양인데, 어찌나 부끄럼을 잘 타는지 난 지치고 말았어요.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방 모퉁이에 웅크리고 앉아서 좀처럼 나오려 하지 않지 뭐야." 수업을 끝내고 돌아온 웰리스는 로잘리에게 매달려 있는 딸을 보고 싱글거리면서 좋아했다. 메리온이 멋쩍은 듯이 시선을 돌렸으므로, 로잘리는 가장 친한 친구에게까지도 오해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가슴이 아팠다. 멜라니는 아버지와 로잘리의 손을 잡고 복도를 깡총깡총 뛰면서 교직원 식당으로 향했다. 그러나 식당에 들어가 많은 어른들이 쳐다보자 갑자기 겁에 질린 듯이 눈을 꼭 감았다. 로잘리도 같은 기분이었다. 놀라움과 비난하는 시선을 전신에 느끼면서 로잘리는 식사를 했으나, 그런 가운데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에이드리언이 경멸에 찬 눈으로 흘낏 봤을 뿐, 두번 다시 돌아보지 않는 일이었다. 그날 오후 로잘리는 강의가 없는 시간을 이용해서 멜라니에게 학교 안을 구경시켜 줬다. 유리창 너머로 교실 안을 들여다본 소녀는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저렇게 큰 사람들도 아직 공부를 하는가요?" "그래. 저 가운데는 아빠나 엄마도 있어요." "으응… 그렇구나. 로잘리 아줌마 아빠의 빙글빙글 도는 의자는 어디에 있어요?" 스스로 보고 싶다고 해놓고도, 멜라니는 정작 방 앞까지 오니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로잘리는 웃으면서 소녀를 다그쳐 문을 열다가 안에 아버지와 에이드리언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이번에는 자기가 꽁무니를 빼며, '미안합니다' 하면서 문을 닫으려고 했다. "괜찮아요, 들어와." 아버지가 불러세웠다. "멜라니가 오고 싶다고 해서…" 로잘리가 에이드리언의 시선을 피하면서 말하자, 소녀는 가만히 그녀의 손을 끌어당기면서 속삭였다. "저 사람이 로잘리 아줌마의 아빠야?" "그렇단다, 아가씨." 아버지는 명랑하게 대답하면서 엄숙한 표정으로 소녀와 악수를 교환했다. "이름은?" "멜라니." 소녀는 모깃소리 같은 가냘픈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멜라니, 이리로 와서 아저씨 책상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렴." 아버지는 서랍에서 프루츠 캔디를 집어냈다. "귀여운 손님을 위해 간수해 뒀단다." 로잘리는 마음속으로 아버지에게 감사했다. 멜라니는 캔디를 먹으면서 에이드리언을 훔쳐봤다. "로잘리 아줌마, 저 사람은 아줌마 오빠예요?" 뜻밖에도 에이드리언은 즐거운 듯이 웃었을 뿐이었다. 로잘리는 급히 화제를 바꾸었다. "멜라니, 이것이 우리 아빠의 의자야." 소녀는 짐짓 대단한 것을 보는 표정으로 회전의자를 살피며 돌려 봤다. "우리 아빠 의자와 똑같네요. 이 의자도 빙글빙글 돌아요?" "돌고말고, 시험해 보렴." 아버지는 멜라니를 안아서 의자에 앉히고는 등받이를 밀었다. 환성을 지르는 천진난만한 소녀의 모습에 에이드리언도 얼굴을 누그러뜨리며 웃었다. 로잘리는 살짝 옆방으로 갔다. "젠, 니콜은 당신과의 약속을 지켰어요?" "네, 때때로 집에 와서 아버지를 가르쳐 주고 있어요. 그분한테 듣지 못했어요? 그렇다면 제가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였는지도…" "걱정 말아요. 나는 아무렇게도 생각하지 않아요." 사실 로잘리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평온했다. 그때 옆방에서 어린이의 비명이 들려왔다. "로잘리 아줌마가 없어졌어! 어디 있어?" 아버지가 열심히 달래고 있었다. "로잘리는 틀림없이 저기 있단다. 얘야, 그 문을 열어보렴." 문이 삐꺽 하며 열리더니, 불안으로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진 소녀가 로잘리의 가슴에 뛰어들어왔다. 에이드리언의 날카로운 시선을 의식하면서 로잘리는 소녀를 꼭 안았다. "나는 아무 데도 가지 않아요. 너를 버려 둔 채 그대로 가지 않는다니까." 눈물에 젖은 멜라니의 얼굴에 뺨을 비벼대며, 로잘리는 호소하듯이 에이드리언을 쳐다봤다. 그러자 그는 무엇엔가 놀란 듯이 세차게 숨을 몰아쉬며 갑자기 등을 돌렸다. 웃음을 되찾은 멜라니의 손을 이끌고 로잘리는 아버지 앞에 섰다. "전 다음 시간에 강의가 있어서 이만 돌아가야겠어요. 멜라니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아빠." 교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문으로 마음이 상했을 아버지에게 로잘리는 진심으로 말했다. 그러나 에이드리언은 끝내 한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며칠 후, 로잘리는 아무도 없는 직원실에서 독서에 몰두해 있는 에이드리언에게 과감하게 말을 걸었다. "잠깐 실례해도 괜찮을까요?" "무슨 용문데?" 얼굴을 들지도 않은 채, 에이드리언은 귀찮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탁이 있어요." 상대에게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로잘리는 빠른 말로 계속했다. "l4번 교실의 비디오가 고장이 났는데, 조사해 주실 수 있을까요? 최근에 비디오를 강의에 채택해서 쓰고 있는데, 곤란해서…" "나를 찾아온 것은 번지수가 틀렸소. 전기학과의 동료에게 부탁할 일이야." "아까 갔다왔어요. 그러나 공교롭게도 모두 바빠서 당분간 봐줄 수 없다고 하는군요." 실망감에 가득찬 그녀의 가냘픈 목소리를 듣고서야 에이드리언은 얼굴을 들었다. 그는 푸접없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렇다면 구매과에 말해서 수리공을 부르면 되지 뭐. 어쨌든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잖소." 로잘리는 무표정한 에이드리언의 얼굴을 응시했다. 거절당할 줄은 미리 각오하고 있었으나, 그는 오늘 어딘지 모르게 좀 이상했다. 얼굴에도 목소리에도 활기가 없는 것같이 보였다. "에이드리언, 어디가 편찮은 거 아닌가요? 어쩐지 안색이 나쁜 것 같아요." "목이 약간 아픈데, 감기라도 걸린 게지." 어떻든간에 걱정 따위는 받고 싶지 않다는 그런 얼굴로 말했다. 다른 강사들이 우르르 직원실로 들어왔으므로, 로잘리는 잰걸음으로 그곳을 떠났다. 다음날 로잘리는 강의 노트를 넣은 서류 가방을 들고 14번 교실로 들어갔다. 학생들은 휴게 시간 동안에 책상과 의자를 교실의 한모퉁이에 정리해 놓고 마루에 앉아서 수업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개중에는 가지고 온 방석이나 신문지를 깔고 앉아 있는 학생도 있었다. 로잘리도 서류 가방에서 공기 베개를 끄집어냈다. 그러자 한 학생이 즉시 앞으로 나와서 공기를 충분히 불어넣어 주었다. "아이, 고마와라. 그러나 이렇게 부풀게 했다가는 앉는 순간에 터져 버리면 어떻게 하지요?"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잠잠해지자, 로잘리는 말을 계속했다. "이런 식의 강의 스타일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해요? 단정하게 책상에 앉아서 수업을 받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양 말고 말해 보세요." 학생들은 저마다 지금 이대로가 좋다고 말했다. "알았습니다. 그럼 당분간은 이런 식으로 계속합시다. 그러나 이러는 동안에 학장님이 강의실을 들여다보시고 몹시 화를 내고, 부당하다고…" 문이 열리는 소리에 로잘리는 깜짝 놀라 파랗게 질렸다. 들어온 사람은 에이드리언이었다. 학생들은 교실이 떠나갈 듯이 웃어댔다.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이게 웬일이냐고 묻는 에이드리언에게 한 학생이 일어서서 대답했다. "이런 수업 광경을 학장님이 보시면 야단을 맞을는지 모른다고 걱정하는 중이었거든요. 그래서 모두 틀림없이 학장님이 들어오시는 줄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저런! 제군들의 선생님은 의자를 어버이의 원수처럼 여기고 계시는 모양이지?" 혼자말처럼 에이드리언이 중얼거리자, 교실 안에는 또다시 웃음의 소용돌이가 퍼져갔다. 로잘리가 학생들을 제지해서 겨우 조용해졌을 때, 에이드리언은 말을 시작했다. "미스 팔람, 고장났다던 비디오는?" "바쁘실 텐데, 감사합니다. 클레이포드 박사님, 이쪽으로 오십시오." 로잘리는 그를 비디오 앞으로 안내하여 고장 상태를 설명하고 나서, 자기는 수업하러 되돌아왔다. "오늘은 <현대 사회에서 텔레비전의 역할>이란 테마로 토론하고자 합니다. 우선 문제 제기의 의미에서 나부터 한마디…" 로잘리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나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는 최근, 우연히도 텔레비전의 존재를 재평가하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실은 내 방에 있는 텔레비전이 며칠 전에 고장이 나서 못 쓰게 됐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텔레비전은 본래대로 아주 선명하게 됐습니다. 내가 가장 존경하고 신뢰하는 어떤 친구가 수리해 준 것입니다." 아주 조용해진 교실 모퉁이에서 딸그락 하는 소리가 나자 로잘리를 제외한 모든 학생의 시선이 그리로 집중됐다. 에이드리언은 마루에 떨어뜨린 드라이버를 주워 들고 묵묵히 작업을 계속했다. "텔레비전이 고장났을 때, 나는 내 방이 갑자기 좁아진 것 같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거기서 나는 깨달았습니다. 텔레비전은 우리에게 창문과 같은 것이 아닐까요? 바야흐로 텔레비전은 인간 생활에 깊이 침투하고 있습니다. 텔레비전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은 이 지구상에는 이제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생활 실태마저 우리는 텔레비전에 의해 이 눈으로 똑똑히 볼 수가 있습니다. 즉 텔레비전은 끝없는 지식이나 생각의 깊이를 가진 창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고백합니다만, 나 자신도 지금까지는 막연히 텔레비전을 보아오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여러분과 서로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고 잘잘못도 포함하여 텔레비전의 의의 및 역할에 대한 이해를 깊게 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친숙해질 수 있는 테마인지라 학생들의 토론에는 한층 더 열기가 났다. 로잘리는 활발하게 오가는 의견의 틈틈이에 자기의 감상이나 생각을 적당히 섞으면서 의론이 본론에서 너무 비약하지 않도록 교묘히 학생들을 유도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에이드리언의 존제가 머리를 떠나지는 않았다. 빨리 나가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언제까지라도 있어 줬으면 좋겠다는 이율배반적인 생각이 로잘리의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엇갈리고 있었다. 수업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드라이버를 손에 들고 에이드리언이 다가왔다. 몇 주만에 부드럽게 웃는 그의 얼굴을 대하자, 로잘리의 가슴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토론을 중단시켜 미안하지만, 미스 팔람, 고장의 원인을 알았습니다." 에이드리언이 로잘리를 기계 앞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자 한 학생이 벌떡 일어섰다. "저도 거기서 설명을 들으면 안 될까요? 저는 전기학과 학생이라서 비디오에 관해 상세하게 알고 싶던 참입니다. 부탁입니다." "그럼 저도요." "저도 꼭." 이런 요청이 여기저기서 나오며, 에이드리언은 순식간에 남녀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버렸다. 그는 미안한 듯이 말했다. "괜찮겠습니까, 미스 팔람?" "그렇게 해주세요. 이것도 넓은 뜻에서는 텔레비전에 관한 연구의 일부가 아니겠어요." 로잘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뒤에서 묵묵히 에이드리언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었다. 기술적인 전문 용어가 많아서 내용은 잘 알 수 없었으나, 학생들이 그의 이야기에 완전히 끌려들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설명을 끝낸 에이드리언이 웃으며 말했다. "내 과목의 수업 때에도 여러분이 지금처럼 정신을 차리고 들어주면 여러분의 수학 성적은 훨씬 올라갈 것이라고 믿네. 그러면 벌써 휴식 시간도 됐고 해서, 나는 이쯤에서 물러나기로 하지. 어물어물하고 있다가는 수업 방해의 이유로 미스 팔람이 저 공기 베개로 나를 냅다 칠 것 같아서." 학생들은 쾌활하게 웃으면서 다음 교실로 몰려가 버렸다. 로잘리에게 다가간 에이드리언은 이젠 간단한 손질로 수리될 수 있으므로 전기학과의 친구에게 말해 놓겠다는 약속을 하고 떠나려고 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클레이포드 박사님." 이렇게 말한 로잘리는 사방을 둘러보고 이미 학생들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작은 소리로 불러세웠다. "에이드리언, 잠깐만…" "또 뭐요?" "아직도 안색이 좋지 않아요, 목 상태는 어떤가요?" 에이드리언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남의 일에 굉장히 관심을 갖는구먼. 기분이 좋잖은 것은 사실이오. 목의 통증이 도리어 심해지고 열도 있어." "병원에 가지 않아도 괜찮아요?" "여자들은 걸핏하면 병원이다, 의사다 하고 떠들어대서 골치라니까. 내일부터 휴가잖소. 우리 집에 돌아가면 어머님이 싫증나도록 간병해 주실텐데 뭘." 에이드리언은 뚜벅뚜벅 걸어가더니 문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그러나 걱정해 줘서 고마와. 당신 마음만은 받아 두겠어요, 로잘리." 그날을 마지막으로 대학은 일주일 동안의 학기 중간 휴가에 들어갔다. 로잘리의 양친은 오후에 부랴부랴 스코틀랜드로 여행을 떠났으며, 금요일 밤 마을의 수런거림을 외면한 채 로잘리는 홀로 쓸쓸히 집에 남아 있었다. 메리온과 여행을 떠날 일요일 아침까지는 별다른 계획도 없었다. 웰리스는 멜라니를 할머니 집으로 데리고 떠났다. 니콜에게서는 여행의 무사를 비는 전화는 있었으나 데이트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 일로 다소 자존심이 상했으나 새삼스레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로잘리를 괴롭히는 것은 앞으로 열흘 가까이 에이드리언의 얼굴을 못 보는 것이었다. 이튿날, 로잘리가 아침을 간단히 끝냈을 무렵에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에서는 어디선가 들은 듯한 여성의 목소리가 울렸다. "갑자기 실례합니다마는 대학에 강의를 나가시는 댁의 아가씨가 지금 계실까요?" "네, 제가 로잘리 팔람입니다만." "어머, 잘됐어요! 여보세요, 나는 피루즈입니다. 클레이포드 선생님 하숙집의. 생각나시죠?" "물론입니다, 피루즈 부인." "고맙수. 바로 말씀드리는데요, 선생님의 병을 보러 왕진 온 의사가 그러는데, 감기가 악화돼서 폐렴으로 됐다지 뭐예요. 꼬박 붙어서 간병을 해드리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집일도 있고 해서, 그래서 부끄럼을 무릅쓰고 아가씨에게 부탁을 했으면 하고…" "잘 알려 주셨습니다, 피루즈 부인. 얼른 준비하겠습니다만… 저, 이 전화를 그이도 알고 계시는가요?" "아뇨, 본인은 간호 따위는 필요없다고 버티고 있습니다만, 나는 어쩐지 걱정이 돼서…" "잘 알겠습니다. 곧 찾아뵙겠어요." 전화를 끊자마자, 로잘리는 다이얼을 돌려 메리온에게 내일 떠날 여행을 못 가게 된 사정을 설명했다. 메리온은 꽤 불만스러운 것 같았다. "꼭 당신이 거기 가야 돼요?" "네… 그래요. 아버지가 참고서를 저작하시는 데 도움을 받는 사람이잖아요? 모르는 체하고 여행을 떠난 일을 알게 되면, 나중에 아버지께 꾸중을 들을 것 같아요." 괴로운 변명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메리온은 이해했으며, 자기도 계획을 바꾸어 친척 집으로 가겠으니 다음 기회에는 꼭 둘이서 여행을 하자고 했다. 피루즈 부인의 얼굴을 보자, 로잘리는 걱정한 일을 맨 먼저 말했다. "제가 오는 것을 에이드리언에게 벌써 알렸나요?" "안 알렸다우. 조금 전에 갔을 때에는 잘 주무시고 계십디다. 무엇이든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이야기해요. 집에 없는 것이라면, 남편더러 사오도록 할 테니." 로잘리는 감사하다고 말한 다음 이층으로 올라가서 가만히 침실로 들어갔다. 에이드리언은 자고 있었으나, 무슨 소리가 나자 실눈을 뜨다가, 다음에는 커다랗게 눈을 떴다. 그의 얼굴은 로잘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수척해져 있었다. "로잘리… 뭣하러?" 그의 목소리는 쉬었고 힘도 없었다. "간호하러 왔어요." "간호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 돌아가요." "병이 나으면 돌아가겠어요." "아니야, 지금 곧 돌아가. 당신이 있으면 도리어 귀참…" 에이드리언은 갑자기 심한 기침이 나서 뒷말을 계속할 수가 없게 됐다. 기침은 오래 계속되었으며, 겨우 그쳤을 때는 녹초가 되고 말았다. 로잘리는 침대에 쪼그리고 앉아, 부드럽게 환자의 손을 잡았다. "무슨 말이든 좀 해보세요." 에이드리언이 힘없이 머리를 저었다. "여기는 어떻게?" "피루즈 부인에게서 전화를 받았어요. 무엇이든 먹고 싶은 것은? 하다못해 마실 것이라도…" 상대가 대답 대신 몸을 뒤치고 벽 쪽으로 돌아눕자, 로잘리는 발소리를 죽여가며 거실로 되돌아와서 가지고 온 짐꾸러미 속에서 앞치마를 꺼내어 주방으로 갔다. 차마 눈을 뜨고는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더러워진 식기와 먹다 남은 빵조각, 쓰고 난 그대로의 냄비와 찻주전자가 개수대와 조리대뿐 아니라 마루에까지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로잘리는 앞치마 끈을 졸라매고는 팔을 걷어불이고 일을 시작했다. 거의 정오가 됐을 무렵에야 산더미같이 쌓였던 것들이 겨우 사라졌다. 가만히 침실을 들여다보니 환자는 눈을 뜨고는 있었으나, 녹초가 된 채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귀찮은 듯이 보였다. "우유 정도라면 마실 수 있겠죠?" "당신 맘대로 해." "그럼 알아서 가지고 오겠어요. 찬 것, 그렇지 않으면 따뜻한 것?" "찬 것은 싫어." 로잘리는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가지고 침대 곁으로 돌아와서 에이드리언을 부축해서 일으켰다. 환자는 말없이 컵을 받아 들고 의사가 처방한 약을 우유와 함께 마셨다. "기분은 어때요?" "좋을 리가 있겠소." 에이드리언은 빈 컵을 돌려 주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로잘리의 존재를 쫓아내듯이 눈을 꼭 감았다. 로잘리는 환자의 곁을 떠나 거실 청소를 시작했다. 거기도 상당히 너저분했다. 마루에는 어제 에이드리언이 입었던 옷이 팽개쳐 있었다. 찌부듯한 나머지 옷도 갈아입는 둥 마는 둥 하고 침대에 쓰러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니, 옷을 주워드는 로잘리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대충 청소를 끝낸 로잘리는 거실 의자에 앉아서 테이블 위에 있는 노트를 펼쳐 보았다. 자잘한 숫자가 빈틈없이 씌어져 있었다. 사랑하는 남자와의 사이에 끝없는 거리감을 느끼며, 그녀는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창문 밑에서는 어린이들 몇이 즐겁게 놀고 있었다. 로잘리는 어머니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불쌍한 멜라니를 생각하고, 맺어지지 못할 사랑인 줄 알면서 에이드리언을 연모하는 자기 신세를 생각하고, 그리고 병석에 누워 있는 그의 처지를 생각했다. 심하게 쿨룩거리는 소리가 났으므로 로잘리는 급히 침실로 들어가 앞뒤 생각없이 환자의 몸에 팔을 감고 등을 꼭 안아 부축했다. 에이드리언은 겨우 안심이 되는 듯 그녀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그의 괴로운 숨소리가 겨우 진정되자, 로잘리는 환자를 침대에 눕혔다. "폐를 끼치는군." 에이드리언이 중얼거렸다. "조금이라도 당신에게 도움이 된다면 전 기뻐요, 달링." 그렇게 말해 버리고 나서, 로잘리는 깜짝 놀라 급히 손으로 자기 입을 막아 버렸다. 환자는 가냘픈 미소를 띠었다. "간호원님, 당신은 남자 환자를 이 사람 저 사람 할것없이 모두 '달링'이라고 부르는 버릇이 있는 것 같군?" "아니예요, 특별한 환자인 경우에만요!" "그럼 나는 특별인가요, 간호원님?" "그럼요, 특별 중의 특별이죠." 로잘리는 가만히 속삭이고는 조용히 침대 곁을 떠났다. 거실의 양탄자에 비쳐 드는 석양을 보며, 로잘리는 자기가 아침밥을 먹은 뒤로는 아무것도 먹지 못한 것을 알았다. 주방에 있는 것을 먹어도 괜찮을까? 침실을 엿보니, 환자는 아까 한 기침 때문인지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로잘리는 베갯머리에 서서 사랑하는 남자의 잠든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볼에서 턱에 걸쳐 다박나룻이 엷게 나 있었다. 그의 입술을 보는 순간 단 한 번 한 키스의 추억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로잘리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면서 주방으로 나와 요리를 했다. 쓴 재료는 나중에 보충해 놓으면 그만이다. 혼자서 저녁을 끝내고, 잠을 깬 환자에게도 조금 먹인 후 로잘리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저어, 피루즈 부인, 제가 오늘 밤 이층에서 머무르면 안 될까요?" "우리야 조금도 상관없지만, 댁에서 걱정하시지나 않겠수?" "양친께서는 함께 먼 곳에 여행을 떠났어요." "그러시다면 제발 머무르세요. 만일 밤중에 환자가 괴로와하셔도 여기까지는 들리지 않으므로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 하고 생각하는 중이었다우. 우리 집에 있는 간이 침대를 남편더러 옮기도록 할까요?" "거실 소파에서 잘 테니까 아무 걱정 마세요. 그리고 침구도 여분의 것을 쓰겠습니다만, 단지…" "잠옷 말이우? 곧 가지고 오겠수. 젊은 분 취향에 맞지는 않아도, 신혼여행은 아니니까 괜찮겠지!" 로잘리는 얼굴을 붉히면서 계단을 올라갔다. 환자를 도와 일으켜서 욕실로 데려다 준 뒤 침실로 되돌아온 그녀는 옷장에서 시트와 모포를 끄집어내어 거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밀어넣어 두었다. 침대로 되돌아온 에이드리언이 시계를 보며 말했다. "이젠 돌아가시지. 내일은 오지 않아도 괜찮소." 로잘리는 말없이 웃으며 환자가 잠드는 것을 확인하고는 침실을 나왔다. 에이드리언은 다행히 괴로와하지도 않고 깊이 잠들었다. 그러더니 이튿날 정오가 다 됐을 무렵에야 잠을 깼다. 머리맡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로잘리의 얼굴을 본 그는 언짢은 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오지 말라고 했잖소." "어머, 언제요? 제가 못 들었나 봐요. 미안합니다." "그럼 한번 더 말하지 돌아가요." "네 네, 돌아가고말고요. 병이 나으면 말이죠." 에이드리언은 낮은 소리로 투덜거렸다. 같은 상황이 이튿날 아침에도 되풀이됐다. 로잘리는 웃으며 말했다. "마치 제가 있는 것이 싫다는 듯이 들려요." "그렇고말고, 당신이 있는 것이 싫소. 정말이라니까."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로잘리는 또 쾌활하게 웃었다. 그날 환자가 잠든 사이에 그녀는 얼마 남지 않은 식료품을 보충하기 위해 물건을 사러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피루즈 부인에게 들렀더니, 방금 의사가 왕진왔다 돌아갔다고 말했다. "의사는 무어라고 말씀하시던가요?" "경과가 매우 순조롭다고 했어요. 아가씨의 간호 덕택이래요." "하지만 환자가 좀처럼 제 말을 듣지 않아서 애를 먹는다구요." "남자란 다 그렇다우. 가정을 꾸려 보면 신물이 나도록 알게 될 거예요." 침대 위에 일어나 있던 에이드리언은 로잘리를 보자마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가지 않았군. 누구 이 귀찮은 파리를 어디라도 좋으니 내쫓아 줄 수 없을까." "아무쪼록 빨리 나아서 손수 파리채를 휘둘러 보시죠. 그건 그렇고, 뭘 드시겠어요?" 에이드리언의 눈동자에 오래간만에 날카로운 빛이 번득였다. 화를 낼 정도의 힘이 생긴 것으로 봐서 확실히 몸은 순조롭게 회복되고 있는 것 같았다. "현재로는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소." "그럼 기분전환을 위해 뭘 좀 읽으시겠어요? 신문이나 잡지, 아니면 머리가 녹슬지 않게 수학 교과서라도 가져올까요?" "정말 어쩔 수 없는 아가씨군." 그러면서도 에이드리언의 얼굴은 약간 희색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기분이 좋았던 것은 낮 동안뿐이었다. "상태가 지나치게 좋은 것 같더니." 오래도록 콜록거리고 난 뒤 침대로 기어들어가면서, 환자는 울화가 치민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밤새 자고도 증상이 별로 나아지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 탓인지, 이튿날 아침에 일어난 에이드리언은 비위가 몹시 상한 것 같았다. "교통비도 꽤나 낭비하면서 날마다 수고하는군." "멀지 않아 교통비 청구서를 드리겠어요. 금액을 보고 졸도하지나 마세요." 웃기려고 한 로잘리의 겨냥은 빗나갔다. 상대는 전혀 웃지도 않았다. "오늘은 일어날 작정이니, 이젠 돌아가도 괜찮소." "일어나다니, 아직 무리예요." "당신이 있으면 나을 병도 낫지 않아. 자, 돌아가요. 이만큼 말했으면 아무리 당신이라도 알아들었겠지?" 로잘리는 나오려는 눈물을 애써 억눌렀다. "인간에겐 누구나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는 거예요." 상대는 지겹다는 듯이 눈을 감았다. "유감스럽게도 그대로야." "아침식사 무엇으로 하시겠어요? 오늘 아침은 달걀로 할까요?" "무엇이라도 좋으니 만들어 줘요. 당신이 주방에 가 있는 동안이라도 그 얼굴을 안 보게 될 테니." 로잘리는 울상을 짓는 자신을 꾸짖었다. 입이 험한 것은 원기를 되찾았다는 무엇보다도 좋은 증거이기 때문에 도리어 기뻐할 일인 것이다. 토스트와 삶은 계란을 갖다 놓고 돌아나오려고 하자, 에이드리언이 말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거요?" "죄송해요. 아침 먹으러 주방에 가는걸요." "집에서 먹지 않고 왔소?" "네?… 아아, 부랴부랴 나오느라구요." 그날 온종일 로잘리는 보통때보다 더욱더 까다롭게 된 환자한테 숨돌릴 틈도 없을 정도로 혹사를 당했다. 밤이 깊어서야 겨우 해방되어 침실의 불을 끄고 문을 닫으려고 하자, 에이드리언이 침대 속에서 말했다. "제발 오늘로 끝내요. 내일은 절대로 오지 말 것. 알았소?" 로잘리는 '편히 쉬세요'라고만 말하고 문을 닫았다. 피로와 함께 환자가 꽤 나았다는 안도감으로 그날 밤은 깊이 잠들었다. 눈을 뜨고 보니 벌써 아침이었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욕실에서 나온 로잘리는 문득 귀를 기울였다. 침실에서 발소리가 났다. 에이드리언이 벌써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된 것일까? 로잘리는 가만히 침실 문을 열었다. 6 가운만 걸치고 걷고 있던 에이드리언이 막대 모양으로 곧추섰다. "이렇게 빨리, 어찌 된 일이오?" "저어, 저는…" "오지 말라고 그만큼 다짐을 했는데." 로잘리는 이 이상 거짓말을 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에이드리언, 실은 저는 지금까지 줄곧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어요. 여기 머물러 있었어요." "지금, 뭐라고 말했소? 어디서 자고 있었다고?" "거실의 소파에서, 중환자를 홀로 두고 가고 싶지 않았거든요." "누가 중환자야! 나는 이처럼 혼자서 걸을 수도 있는데." "지금은 그렇죠. 당신은 자기가 얼마나 중병이었는지 모르고 있어요." 그는 성난 얼굴에 냉소를 띠었다. "내가 오해했군. 당신은 남자 집에 머무르는 데는 아주 익숙해진 것 같군. 웰리스 메이슨이 충분히 증언해 줄 테지." 로잘리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을 보고도, 에이드리언은 아직 할 말을 다 못한 것 같았다. "이것으로 당신 평판은 또 떨어지게 됐군." "저의 평판이라면 이 이상 더 떨어질래야 떨어질 것도 없어요. 당신이 걱정하는 것은 자기 평판이죠? 아무 걱정 마세요. 죄다 제가 제멋대로 한 일이라고 말하겠어요. 그러나 누구에게 말하러 가야 되나요?" "우선 아래층 부부에게…" "제가 그분들의 부탁을 받고 머물렀는데도…?" "이젠 됐소. 알았어. 어쨌든 나는 이처럼 건강하게 됐으니 당신은 돌아가요." "하지만 아침을 아직 들지 않았고, 청소도 하지 않았어요." "가라고 하잖소. 쫓겨나고 싶어? 당신은 자존심이란 것도 없소?" "있어요. 그러나 그보다도 동정심 쪽이 더 강해요." 에이드리언이 성큼성큼 로잘리에게 걸어왔다. "알겠소? 나는 남자요. 남자의 침실에 당신 같은 지나치게 매력적인 아가씨가 있다간 어떻게 된다고 생각해?" 그는 로잘리의 턱을 왁살스럽게 치켜올렸다. "바로 지금 나가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나는 모른단 말이오." 그래도 로잘리는 꼼짝하지 않았다. 이렇게 창백하고 눈도 퀭하게 들어간 에이드리언을 남겨 놓고 떠날 수는 없었다. 눈깜빡할 사이도 없이 로잘리는 난폭하게 입술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키스를 중지하고 로잘리의 머리에 뺨을 밀어붙였다. "미안하오, 로잘리, 미안해…" 두 사람은 그대로 오랫동안 부둥켜안고 서 있었다. 이윽고 로잘리는 환자를 침대로 데리고 가서 앉혔다. 에이드리언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역시, 제가 나가는 것이 좋겠지요?" "아암." 꼼짝도 하지 않고 그는 중얼거렸다. 로잘리는 짐을 챙겨 가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전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피루즈 부인. 그이가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이미 나았으므로… 돌아가 달라고…" 갑자기 눈물이 복받쳐 목이 메었다. "못 있게 하는 거예요… 아무리 해도…" "우선 안으로 들어와 앉으세요. 선생님은 아가씨를 믿고 마구잡이로 화풀이를 하고 있을 뿐이라우.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닐 거예요. 암, 그렇고말고." "병은 아직 낫지 않았어요. 누군가 옆에 붙어 있어야 하는데…" 주방의 의자 위에서 로잘리는 흐느꼈다. "그렇다면 선생님의 모친께 부탁하는 것이 어떨까요? 분명히, 전화번호를 수첩에…" 피루즈 부인은 탁상시계의 뒤쪽을 손으로 더듬어 찾았다. "보세요, 있어요. 금요일 밤에 선생님의 부탁을 받고 그쪽으로 못 가게 된 사정을 전했다우. 전화는 한 집 너머 이웃집에 있다고 했지. 부탁하면 곧 연락이 된다고 했어요." 로잘리는 메모지에 번호를 적었다. "그이는 오늘 아침은 아직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모친이 오실 때까지 우리가 꼭 돌봐 드릴게요. 아가씨가 얼마나 애썼는가에 대해서는 내가 모친께 반드시 말씀드리죠. 선생님 역시 반드시 후회하시고말고요. 가엾게도 저렇게 수척해지다니… 아가씨야말로 환자처럼 보이는구려." 피루즈 부인에게 거듭거듭 에이드리언의 일을 부탁하고 로잘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클레이포드입니다." 약간 북부 사투리가 섞인 상냥한 목소리에 로잘리의 가슴이 소리를 내며 뛰놀기 시작했다. "갑자기 전화를 해서 죄송합니다. 저는 로잘리 팔람이라고 합니다만… "어머, 미스 팔람! 아가씨에 대한 일은 언제나 아들이 편지에 써서 보내왔어요." "어머나…" 로잘리의 가슴에 따뜻한 그 무엇이 흘렀다. "저어, 오늘 전화를 하는 것은 다름아니라 아드님의 병환 때문입니다. 꽤 무거운 병으로 오늘까지는 제가 줄곧 간호해 드렸어요. 다행히 차도가 있습니다만, 아직 시중드는 사람이 없이는 불안한 상태랍니다." 로잘리는 심호흡을 했다. "제가 계속 간호를 하겠다고 말씀드렸으나 거절당했기에…" "그래서 나더러 교대해 달라고요?" "부탁드려도 될까요? 실은 이것은 저의 일방적인 생각입니다. 환자는 전화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실 것 같아서…" "바로 그렇다우. 참 딱한 녀석이라니까요." 클레이포드 부인은 밝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피루즈 씨 부부도 이 일을 알고 계시는가요?" "네, 이 전화번호도 그분에게 물어봤어요. 침대를 빌려 주시겠다고까지 했는걸요." "알았어요. 지금부터 준비해서 떠나면 오늘 밤 안으로 그쪽에 도착할 수 있겠군. 친절에 대해서는 자식을 대신하여 진심으로 감사해요. 어차피 그 녀석은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 "저는…" 로잘리는 목까지 치밀어오르는 뜨거운 것을 꿀꺽 삼켜 버렸다. "저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얼마나 피로하겠수. 천천히 푹 쉬어요. 정말 고마워요." 얼마 남지 않은 휴가를 로잘리는 불안정한 기분으로 보냈다. 웰리스와의 관계를 오해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전화를 걸 기분도 나지 않고, 멀리서나마 그의 병이 쾌차하기를 빌 수밖에 없는 안타깝기만 한 나날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양친은 딸의 휴가 중에 일어난 일을 듣고 어이없다는 듯이 눈이 휘둥그겠졌다. 월요일이 되자 로잘리는 휴가가 끝난 상쾌함과는 동떨어진 기분으로 자기 일로 되돌아갔다. 예상한 대로 에이드리언은 결근했으며, 최소한 아직 일주일은 더 요양해야 한다는 취지의 의사 진단서만이 아버지에게 제출됐다. 목요일 밤, 전화 옆을 지나가던 로잘리는 때마침 울리는 벨 소리에 발을 멈췄다. 아마 니콜이리라. 휴가는 끝났다고 하는데, 그 후 한번도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으니. "로잘리?" 하마터면 수화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니콜이 아니었다. "나요, 에이드리언이야." "안녕하세요, 에이드리언. 몸은 좀 어때요?" 입술을 적시면서 로잘리는 말했다. "고맙소. 거의 다 나았어. 오늘 밤에, 지금부터 당신 집에 들를까 하는데 괜찮소?" "물론이죠, 에이드리언. 대환영이에요." "그럼 십오 분 후에." 차가 들어오는 소리를 로잘리는 현관을 박차고 뛰어나가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면서 듣고 있었다. 발소리가 다가왔다. 초인종 소리까지 오늘 밤은 유난히도 명랑하게 들렸다. 두 사람은 현관에서 얼굴을 마주한 채 얼이 빠진 듯이 한동안 서 있었다. 이윽고 에이드리언이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한 차례 인사말을 하지 않으면 집안에 들여보내지 않을 작정이오?" "미안해요, 에이드리언. 건강한 얼굴을 보니까 너무나 기쁜 나머지…" 서재에서 어머니가 나왔다. "에이드리언이 아니냐! 프랭클린, 에이드리언이에요!" 양친으로부터 빨리 서재로 가자고 재촉받은 에이드리언은 구원을 청하는 듯이 로잘리를 바라봤다. "그이는 그 전에 저한테 할 이야기가 있대요, 아빠." "이런 멍청한 사람을 보았나. 그럼 이야기가 끝나면 오게나." 양친은 서재로 사라졌다. 로잘리는 그를 방으로 안내하고 의자를 권했다. "정말 원기를 완전히 되찾은 것 같네요. 축하합니다." "모두 당신 덕택이오. 오늘 내가 찾아온 것은…" "인사와 사과? 괜찮아요. 잊어버리세요." 쓸쓸한 미소를 짓는 로잘리의 손을 잡아 에이드리언은 자기 볼에 갖다댔다. "당신을 울게 했다고 피루즈 부인에게 호되게 꾸중을 들었소. 그때 한 폭언에 대한 사과라도 하고 싶소." "정말 괜찮아요." "아냐, 괜찮지 않아요. 차분히 서로 대화해 봅시다." 에이드리언이 일어서서 로잘리의 어깨를 끌어안으려고 했으나,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대화해 봐도 소용없어요. 믿음이 없는 곳에 무슨 우정이 있을 수 있으며, 게다가 당신이 저의 행동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잘 알고 있는걸요." "로잘리, 이전에 한 말은 죄다 취소하겠소!" 로잘리는 눈앞에 있는 널찍한 가슴에 매달리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자기자신을 속여서는 안 돼요, 당신은 지금도 제가 웰리스 메이슨의 여자라고 믿고 있는 거예요." "그만, 로잘리. 그것은 내 병이 시킨 말이지, 내 진심이 아니었소." "병 때문에 말을 선택할 만한 기력이 없으니까, 자기 기분이 그대로 입으로 터져 나온 거예요." "들어줘, 로잘리. 나는…" 로잘리는 자칫 흔들리려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말을 계속했다. "내일 밤 저는 멜라니를 만나러 그의 집으로 가요. 그리고 토요일에는 셋이서 어린이 극장의 연극을 구경하러 가게 돼 있어요. 이 말을 듣고도 당신이 한 말을 철회해 주시겠어요? 무리죠?" 로잘리는 금방 험하게 일그러진 상대의 얼굴을 절망적으로 쳐다봤다. 그는 맥이 탁 빠진 듯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답답한 침묵이 잠시 계속된 후, 로잘리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어머님은 아직 여기 계시는가요?" "오늘 아침에 떠나셨소. 당신을 몹시 만나고 싶어 하셨는데, 나는…"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겠죠? 저 같은 것을 만나게 해서는 모친에게 실례가 되니까요. 처자가 있는 남자와 사귀는 행실이 좋지 못한…" 로잘리는 목이 메어서 홱 등을 돌렸다. "저는 양심에 부끄러운 짓은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 아무리 말해도 도대체 믿어 주지 않으니 말이에요. 당신은 귀를 빌려서라도…" 뒷말은 격렬한 흐느낌 속에 사라져 버렸다. 로잘리의 어깨에 묵직한 두 손이 얹혀졌다. "그 남자와의 교제만은 끊어 주시오. 단지 그것만이면 돼." "그러나 멜라니가…" "그렇게 말하는 동안에 당신은 어쩔 수 없는 수렁에 빠지고 마는 거요. 빠져 나갈 수도 없게 된단 말이오." 에이드리언은 로잘리의 몸을 돌려 자기를 보게 하고는 눈물에 젖은 그녀의 눈을 들여다봤다. "로잘리, 제발 부탁이오. 당신이 싫다면,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해달라고 하지는 않겠소. 당신 자신을 위해서 그와는 손을 끊어요." 로잘리는 어디에선가 울부짖는 어린아이의 소리를 들은 것같이 여겨졌다. '로잘리 아줌마가 없어! 로잘리, 어디에 있어요?' "죄송해요, 에이드리언. 멜라니에게는 아직 제가 필요해요." 에이드리언은 조용히 손을 떼며 문으로 걸어갔다. "잘 자요, 로잘리… 안녕." 마지막 한마디는 로잘리의 가슴에 언제까지나 애처롭게 메아리쳤다. 웰리스의 태도는 날이 갈수록 방약무인해져 갔다. 교내에서도 당당히 로잘리의 어깨를 안고 걸었으며, 일을 빙자해서 주임교수실로 불러들여서는 키스를 요구했다. 그런데도 로잘리는 그의 집에 다니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멜라니는 그녀를 보기만 하면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았고, 돌아가려고 하면 반드시 울면서 매달려 왔다. 메이슨은 그런 딸을 타이르기는커녕 오히려 로잘리가 어찌할 바를 몰라서 쩔쩔매는 것을 즐기고 있는 것 같이도 보였다. 에이드리언과는 그런 일이 있은 후, 완전한 절교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어느 날 밤, 그녀의 집 현관에서 스쳐 지나갈 뻔했던 두 사람은 서로를 피하려고 하다가 반대로 몸이 부딪치고 말았다. 쌀쌀맞게 서로 사과하는 순간, 로잘리는 억눌러 왔던 감정을 참을 길이 없어서 애원하는 눈길로 에이드리언을 쳐다봤다. 에이드리언은 무표정하게 로잘리를 가볍게 밀어붙이고 걸어가 버렸다. 학기가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아버지가 말했다. "내일, 에이드리언을 저녁에 초대하기로 했다. 젠도 오니까 2인분의 식사를 더 하도록 해라. 준비할 수 있겠니?" 로잘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식사 준비만 해놓고 외출할 구실을 찾았으나, 결국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고 말았다. 이튿날 저녁식사는 떠들썩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들떠서 떠들어대는 것은 젠이었다. 요즈음의 그녀는 전보다 더 예뻐져서 어딘지 눈부신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아주 정다운 것 같은 젠과 에이드리언을 바라보면서 로잘리는 나오려는 한숨을 억눌렀다. 그때 젠이 샐리에게 요리를 극구 칭찬했다. "나에게 하지 말고 로잘리에게 말해요." 어머니는 쾌활하게 웃었다. "우리 집의 주부는 저애라우. 무엇을 시켜도 잘 해내니까, 나는 가사 일체를 저애한테 맡겨 놓고 있어요." 아버지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마, 사회학 수득 단위에는 가사도 포함돼 있었던 것 같아. 결국 그것이 가장 도움이 되는 학문이란 말이야!" "제가 공부한 것 따위는 사실은 조금도 쓸모없다고 말씀하시고 싶은 게지요?" 로잘리는 일부러 분한 듯이 호들갑을 떨었다. 모두가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러나 에이드리언은 웃지도 않고 조금 기묘한 투로 말을 끄집어냈다. "박사님, 저는 지난날 따님의 강의를 들여다볼 기회를 얻었습니다…" 에이드리언은 느긋이 의자의 등받이에 기댔다. "학생도 선생도 마루 위에 빙 둘러앉은 자세로 하는 수업이었습니다." 폭소가 일어났다. 로잘리는 손에 쥐고 있는 종이 냅킨을 뭉쳐서 꼭 쥐었다. "저는 따님의 부탁을 받고 고장난 비디오를 조사하고 있어서 자연히 수업을 방청하는 꼴이 되었지요. 학생들의 토론을 주체로 한, 실로 유니크하고 즐거운 수업이었습니다. 제삼자인 저까지 끼어들어 토론에 참가하고 싶어서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없을 정도였거든요." 에이드리언은 똑바로 로잘리를 응시했다. "아가씨의 전문 분야에 관해 지금까지 해온 모든 폭언을, 저는 이 자리를 빌어 정식으로 철회합니다. 또 아가씨가 강사로서의 능력을 증명할 필요가 생겼을 때에는 제가 기꺼이 증언에 나서겠습니다." 모두가 또 웃었으나, 이번의 웃음에서 지금까지와는 달리 숙연한 무엇이 느껴졌다. 로잘리는 기쁨으로 볼을 붉히면서 고개를 숙였다. "흠, 과연…" 아버지는 만족스러운 듯이 말했다. "프랭클린, 우리는 슬기로운 딸을 가진 것 같네요." 어머니도 말했다. "바로 그래요." 젠까지도 맞장구를 쳤다. "그리하여 못생긴 오리 새끼는 갑자기 아름다운 백조로 둔갑하게 되었나 보군요." 그 말에는 본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날카로운 가시가 들어 있었다. 에이드리언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지는 것을 보고, 로잘리는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일어서서 설거지를 시작했다. "놔둬라, 내가 나중에 씻을 테니." 어머니가 말하자, 그것을 신호삼아 다른 네 사람도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로 갔다. 씻는 일을 반쯤 끝냈을 때, 에이드리언이 주방으로 들어와서 묵묵히 접시를 닦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기다려도 말 한마디 하지 않는 그에게 로잘리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거들어 주시는 게 도리어 성가셔요.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리고 있는 여자 친구에게 빨리 돌아가시는 게 어때요?" "전에도 그와 같은 말을 들은 기억이 있는걸. 그때는 어리석게도 그 뜻을 몰랐으나, 이번에는 당신이 어떤 뜻으로 말하는지 잘 알았소." 에이드리언이 행주를 테이블에 내동댕이쳤다. "순수한 호의에서 한 행동을 그런 식으로 곡해당해서는 이쪽이야말로 정말 달갑지 않아." "고맙기도 해라!" 나가려던 에이드리언이 화가 난 듯이 발걸음을 멈췄다. 무의식중에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라앉히면서, 로잘리는 말을 이었다. "말이 나온 김에 식사 때에 하신 말씀에도 감사드리죠. 적에게 소금을 보내주는 태도는 실로 훌륭했어요. 마음에도 없는 알랑거림이었다는 것쯤은 저도 잘 알지만 말예요." 에이드리언이 천천히 돌아보며 일순 무엇인가 말을 하고 싶은 얼굴로 로잘리를 바라보더니, 곧 발길을 돌려 나가 버렸다. 니콜이 전화를 걸어온 것은 그로부터 두 시간쯤 지난 뒤였다. "별일 없어, 달링? 오래도록 만나지 못했군." 그는 뻔뻔스럽게 말했다. "오오, 먼 과거로부터 들려오는 그 목소리여." 로잘리는 연극조로 그의 말을 비꼬았다. "미안해, 요즘 몹시 바빠서." "알고 있어요. 어쨌든 그 여자는 굉장한 미인이니까." "… 누구를 말하는 거야?" "젠 헤일우드. 설마 자기 여자 친구의 이름을 잊지는 않았겠지요?" "우리는 그런 사이가 아니야. 그 여자는…" "어머, 가엾게도, 그 아가씨가 아직 그런 상태가 돼주지 않았군요? 그럼 지금 곧 우리 집에 와요. 만나게 해줄 테니까." "와 있어? 그러나 너에게 미안해서…" "나 때문이라면 걱정 안해도 좋아. 그러나 약간 곤란한 라이벌이 있어요. 그녀의 또 다른 남자 친구인 에이드리언 클레이포드가…" "지금 곧 가겠어. 십 분 후에 만나지." 정확히 십 분 후, 현관에서 니콜은 로잘리를 꼭 껴안고 키스를 요구했으나, 그녀는 거절했다. "그만둬요, 우리 관계는 이미 끝장났으니 " 니콜이 반문하려고 할 때, 아버지가 서재에서 얼굴을 내밀다가 포옹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허둥지둥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곧이어 '어머나, 니콜이?'라고 하는 새의 지저귐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젠의 목소리 아냐." 니콜은 천사의 속삭임이라도 듣고 있는 듯한 표정이 됐다. 거실에 앉자, 니콜은 변명 비슷한 투로 말을 끄집어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당신도 무슨 일인지 몹시 바쁜 듯했기에… 그… 여러 가지로." "내가 처자 있는 남자와 놀아나고 있다고 젠한테 들었다, 이런 말이지?" "아니, 별로, 그런 것을 말할…" "그러나 소문은 믿고 있죠?" "소문나는 것이 싫다면 깨끗이 손을 끊으면 되지 않아. 그렇지 않으면, 이미 때가 늦었다는 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나는 한 가엾은 여자아이의 힘이 돼주려고 했을 따름이야." "그렇게 말하니 그럴싸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니콜, 나는 호의로 당신을 불렀는데도, 당신은 근거 없는 소문을 믿고 나를 계속 모욕만 할 셈이면…" "내가 나빴어. 용서해 줘, 달링." 니콜이 로잘리의 손을 잡았을 때, 문이 열리며 에이드리언이 들어왔다. "방해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여기서 커피를 대접받으라고 말씀하시기에." 그는 냉정하게 말하면서 니콜의 허둥거리는 모습을 놀란 듯이 바라보았다. 니콜은 일어서서 에이드리언의 뒤에 서 있는 여자에게 소리쳤다. "젠!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되다니!" 심술궂은 짓인 줄 알면서도 로잘리는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데라서 미안하게 됐군. 젠이 와 있다고 알려 주니까 허둥지둥 달려온 주제에." "니콜, 정말이에요? 제가 와 있다는 것을 알고 오셨어요?" 젠이 기쁜 듯이 말하자, 에이드리언의 눈썹이 씰룩 하고 움직였다. "일껏 우정이 싹트기 시작하는 판인데, 벌써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옮기는 거야, 젠?" 로잘리는 발딱 일어서서 주방으로 들어가 쾅 소리나도록 문을 닫았다. 그래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커피 잔을 하나씩 내동댕이치듯이 쟁반 위에 늘어놓고 있는데, 에이드리언이 들어왔다. "몹시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군. 다른 아가씨가 자기보다 귀여움을 받는 것이 그렇게도 비위에 거슬리는 거요?" "비위에 거슬리는 것은 한창 나이의 두 남자가 보기 흉한 사랑 싸움을 연출하는 꼴이에요!" 커피를 따르는 그녀의 손이 와들와들 떨리면서 아무리 애써도 그치지 않았다. "진정해요. 괜찮겠어?" 에이드리언이 다가서려고 하는 순간, 로잘리는 용수철 튀듯이 펄쩍 뛰며 뒤로 물러섰다. "저는 상관하지 마세요, 당신들에게 방해가 될 테니까. 저는 이제 거실엔 돌아가지 않겠어요. 양친에게 이 커피를 날라다 드리곤 곧 이층으로 올라가겠어요. 거실에는 당신이 커피를 들고 가서 셋이서 자유롭게 드세요." 로잘리는 잔을 셋 얹은 쟁반을 에이드리언에게 밀어붙였다. "그렇지 그래. 제 남자 친구가 아니라 예전의 남자 친구에게 전해 주세요. 돌아갈 때는 저에게 작별인사 따위는 하지 않아도 좋으니, 아가씨나 정중히 집까지 모셔다 드리라고요." 그리고 몹시 비꼬는 투로 그녀는 덧붙였다. "그러나 당신도 그 명예로운 역할을 사서 하려고 한다면, 아마 한번 소동이 일어날 것 같네요." 에이드리언은 상관하지 않고 커피를 얹은 쟁반을 들고 조용히 나갔다. 한 시간쯤 지난 뒤 작별을 고하는 젠의 목소리가 이층에까지 들려왔다. 차가 떠나갔다. 결국 어느 쪽이 데려다 주는 것일까? 아무렇게나 어깨를 움츠리며 로잘리가 펜을 고쳐 잡았을 때, 서재에서 에이드리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잘리는 갑자기 생기가 넘치는 듯이 하던 일을 계속했다. 7 며칠 후, 여느 때보다 약간 빨리 조사할 것을 끝낸 로잘리는 기분전환을 하기 위해 머리를 감았다. 깨끗해진 보송보송한 머리가 목덜미에 닿으니 마음까지 한결 가벼워진 듯했다. "오래간만에 원피스나 만들어 볼까." 로잘리는 중얼거리며, 바겐 세일 때 사놓은 꽃무늬의 천을 마루에 펼쳤다. 마루에 무릎을 꿇고 앉아 핀으로 고정시킨 천을 형지에 따라 신중하게 가위질을 하고 있는데, 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오세요, 아빠." 로잘리는 그대로 일을 계속했다. "당신의 다재다능함에 오로지 놀랄 따름이오." "에이드리언! 저… 무슨 볼일이라도?" "방 입구에 '어서 오세요'라고 쓴 간판이라도 내거는 것이 어떻소? 요즈음에 와서 당신은 그 말을 깡그리 잊어버린 것 같으니 말이오." "대단히 실례했습니다. 다음부터는 큰절로 맞아들이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만족하시겠죠?" 로잘리의 빈정거림에도 아랑곳없이 에이드리언은 쭈그리고 앉아서 형지를 내려다보았다. "양재란 꽤 까다로운 것 같아. 나도 알 수 있게끔 설명해 주지 않겠소?" 로잘리는 코방귀를 뀌었다. "사양하겠습니다, 클레이포드 박사님. 당신에게 양재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은 당신이 저에게 수학의 수수께끼를 이해시키려고 하는 것과 같으며, 시간 낭비밖에 되지 않으니까요." "수학에 수수께끼란 것은 없소. 당신이 수학을 다루기 벅찬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당신을 가르친 교사가 무능했기 때문이었어. 내가 가르친다면 당신은 금방 수학의 우등생이 될 수 있을 거요." "대단히 자신에 차 있군요. 그러나 그 근거는?" "첫째 근거는 당신이 수학을 이해할 만한 지능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것, 둘째 근거는…" 그는 희귀한 것이라도 보는 듯이 로잘리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당신이 생도로서는 이상적이라는 점이야. 솔직하고 순진하고." 로잘리는 당황하면서 일어섰다. 내려다보니 데님바지는 무릎이 닳아 구멍이 나 있고, 더구나 블라우스의 단추는 떨어져서 그 틈으로 살갗이 드러나 보였다. 더욱 얼굴이 빨개지며 블라우스 자락을 바지 속으로 쑤셔 넣은 로잘리는 뾰로통한 목소리로 용건을 물었다. "아주 급히 타이프를 쳐야 할 일이 생겼는데, 공교롭게도 젠이 없어요. 아버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당신은 타이프까지도 칠 줄 알 거라고 하시더군. 그래서 당신 도움을 받으려고 찾아온 거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잘 치지도 못하고…" "우리가 갈겨쓴 것을 어떻게든 남들이 읽을 수 있도록만 쳐 주면 돼요. 그 정도라면 당신한테는 식은죽 먹기가 아니겠소?" "네, 아마… 알았어요. 먼저 가세요, 곧 옷을 갈아입을 테니까요." "왜 그래요? 지금 이 집에 있는 타인은 나뿐이잖소. 나로서는…" 에이드리언은 무례하게 로잘리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어떤 시인이 말한 '청초보다 나은 아름다움은 없다'고 한 말에 동감이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아까와. 자, 떠납시다, 라이온의 우리로!" 양친은 로잘리에게 할 설명을 에이드리언에게 맡기고 자리를 비켜 준 것이다. 그런 재치를 부린 양친을 원망하면서, 그녀는 타이프라이터 앞에 앉았다. 에이드리언이 아주 가까이 몸을 바싹 대고 설명하는 것도 몹시 불안했다. "냄새가 좋군. 어떤 향수를 쓰고 있소?" "샴푸 냄새겠죠, 머리를 방금 감았으니까." 로잘리는 애써 뛰는 가슴을 진정하려고 했다. "그러면 그렇지, 당신 머리가 오늘은 유난히 빛나는군." 에이드리언이 안락의자에 앉아서 필기를 시작했으므로로 로잘리는 어깨의 힘을 빼고 일에 착수했다. 주어진 원고를 모두 쳤을 무렵, 아버지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오, 벌써 끝냈니? 수고했다. 오늘 밤에는 엄마가 커피를 탈 테니까, 너는 거기서 쉬고 있거라." 아버지가 도로 나가자, 로잘리는 목표도 없이 방 안을 돌아다녔다. 열심히 책을 읽고 있던 에이드리언이 얼굴을 들었다. "침착성이 너무 없군. 나와 단둘이 있으면 그렇게도 답답해요?" "답답한 것은 당신 쪽이잖아요?" 에이드리언은 책을 테이블에 얹어 놓고 다리를 느긋하게 폈다. "현재의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밖에 없소. 그것은 당신도 잘 알겠지. 그러나 당신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데까지 가버린 것일까?" "대답할 필요조차 없는 질문이에요." "알았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오." 에이드리언은 안심했다는 듯이 눈을 감았다. "충분한 대답이라니요, 뭣을 알았다는 건가요?" 그는 귀찮다는 듯이 실눈을 떴다. "이번에는 내가 질문공세를 받을 차례인가? 그러나 나는 대답을 하지 않을 작정이오." 양친이 커피를 날라왔으므로, 로잘리는 추궁할 기회를 놓쳐 버렸다. 아버지가 교직원 댄스 파티를 화제로 삼았다. "너는 니콜과 같이 나온다고 했지?" "네, 그러나 그가 에이드리언의 파트너와 추고 싶어할지도 모르죠." 에이드리언이 즐거운 듯이 말했다. "그럼, 당신은 나랑 파티 구석에서 구경할까요?" "당신은 내가 춤을 출줄 안다는 사실을 잊었나요?" "확실히 잊고 있었군. 그러면 나는 당신 상대가 되기 위해 지금부터 댄스를 배워야 하나?" "안심하게, 에이드리언. 저애는 파트너가 없어서 난처하지는 않을 테니까."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자, 에이드리언은 갑자기 작별을 고하고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방과 후, 로잘리는 웰리스의 차에 타면서 입술을 손등으로 가만히 훔쳤다. 조금 전에 사무실에서 또 키스를 요구당했던 것이다. 저항하면 도리어 역효과가 날 것 같아 그녀는 하자는 대로 내버려 두었으나, 이 남자의 끈질김에 대한 불쾌감은 날로 더해 갔다. 웰리스의 집에 도착하자, 로잘리는 주방으로 가서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이제는 주방의 구석구석까지 로잘리는 죄다 알고 있었다. 이웃집에서 돌아온 멜라니는, 로잘리가 오늘은 밤까지 죽 있어 준다는 말을 듣고 환성을 지르며 달려들어 그녀를 껴안았다. 식사하는 동안 로잘리는 소녀를 위해 애써 명랑하게 행동했다. 식사의 뒤치다꺼리를 도우면서 웰리스가 무슨 뜻이 담긴 듯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렇게 하고 있으면, 나는 당신이 이 집의 주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거든." 소름이 끼칠 듯한 혐오감을 억누르며, 로잘리는 상냥스럽게 말했다. "저는 상상력이 부족한 탓인지 그런 착각에 빠질 걱정은 절대로 없는걸요." 웰리스의 얼굴에 음산한 기가 어른거리는 듯한 기분이 들어, 로잘리는 멜라니가 기다리고 있는 이층으로 총총히 올라갔다. 멜라니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 찾아왔다. 두 사람은 학교놀이와 가게놀이를 하고, 인형들의 집을 청소하고, 그림책을 읽었다. 그러는 동안, 그리고 로잘리의 도움으로 목욕을 끝낼 때까지 줄곧 기분이 좋았던 소녀는 침대에 들어가 잘 자라는 키스를 할 때가 되자 갑자기 조용해졌다. 로잘리의 목을 두 손으로 감은 채 멜라니는 한숨을 쉬었다. "왜, 밤이 되면 돌아가죠? 왜 진짜 엄마처럼 죽 집에 있어 주지 않아요?" "정말 왜 그럴까, 멜라니?" 문간에서 나는 웰리스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로잘리는 조용히 말했다. "나는 네 엄마도 아니고, 또한 되고 싶지도 않아. 너도 벌써 일곱 살이 됐으니, 잘 이해할 수 있겠지?" "그래도 돌아가지 않으면 좋겠어요. 밤새도록 여기에 있어 주면 좋겠어요. 네? 로잘리 아줌마, 그렇게 해줘요." "나도 내 집이 있어요. 알겠지?" 소녀는 싫다고 도리질을 하면서 로잘리의 목에 매달렸다. "가면 싫어! 아침까지 여기 있어 줘야 해!" 거의 울음 섞인 말로 멜라니는 생떼를 부렸다. 로잘리는 소녀를 다독거려 팔을 풀고 일어서려고 했으나, 멜라니는 뜻밖의 세찬 힘으로 매달려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로잘리는 갑자기 겁이 덜컥 나서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소리로 나무라고 말았다. 소녀는 울음보를 터뜨리며 더욱더 강하게 매달렸다. 로잘리는 에이드리언이 말한 '함정'의 무서움을 비로소 통감했다. 그때까지 방관만 하던 웰리스가 그제사 다가와서 신경질적으로 울부짖는 딸을 억지로 침대에 눕혔다. "불쌍한 것. 그러나 울지 마, 울음을 그쳐!" 흐느끼는 소리가 차츰 가늘어져 갔다. 울음에 지쳐 녹초가 돼 버린 소녀를 보고 로잘리는 달려가서 안아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엄마 보고 싶어. 엄마는 언제쯤 오는 거야?" 멜라니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아빠는 알잖아. 빨리 만나고 싶단 말야." 로잘리는 눈물로 얼룩진 귀여운 뺨에 키스했다. "자, 이젠 잘 자요. 잠이 들 때까지 이렇게 손을 쥐고 있어 줄게. 그러면 안심이 되지?" 멜라니는 순순히 눈을 감았다. 이윽고 조용하고 편안한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돌아가겠어요." 거실로 내려온 로잘리는 브랜디를 마구 들이켜고 있는 웰리스를 향해 단호히 말했다. "한 잔쯤 같이 마시고 가는 게 어때, 달링." 웰리스는 잔을 놓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런 웰리스에게서 어떤 위험을 느낀 로잘리는 재빨리 상의와 백을 들고 현관을 뛰쳐 나왔다. "오늘 밤은 버스로 가겠어요. 편안히 쉬세요!" 문밖에서 소리치고 로잘리는 걷기 시작했다. 곧 문이 열리며 웰리스가 쫓아왔다. "당연히 내가 데려다 줘야지, 달링. 나를 겁내지 말아요. 나는 머리털 하나라도 당신에게 나쁜 짓을 할 생각은 없으니." 웰리스가 다시 입을 연 것은, 로잘리가 차에서 내릴 때였다. "며칠새 또 와주겠지? 당신 뜻에 어긋나는 짓은 절대로 안하겠소. 약속하지, 로잘리." 집에 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과 같은 목소리였으나, 로잘리는 빨리 혼자 있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생각해 보죠. 잘 주무세요." 로잘리는 조용히 대답하고 집으로 향했다. 양친이 집에 돌아오겠다고 한 시간이 아직 되지도 않았을 텐데 창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이상하게 여기면서 그녀는 문을 열었다. 주방에서 사람이 나왔다. 에이드리언이 아닌가. 띵한 머릿속에, 양친이 그에게 여벌 열쇠를 준 일, 큰길 쪽에 세워져 있는 어디선가 본 듯한 차가 그의 차였던가 하는 생각들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지칠 대로 지쳐 버린 로잘리의 얼굴에 얼어붙은 듯한 시선을 던지고 그는 서재로 가버렸다. 한마디 위로의 말이라도 해줄 것을 바라며 뒤쫓는 그녀의 눈앞에서 그는 문을 쾅 닫아 버렸다. 로잘리는 자기 방으로 달려가서 침대에 쓰러져 마음속의 번민과 괴로움을 단숨에 토해 버릴 듯이 소리쳐 흐느껴 울었다. 겨우 눈물이 말랐을 무렵, 계단 밑에서 이야기 소리가 나더니, 이윽고 계단을 올라오는 어머니의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로잘리, 방에 있니? 들어가도 괜찮겠니?" "들어오세요." 그녀는 일어나서 문을 열었다. "돌아오셨군요, 엄마. 이런 얼굴을 보여서 죄송해요." "에이드리언이 너의 울음소리를 들었다고 하길래 올라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 주겠니? 뭔가 힘이 되어 줄 수도 있을지 아니…" 걱정스럽다는 듯이, 그러나 조금도 자신이 없는 듯이 말하는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로잘리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너무 복잡해서 한마디로는 설명할 수 없어요." "얘, 로잘리? 저어…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후회할 어떤 일이라도 일어난 것은…?" 부어오른 로잘리의 눈이 쓸쓸하게 웃었다. "아니예요, 엄마가 걱정하는 것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맹세코 일어나지 않아요." 어머니는 겨우 안심했다. "그렇지만, 아빠도 이전부터 너를 걱정하고 있단다. 그런데…" "그 뒤는 말씀하시지 않아도 알고 있어요. 무책임한 평판을 걱정하지 않는다고 아빠에게 전해 드려요." "그럼, 넌 뭘 고민하는 거냐?" 멍한 눈으로 서성거리기만 하는 딸을 보고 어머니는 맥이 빠진듯 어깨를 축 떨어뜨렸다. "로잘리, 내가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알고 있겠지? 네 기분을 잘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만, 현재의 너를 보고 있으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도움이 되는 건지… 착한 어미가 되지 못해 미안하다. 너에게는 언제나 변명할 여지가 없어서…" "엄마!" 로잘리는 어머니에게 달려가서 가느다란 몸을 껴안았다. "엄마, 그런 말씀 마세요." 먼저와는 성질이 다른 눈물이 로잘리의 뺨을 적셨다. 언제나 선드러지고 씩씩하던 어머니가 아닌가. 그런 어머니가 이렇게도 미덥지 못한 모습을 보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동생을 격려하는 언니와 같은 기분으로 로잘리는, 어머니의 등을 어루만졌다. 로잘리의 모습을 보고, 니콜은 큰소리로 휘파람을 불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드레스는 그녀의 날씬한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넉넉하게 은실을 짜 넣은 검은 천은 가슴과 등에서 대담하게 커트되어 흰 살결이 드러나 있었다. 오늘 밤만은 모든 것을 잊고 즐기려고 로잘리는 마음먹고 있었다. "다른 일은 어떻든간에 우선 키스하게 해줘." "안 돼. 상대가 틀리지 않아? 그보다 서둘러야 되겠어. 아버지와 어머니는 벌써 출발했어요." 넓은 강당에 화려하게 차려 입고 모여든 사람들 중에서도 로잘리의 옷차림은 유달리 남의 눈을 끌었다. 셰리 술잔을 기울이면서, 로잘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웰리스가 뚫어지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일부러 니콜에게 바싹 다가가서 신나게 익살을 떨며 깔깔거렸다. 니콜은 덩달아 웃으면서도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오늘 밤 당신은 유달리 명랑한 것 같군. 훨훨 어디론가 날아가 버릴 것 같아서 걱정스러워." "어머? 우리는 이미 특별한 사이가 아니니까 마음대로 여자 친구에게 가도 상관없어요." "그렇게까지 심술궂고 매정하게 굴면, 나는 점점 흥분해 버리고 말 거야." 니콜은 갑자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어, 저기 젠과 에이드리언이 있네. 인사하러 가자구." 로잘리는 파티장에 들어설 때부터 두 사람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새털처럼 가벼운 듯한 엷은 청색 드레스를 입은 젠은 각별히 사랑스럽고 즐거운 듯이 에이드리언과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니콜이 재촉하는 대로 다가가면서, 로잘리는 에이드리언에게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상대는 도리어 적의에 찬 시선을 던졌을 뿐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는 동안도 못 참겠다는 듯이 니콜은 외쳤다. "젠! 오늘 밤은 더욱더 아름다와요." "고마와요, 니콜. 어머나, 로잘리 아냐? 알아보지 못했어요. 오늘 밤은 전혀 분위기가 달라서 다른 사람처럼 보였거든. 에이드리언, 그렇게 생각되지 않아요?" 에이드리언은 대답은 하지 않았으나, 그 대신 눈으로 그의 감상을 전하고 있었다. 이런 장소만 아니었더라면 자기의 드레스가 언젠가 내동댕이쳐진 담배와 같은 운명의 길을 걸었음에 틀림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로잘리는 젠에게 정다운 웃음을 보냈다. "저는 여러분의 기대에 어긋나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저… 어떤 뜻이에요?" "화려한 염문을 퍼뜨리고 있는 여자가 수수한 모양을 하고 있으면 여러분이 실망하지 않겠어요? 어머, 저기에 양친이 계시네요. 잠깐 실례…" 다가오는 로잘리를 아버지가 먼저 봤다. "야아, 로잘리. 그 드레스… 아냐, 눈에 익지 않는 드레스인데. 당신이 사준 건가, 샐리?" "아뇨, 어떻게 해서, 그런… 어머, 그것이 아니라, 너 언제 그것을 샀지?" "극히 최근에요. 꽤 어울리죠?" "어울리는 것은 틀림없으나… 물론 네 마음에 든다면, 그것이 제일 좋겠지." 저녁 준비가 됐다는 안내 방송이 있자,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의 파트너와 함께 식당으로 지정된 옆방으로 향했다. "우리 자리는 저기다." 니콜이 명패를 발견하여 가리켰다. "어, 운이 좋구나. 맞은편 자리는 젠과 에이드리언 거야." 로잘리는 자리를 배치한 사람에게 마음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다행한 것은 웰리스와는 꽤 멀리 떨어져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식사하는 동안 로잘리는 웰리스의 시선에 줄곤 시달려야만 했다. 드러낸 어깨에 차디찬 것이 와서 닿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돌아보면, 반드시 그의 시선과 마주치는 것이었다. 갑자기 가슴을 스치는 불길한 예감에서 피하기 위해 그녀는 조금 거칠게 니콜의 팔을 잡아 흔들었다. 젠의 얼굴을 넋을 잃고 보고 있던 니콜은 놀란 듯이 돌아보았다. "왜 그래, 로잘리?" 에이드리언이 경멸하는 듯이 어깨를 치켜올리는 것을 보고, 로잘리는 급히 손을 뗐다. "미안해요, 니콜. 아무 일도 아니예요." "사과할 것까지는 없어. 오늘 밤의 당신은 무엇을 해도 아주 매력적이거든." 니콜은 그렇게 말했으나, 그 눈이 정열적으로 응시하고 있는 것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젠의 얼굴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사람들은 프로급 5중주단이 기다리고 있는 옆방으로 되돌아갔다. 경쾌한 음악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많은 커플이 일제히 스탭을 밟기 시작했다. 에이드리언과 젠은 모퉁이에 있는 자리로 물러나서 춤추는 니콜과 로잘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댄스를 위해 태어난 여자 같애." 니콜이 로잘리의 귓전에 입술을 댔다.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다만, 젠의 질투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그런다면 협력해 줄 수도 있지만."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빙퉁그러진 말만 하네. 착한 아가씨가 되지 않으면, 나는 정말 젠에게 가버릴 거야." "아무쪼록 마음대로 해요. 나 역시 파트너에는 군색하지 않으니까." 니콜은 입술을 깨물더니, 곡이 끝나기가 무섭게 로잘리에게서 떨어져 젠에게 댄스 신청을 하러 가버렸다. 우아한 모습으로 춤추는 두 사람을 로잘리가 멍청히 바라보고 있은 것도 잠깐뿐이었다. 곧 같은 학과의 강사가 댄스를 신청한 것을 시작으로 해서, 로잘리가 예상한 대로 쉴새도 없이 파트너가 몰려들었다. 니콜도 두 번쯤, 젠 곁을 아쉬운 듯이 떨어져 자기의 의무를 완수하기 위해 로잘리에게 왔다. 유연하게 스탭을 밟으며 신나는 웃음소리를 지르면서도, 로잘리는 자기가 댄스를 즐기고 있지 않다는 비참한 기분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녀의 진심은 댄스를 그만두고, 양친과 에이드리언이 이수학과의 동료들과 이루고 있는 이야기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자기가 접근하면 에이드리언이 이것 보란 듯이 자리를 피해 버릴 것은 뻔한 일이었다. 간혹 그가 던지는 차디찬 시선이 '너 따위는 필요없어'라고 큰소리로 외치는 것 같았다. 반대로, 로잘리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려고 노력하는 한 남자가 있었다. 물론 웰리스였다. 그는 처음부터 댄스에는 참가하지도 않고 알콜이 든 글래스를 호기있게 들이켜면서 언제나 그녀의 모습을 눈으로 쫓고 있었다. 로잘리는 조금도 정신을 흐트려뜨리지 않고 파트너를 이끌어 웰리스에게서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떨어지려고 노력했으나,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러나 착실하게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 곡이 끝나고 사람들이 새로운 파트너를 찾아 움직이기 시작할 때, 로잘리는 에이드리언이 파티장에서 나가는 모습을 보고 멈칫했다. 명랑한 체 가장한 가면이 소리를 내며 허물어져 갔다. 이젠 돌아가 버릴 작정일까, 젠을 남겨 놓은 채? "겨우 잡았군!" 팔을 잡혀 돌아본 로잘리는 가장 보고 싶지 않던 남자의 얼굴을 눈앞에 보았다. 웰리스는 눈을 이상하게 번득거리며 상당히 술기가 돈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술을 가지고 왔어." "그러나 저는…" "문답은 필요없어. 자, 기분좋게 마셔요." 웰리스는 억지로 글래스를 떠안겼다. 로잘리가 마지못해 마셔 버리자, 그는 그 글래스를 받아 옆 테이블에 놓고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난폭하게 끌어안았다. "마침내 내 차례가 왔군. 싫다고 하지는 못하게 할걸. 지금까지 몹시 기다리게 해놓고. 이젠 놓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저는 파트너에게 돌아가야 해요." "같이 온 남자 말인가. 그놈은 누구야?" "제… 제 남자 친구예요." "그런 놈팽이가 있었던가, 금시 초문인데?" 웰리스가 로잘리의 뺨에 입술을 밀어대며 말했다. 로잘리는 얼굴을 비틀어 그의 입술을 피하려고 했다. "그만두세요, 남이 봐요." "보고 싶은 놈은 보라지. 그리고 당신과 나 사이의 일은 벌써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 웰리스는 더욱 로잘리를 바싹 끌어안았다. 젠과 춤추면서 옆을 지나가던 니콜은 두 사람을 흘낏 본 뒤 파트너의 귀에 무엇인가 속삭였다. 킬킬거리는 젠을 보면서, 웰리스는 히죽 웃었다. "당신 남자 친구란 자는 당신 없이도 충분히 즐기고 있는 것 같아. 저런 남자에게 알뜰하게 대해 줄 필요가 뭐람." 이렇게 말한 뒤, 그는 갑자기 사무적인 말투로 말했다. "중요한 걸 깜박 잊고 있었군. 강사 한 사람이 조심성없이 학생 성적부를 직원실에 두고 왔다고 하지 뭐야. 중요한 서류인데 남이 들쳐 본다거나 하면 큰일이니, 보기 전에 가져와야겠어." "저는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나는 어둠이 무서워. 따라가 주겠지?" 질문이 아니라 분명한 명령이었다. 웰리스에게 끌리다시피 해서 방 밖으로 나온 로잘리는 때마침 안으로 들어오는 에이드리언에게 구원해 달라는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불쾌한 듯이 얼굴을 돌리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웰리스는 로잘리를 먼저 직원실에 들어가게 해놓고, 자기는 닫은 문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제기랄, 이 문은 잠겨지지 않는 것 같군!" 로잘리는 깜짝 놀라면서 돌아봤다. "왜 잠그는 거예요. 서류를 가지러 왔잖아요?" 표현할 수 없는 불안이 엄습해 왔다. 웰리스는 테이블을 문 앞으로 끌어당겨 손잡이 밑에 끼워 문을 고정시켰다. "웰리스, 정말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곧 가르쳐 주겠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로잘리에게 덤벼들었다. "무슨 짓이에요! 그만둬요, 그만!" 웰리스에게 어깨를 잡히자, 로잘리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주먹을 휘들러댔다. "잠자코 있어! 아픈 꼴을 당하고 싶어?" 술 냄새를 풍기면서 웰리스는 로잘리의 두 손을 눌렀다. "자기가 유혹해 놓고, 새삼스레 고상한 체하지 말아.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지? 지금 그 소망을 풀어 주겠다." 웰리스는 로잘리를 소파에 밀어 넘어뜨리고, 비명을 지르는 그녀의 입을 자기의 입술로 막았다. 로잘리는 이를 악물고 죽을 힘을 다해 얼굴을 돌리려고 했다. 갑자기 웰리스가 그녀의 뺨을 손바닥으로 세차게 갈겼다. 로잘리가 무의식중에 비명을 지르자, 웰리스는 두 손으로 그녀의 목을 졸랐다. 그때 문의 손잡이를 밖에서 달가락달가락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야, 문 열어!" 로잘리가 학수고대하던 목소리였다. 웰리스는 한쪽 손으로 로잘리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으나 그녀가 일부러 몸의 힘을 빼자, 마음을 놓은 듯 조금 손의 힘을 뺐다.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로잘리는 그의 손을 물어뜯고, 상대가 주춤거리는 틈에 힘껏 살려달라고 외쳤다. 문에 몸을 부딪치는 소리가 한번, 두번, 세번, 그리고 네 번째에 테이블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나고 문이 열렸다. "그 여자에게서 손을 떼라, 메이슨." 에이드리언은 조용히 말했으나, 다음 순간 참지못해 노성을 질렀다. "떼란 말이야, 이 짐승 같은 놈아! 그렇지 않으면 창밖으로 내던져 버리겠다. 이 새끼야!" 웰리스는 일어나 아직 잇자국이 남아 있는 손을 비비면서 힘없이 머리를 떨어뜨리고 나가 버렸다. 에이드리언은 로잘리의 찢어진 드레스와 마구 엉클어진 머리, 그리고 신발이 벗겨진 발을 잠자코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로잘리는 조용히 말했다. "꼴 좋다고 말하고 싶지요. 자, 빨리 말하세요!" 그러나 에이드리언이 홱 등을 돌리는 순간, 그녀의 허세는 허물어지고 말았다. "가지 말아요, 에이드리언. 제발 부탁이에요, 제 곁에 있어 주세요!" "문이 어느 정도 부서졌는지 확인했을 뿐이오. 나는 아무 데도 가지 않아요, 로잘리." 맥이 빠짐과 동시에 로잘리의 전신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에이드리언이 꼭 껴안았으나 그 떨림은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안… 안 돼요, 에이드리언. 아무리 해도, 그… 그쳐지지 않아요." "너무나 충격이 심했으니까, 그럴 테지." 에이드리언은 신발을 찾아와서 로잘리의 발에 신겨 주고, 자기의 어깨를 짚고 일어서게 했다. "아버님 방으로 가지. 여벌 열쇠라면 내가 가지고 있어." 로잘리가 아버지의 의자에 앉자, 에이드리언은 '곧 돌아올게' 하고는 방을 나갔다. 그리고 금방 돌아와서 로잘리의 몸을 바둑판 무늬의 무릎덮개로 감쌌다. "내 차에서 가지고 온 거야. 그렇게 하고 있으니 추위를 잘 타는 할머니 같군." 로잘리는 비로소 가냘픈 미소를 띠었다. "자, 집으로 돌아가지. 당신 코트와 핸드백은? 니콜이 알고 있어요?" "네, 그렇지만 젠에게 미안해서." "니콜이 기꺼이 에스코트해 주겠지. 잠깐 가서 부탁하고 오겠소. 양친에게는 당신이 기분이 언짢은 것 같아서 내가 데리고 가겠다고 귀띔해 놓겠소. 기분이 언짢은 것은 사실이니까." 격려하듯이 미소를 짓고 에이드리언은 방을 나가 버렸다. '만사 오케이' 하면서 그가 돌아올 때까지의 십 분 동안이 로잘리에게는 열 시간이나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에이드리언은 그녀에게 코트를 입혀 주고 다시 그 위를 무릎덮개로 싼 다음 그녀를 꼭 껴안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로잘리는 에이드리언의 어깨에 머리를 얹고, 겨우 떨림이 그친 몸을 맥없이 시트에 묻었다. 에이드리언은 로잘리를 거실의 소파에 앉히고 난방 스위치를 넣었다. "우선 몸부터 녹여야겠소. 이런 때에는 브랜디가 제일 좋은데. 내가 마음대로 찬장을 열어도 괜찮을까?" "양친께서 당신은 아들과 같다고 말한 적이 있지요. 벌써 잊었나요?" "그런 투로 말하는 것을 보니, 조금은 기분이 돌아온 것 같군. 그 기분으로 이 브랜디를 단숨에 마셔요." 로잘리는 자기가 마신 빈 잔을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에이드리언, 어떻게 그 장소에 와주셨지요?" 그의 얼굴이 괴로운 듯이 일그러졌다. "이상하게도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처음에는 그 사나이의 방에도 가봤고 다른 두세 곳도 찾아봤지. 아무 데도 없지 뭐요. 당신네들은 이미… 저어… 그의 집으로 돌아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단념하고 그 직원실 앞을 지나는데,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지 뭐요."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전 이제 걱정없으니, 학교로 돌아가시죠. 파티는 아직 계속되고 있을 테니까." "내 걱정은 안해도 돼. 그보다 당신은 침대에 들어가요. 양친이 돌아오실 때까지 나는 여기에서 연구한 것을 살펴볼 테니깐." "그렇지만 에이드리언, 그렇게 폐를 끼쳐서는…" "누구는 즐거운 여행까지도 희생해 가며 내 병을 간호해 줬는데 이쯤 가지고 뭐. 때로는 내게 은혜 갚을 기회도 좀 줘야지. 이따가 따끈한 밀크를 가셔다 주겠소." "친절은 한평생 잊시 않겠어요, 에이드리언." 그는 로잘리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가만히 감싸고, 아직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이야기는 그만 하고 이층으고 올라가요. 계단을 혼자서 올라갈 수 있겠소?" 로잘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천천히 이층으로 올라갔다.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들어가려고 할 때, 김이 무럭무럭 나는 컵을 들고 그가 방으로 들어왔다. "코코아를 약간 넣었는데, 입에 맞을지 어떨지 모르겠어요, 마담." 따끈한 우유를 마시면서, 로살리는 그를 바라봤다. "에이드리언, 왜 저를 꾸짖지 않아요?" "당신 자신이 이번 일이 골수에 사무쳤을 텐데 뭘. 문제는…" 에이드리언은 약간 눈살을 찡그렸다. "이후부터 당신이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지." "모르겠어요. 멜라니에게는 아무 죄도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가 안 잡혀요." 로잘리는 눈을 감고 힘없이 침대에 몸을 던졌다. "불을 끄는 것이 좋겠소?" "네, 그러나 그 전에 한마디만 더 말하게 해주세요. 에이드리언, 오늘 밤에는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당신이 말한 것처럼, 양친에게는 내가 아들 같으니까. 오빠가 누이동생을 돌봐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에이드리언은 조명 스위치를 끄고 방을 나가서 조용히 문을 닫았다. 8 이번 학기의 수업은 파티 전날 끝났으므로 월요일의 캠퍼스에는 학생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산한 교내에서 부지런히 잔무 처리를 하는 교직원들도 마음은 벌써 내주부터 시작될 여름 휴가에 쏠려 있었다. "이젠 괜찮소?" 그날 해거름에 아버지를 마중하러 사무실에 온 로잘리를 보고, 에이드리언은 말했다. 아버지는 아직 방에 돌아오지 않았다. "덕택으로, 이렇게 회복됐어요. 고맙습니다." 로잘리는 옆방 비서실로 갔다. "젠, 파티하던 날 걱정을 끼쳐서 미안해요. 그날 밤 니콜이 데려다 주던가요?" "네, 저… 실은 어제도 둘이서 놀러갔어요. 기분 나쁘게 생각하실지…" "아니예요. 그렇기는커녕 오히려 저는 당신과 니콜은 어울리는 커플이라고 생각하고 기뻐하고 있어요. 두 분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겠어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므로, 로잘리는 옆방으로 되돌아갔다. 에이드리언이 눈치를 살피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젠과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던 것 같았다. "여행을 떠난다죠?" 그가 말했다. "네, 먼젓번에 못 간 요크셔 방면으로." "이번에는 자네 여행을 방해하지는 않겠어." 아버지가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로잘리는 두 주일 예정하고 떠나고, 나와 샐리는 8월 한 달 동안 남 프랑스에 가서 머무를 예정이야. 그러니 멀지 않아 출판사에서 보내올 교정쇄의 검토를 자네가 맡아 주지 않겠나? 이쪽에서 자네 본가로 우송해 줄 테니." "알았습니다. 남 프랑스에 아시는 분이 계십니까?" "먼 친척이 있네. 그쪽에서는 가족 모두를 초대해 왔으나, 얘는 국내 여행 쪽이 좋다는 거야." 에이드리언은 노트에 마구 낙서를 하면서 흘낏 로잘리를 봤다. "이번에도 메리온과 함께요?" "마지막 사흘 동안만요. 예정이 어긋나서 같은 날에 출발할 수 없게 되어 여행지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아하." 에이드리언은 펜을 호주머니에 넣고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 주일 내내 로잘리는 웰리스를 피해서 마을의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러나 업무가 드디어 오늘로써 마감이 되므로, 이번 학기 마지막 점심을 사랑하는 남자와 같이 하고 싶은 생각이 모든 것을 밀어붙여 걸음이 자연히 교직원 식당으로 향해졌다. 에이드리언은 옆의 빈자리를 웃으면서 권하고는 곧 아버지와 동료들의 대화에 섞여 버렸다. 식사가 끝날 무렵이 되자, 그때서야 생각났다는 듯 로잘리에게 이야기를 걸어왔다. "실컷 먹었소?" "네… 스테레오의 상태는 그후 어때요?" "최상이오. 아니 방금 한 말은 또 들려 달라는 암시 같은데?" 로잘리는 웃으며 부정했다. "그러나 들으러 와달라고 청하면, 아마 거절은 하지 않을 거예요." 에이드리언은 빈 홍차 잔의 밑바닥을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피루즈 부인은 왜 요즈음 당신이 오지 않느냐고 귀찮게 묻곤 하시지." "그래서 어떻게 대답했어요?" "내가 그 아가씨 쪽으로 간다고 했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잖소?" "그렇네요." 뺨이 왠지 뜨거워졌다. "하지만, 이제는 이야기할 시기가 아닐까요? 다른 여자 친구가 생겼다든가, 저와 싸우고 헤어졌다든가…" "그러나 마음씨 고운 그 부부가 몹시 낙담할 것을 생각하면 가엾어서, 그만 말할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만단 말이야." "그런 염려가 결과적으로 그 사람들의 오해를 점점 조장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요?" 에이드리언은 이번에는 티스푼을 요모조모 뜯어보기 시작했다. "더욱이 당신이 만일 또 스테레오를 듣기 위해 찾아오거나 하면 더욱더 그렇겠지." 로잘리는 애써 시선을 피했다. "오해를 크게 받지 않으려면, 안 가는 것이 좋겠군요?" "그렇소." 무뚝뚝한 그의 목소리가 로잘리의 가슴을 무겁게 억눌렀다. 그날 오후, 그녀는 여행 예정을 최종적으로 마무리짓기 위해 메리온의 방으로 갔다. 두 사람은 열흘 후에 서로 만날 시간과 장소를 결정하고, 급한 일이 생길 경우에 대비해서 여행중의 연락처를 서로 메모했다. 로잘리는 메리온이 걱정스러운 듯이 옆방을 자주 살피는 것을 눈치챘다. "웰리스 선생님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요. 무슨 볼일이라도?" 당황스레 머리를 흔들고 그 방을 나온 로잘리는 때마침 지나가던 에이드리언과 부딪칠 뻔했다. "로잘리, 마침 잘 만났군. 나는 일요일에 출발할 거요. 당신 하고도 당분간은 만나지 못하게 되겠군." 울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로잘리는 미소를 지었다. "다음 학기가 시작되기까지 줄곧 어머니 곁에 있을 건가요?" "그래요." 그는 창밖의 운동장을 내다봤다. "당신은 여행에서 돌아온 뒤의 예정이 어떻게 되오?"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겠죠. 기분이 내키면 호수가 있는 지방으로 이삼 일 여행할지도 모르겠지만요." "그것도 좋겠군." 긴 침묵 끝에 마침내 에이드리언은 몸을 돌려 방향을 바꾸었다. "자, 그럼 즐거운 여름 휴가가 되시오!" "당신도요, 에이드리언. 또 다음 학기에 만납시다." 로잘리가 내민 손을 그는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로잘리, 실은… 실은, 그…" "실례, 길을 조금 비켜 주시오." 웰리스의 냉정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알고 보니 두 사람은 문 바로 앞에서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스 팔람, 미안하지만 시간을 조금만 내줘야겠소… 될 수 있다면 바로 지금." 웰리스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두 사람 사이를 빠져 나가 방으로 들어갔다. "자, 그럼 몸 건강하세요, 에이드리언!" 로잘리는 가냘픈 목소리로 말하며 웰리스의 뒤를 따랐다. 문을 닫으려 하며 돌아다보니 에이드리언의 험악한 얼굴이 무언중에 신랄한 비난을 퍼붓고 있었다. "로잘리, 거기 앉아요." 데스크 저쪽에서 웰리스는 접대용 의자를 가리켰으나, 로잘리가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을 보자 힘없이 어깨를 움츠렸다. "전번날 일에 대해서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다고 해도 용서해 주지 않겠지?" 주저하면서 로잘리를 쳐다본 시선은 곧 데스크로 떨어졌다. "당연하지. 변명할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것을 나도 골수에 사무치도록 깨닫고 있지. 그러나 단 한 가지만 당신에게 알려 줄 것이 있소, 로잘리. 제발 부탁이니 거기에 앉아 이삼 분이라도 좋으니 나와 대화를 나눌 수 없을까?" 웰리스의 너무나 진지하고 지친 듯한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감동되어, 로잘리는 조용히 의자에 가서 앉았다. "고맙소." 웰리스는 중얼거리며 잠시 동안 생각한 끝에 말을 이었다. "우선 당신에게 사과해야 할 일이 있어. 아내가 다른 남자와 사랑의 도피를 했다는 것은 전부 내가 조작한 이야기였어. 그러나 세상에 알려져 있는 것처럼 나의 행실이 가출의 직접적인 방아쇠도 아냐. 문제는 훨씬 뿌리가 깊어. 딸을 심한 난산 끝에 낳은 뒤 아내는 그… 완전한 성불구자가 되고 말았어. 같은 지붕 밑에서 살고는 있어도 실질적으로는 생판 남과 같은 상태가 몇 년 동안 계속되었지. 그런 아내일수록 위로해 줘야 한다는 둥 남들은 제멋대로 말하지만, 그런 생활을 보내고 있는 남자의 괴로움은 본인 이외는…" 웰리스는 괴로운 듯이 잠깐 주춤거렸다. "내가 많은 여성과 거리낌없이 놀아나는 것에 불만을 품은 아내는 더욱더 나를 꺼리면서 피하더니 마침내 가출해 버렸어. 그러나 당신에 대한 나의 심정은 절대로 일시적인 유희는 아니었어… 이것만은 거짓말이 아니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내가 진심으로 딸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 웰리스는 호소하듯이 얼굴을 들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멜라니를 위해서 다시 집에 와줄 수 없을까? 왜 당신을 데리고 오지 않느냐고, 딸애는 매일 밤 나를 졸라대는군.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 기나긴 침묵이 흐른 뒤, 로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멜라니를 위해서라고 말씀하시면, 저도 거절할 수가 없군요. 제가 저의 자존심도, 세상에 대한 평판도,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는 약간 떨려 나왔다. "그리고 그리던 꿈까지 희생하며 당신과 사귀어 온 것은 오로지 그애 때문이었으니까요." 그날 밤 멜라니는 몹시 기다리고 있었다. '두 번째 엄마'의 내방을 미친 듯이 기뻐하며 맞아들였다. 신이 나서 떠들다가 지쳐 침대에 들어가 로잘리의 잘 자라는 키스를 받으면서, 소녀는 행복스러운 듯이 중얼거렸다. "진짜 엄마도 꼭 돌아오리라고 생각해요." 이튿날도 로잘리는 멜라니를 만나러 가서, 소녀를 재우고 난 후 웰리스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헤어질 때 그는 말했다. "나는 지금 변호사에게 의뢰해서 아내의 거처를 찾고 있소. 만일 만나더라도 아내가 뭐라고 말할지는 전혀 모르겠으나 나는 돌아와 달라고 성심성의를 다해 설득해 볼 참이야." "부인께서도 반드시 알아 주실 거예요. 이번에야말로 행복한 가정이 되도록 저도 진심으로 빌겠어요." "앞날의 일은 알 수 없지." 웰리스는 비로소 쓸쓸한 미소를 띠었다. "잘 자요, 로잘리. 즐거운 여행을…" 방으로 올라가려고 하는 로잘리를 어머니가 불러세웠다. "한 시간쯤 전에 에이드리언이 들렀다가 갔다." 딸의 낙담한 얼굴을 바라보면서, 어머니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네가 웰리스 메이슨 집에 갔느냐고 묻기에 나는 무심코 그렇다고 말했더니, 그가 몹시 화가 난 것 같았어. 너에게 미안해서 어떻게 하지?" "괜찮아요, 엄마. 나는 웰리스를 만나러 간 것이 아니라, 멜라니를 만나러 갔을 뿐이에요. 아무도 믿어 주지 않겠지만." "내가 믿고 있다고 해도 위로가 되지 않겠니?" "그럴 리가 있어요? 고마와요, 엄마." 어머니의 볼에 키스를 하고, 로잘리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여행의 전도를 축복이라도 하는 듯이 월요일은 아침부터 쾌청한 날씨였다. 로잘리가 서둘러서 조반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아까 막 도착한 우편물 다발을 가지고 나타났다. "출판사에서 전번에 말한 교정쇄가 이제 왔어. 그래서…" 아버지가 기침을 했다. "요즈음의 우편은 믿을 수가 없으니까, 가능하다면 네가 에이드리언의 본가에 들러서 직접 이 교정쇄를 전해 주면 나도 안심하고 여행을 떠날 수 있겠구나. 그렇더라도 길을 많이 돌아가야 한다면 무리하게 전해 달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그렇게 많이 돌아가는 것도 아니니까 제가 맡겠어요. 에이드리언이 기뻐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서류를 건네주고 곧 돌아오면 되니까요." "그럼 식탁 위에 놓아 둘 터이니 잊지 말고 가지고 가거라." 아버지는 어깨의 짐을 내려놓은 듯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주방을 나갔다. 양친의 사소한 계략을 알고 있는 로잘리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짐을 죄다 꾸려 놓고 부모와 작별의 키스를 했다. "두 분 다 건강하게 다녀오세요. 저의 일은 전혀 걱정 마시고." 큰길로 빠지는 모퉁이에서 고개를 돌린 로잘리는 문앞까지 나와 전송해 주는 양친에게 손을 흔들며 힘차게 걸어갔다. 그러나 출발 직전에 부탁받은 아버지의 용무가 작은 불안의 씨가 되어 그녀의 가슴에 응어리져 있었다. 기대한 것보다 훨씬 상쾌하고 즐거운 여행이었다. 요크셔의 자연미를 충분히 만끽하면서 로잘리는 계속 북쪽으로 올라갔다. 어느 날 마침내 에이드리언이 살고 있는 마을의 버스 정류장에서 내렸다. 로잘리는 어깨의 배낭을 발밑에 내려놓고 불안한 기분으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오른쪽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주소를 확인할 필요도 없이 번지수는 완전히 암기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물으니, 그곳은 여기에서 아주 가깝다고 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끼면서, 로잘리는 행인이 가르켜 준 길을 걸어가다 마침내 찾던 집 앞에 섰다. 좁은 길이 난 작은 석조 건물이었다. 세공을 가한 철문이 질박한 집을 한층 돋보이게 했다. 현관의 밝은 푸른색 문은 최근에 새로 칠을 한 듯 싱싱한 페인트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로잘리는 조심성 있게 문고리를 잡았다. 노크하는 소리가 로잘리의 귀에는 마치 조용한 주택가를 진동시키는 것처럼 크게 울렸다. 이윽고 집 안에서 작은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문이 열렸다. 백발이 눈에 띄기 시작한 복스럽게 생긴 부인이 로잘리의 눈앞에 서 있었다. 남의 마음을 풀어 주는 온화한 눈, 그리고 그 얼굴, 사진 그대로였다. 이대로 도망쳐 돌아가고 싶은 어색함을 진정시키기 위해, 로잘리는 숨을 크게 한번 들이마셨다. "클레이포드 부인이십니까? 저는 일전에 전화를 올린 로잘리 팔람입니다. 에이드리언은 집에 계신가요?" 온화한 얼굴이 일순 환하게 빛났다. "어머나! 이 먼 곳을 잘 찾아오셨네. 이전부터 꼭 한번 보고 싶어했는데. 자 어서 들어와요. 아들은 이층에 있어요. 곧 불러오겠수." 그러나 에이드리언은 이미 계단을 내려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걸어오고 있는 중이었다. "짐은 거기 모퉁이에 놓아 두세요. 우선 차를 드려야지… 에이드리언 멍청히 서 있지 말고 물을 끓여. 미스 팔람은 긴 버스 여행으로 지쳐 있어. 버스로 왔지요?" "네, 버너드 캐슬에서부터 줄곧 버스를 타고 왔습니다." 멍청히 선 채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 아들을 보고, 클레이포드 부인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유령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어찌 된 일이야? 갑자기 벙어리가 돼 버렸니?" 그 소리를 듣고 에이드리언은 갑자기 꿈에서 깨어난 듯한 얼굴이 됐다. "아니, 로잘리. 어쩐 일이오?" 어느 구석을 찾아봐도 환영하는 낌새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를 듣고, 로잘리는 와앙 하고 울음보를 터뜨릴 뻔했다. "참고서의 교정쇄를 갖고 왔어요. 우편보다 직접 건네는 것이 확실하다고 아버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에이드리언은 홱 등을 돌리며 '주전자를 불에 얹어 놓고 오겠어' 하고는 주방으로 사라졌다. 솟아나려는 눈물을 참으려고, 로잘리는 무던히 애를 썼다. 대환영을 기대하고 온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냉담하게 대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클레이포드 부인은 로잘리의 사양 따위는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고 다그치듯이 거실로 안내했다. "어서 앉아요, 로잘리… 이렇게 불러도 괜찮을까요?" 로잘리는 고개를 까딱이며 소파에 앉았다. 에이드리언의 어머니도 그 옆에 앉았다. "저애의 버릇없는 행동에 기분 나빠 하지 말아요. 정말 애먹이는 자식이라니까." "괜찮습니다.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로잘리는 하마터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방 안을 돌아보았다. 작긴 하지만 주인의 취미가 고상함을 알 수 있는 방이었다. "좋은 집이군요. 양지 바르고…" "오후에는 특히 햇볕이 많이 들어온다우. 오늘은 날씨가 참 좋네요. 여행중 날씨는 어땠어요?" 로잘리가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에, 에이드리언이 홍차를 들고 왔다. "컵, 소서, 트레이… 어때, 집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지?" 비로소 에이드리언이 웃는 얼굴을 보이며 말했다. 로잘리도 웃었다. "앉아만 있는데 커피가 나오다니, 멋져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던 클레이포드 부인은 아들이 로잘리가 가정에서 맡은 역할을 이야기하자 눈이 점점 휘둥그래졌다. "대학에서 하는 일 밖에도요? 정말 몸이 잘 견디어내는군. 더구나 여름 휴가쯤은 느긋하게 쉬는 줄 알았는데, 도보 여행을 하다니!" "이 아가씨를 삼십 분 이상 집에 있게 하면, 아무리 말려도 반드시 주방으로 침입할 겁니다, 어머니." "삼십 분이라니, 큰일날 소리. 좀더 오래 머물러 줘야지. 지금부터의 예정은?" "오늘 밤은 이 마을 여관에서 묵고, 내일은 부근의 경치 좋은 곳을 구경한 뒤, 저녁때에 달링턴으로 가려고 해요. 거기서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이 돼 있거든요." "그럼, 그 친구와 만날 시간까지는 아직 확실한 예정이 서 있지 않나요?" 고개를 끄덕이는 로잘리를 보고, 클레이포드 부인은 아들에게 얼굴을 돌렸다. "에이드리언, 오늘 밤은 집에서 쉬시도록 네가 부탁드리렴." "여기는 어머니 집이니까, 직접 부탁하시는 것이 좋을 텐데요. 하지만 저 아가씨한테 내 줄 방이 없잖습니까. 어디에서 쉬게 하죠?" "네 방을 쓰시게 하면 되잖니." "뭐라구요… 제 방에서?" "너는 침낭을 가지고 와서 이 방에서 자면 돼." "클레이포드 부인, 그런 일은 전…" "당신은 잠자코 있어." "너야말로 좀 잠자코 있어. 이 집은 확실히 내 집이고, 그리고 이분은 내 손님이야." 클레이포드 부인은 다정하게 로잘리를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언, 너는 아가씨를 보는 눈이 전혀 틀려먹었어. 로잘리의 어느 곳을 봐도 사치스러운 데가 없지 않니?" 에이드리언은 로잘리의 푸른 슬랙스와 갈색의 윈드파카, 그 밑에 들여다보이는 흰 티셔츠를 바라보았다. 바람 속을 걸어왔기 때문에 그녀의 머리는 흐트러지고 뺨도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이 아가씨는 변신술이 능한 사람입니다. 어느 것이 진짜 로잘리 인지, 저는 도무지 알아낼 수가 없어요." 어머니는 아들의 얼굴을 살피듯이 본 뒤에 가만히 머리를 숙이고 있는 로잘리의 손을 잡았다. "오늘 밤은 여기서 머물러 주겠지요?" "감사합니다. 정말 폐가 되지 않을런지…" "결정됐군요, 어머니." 에이드리언은 홍차 잔을 치우기 시작했다. "주방은 이쪽이야, 로잘리. 에이프런은 어머니 것이라도 괜찮겠지?" "에이드리언! 로잘리를 여기서까지 부려먹으려고 하다니, 너란 자식은 정말…" "아녜요, 어머니. 보세요, 본인이 벌써 그렇게 마음먹고 있잖습니까." 그는 어느 사이엔가 주방에 들어와 있는 로잘리에게 행주를 던져 주었다. "오늘은 당신이 쟁반을 닦을 차례야. 때로는 임무를 바꾸는 것도 괜찮겠지." 그러나 어머니는 로잘리의 손에서 행주를 뺏고 말았다. "이분은 나와 함께 윗층으로 간다. 자, 같이 가요, 로잘리. 그러나 놀라지는 말아요. 아들의 방이 정신없이 어질러져 있더라도 말예요." 계단을 올라가면서 클레이포드 부인은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에이드리언이 급히 쫓아왔다. "할수없지, 갑작스럽게 찾아왔으니. 마침 작업중이라서 온 방 안에 전기 부품이 흐트러져 있지만, 거기에는 두 분 다 손을 대지 마세요. 내가 직접 치울 테니까." 로잘리는 미소를 지었다. "침대만 빌려 주신다면, 아무리 어질러져 있어도 저는 상관없어요." "그런가? 그렇다면…" "안 돼, 에이드리언. 깨끗이 치워 다우. 잠깐 실례하겠어요, 로잘리. 시트를 가지고 올 테니." "시트는 깔려 있는데." "이러니까 남자란 도대체!" 어머니가 새침해져 나가자, 에이드리언은 묵묵히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쫓아내는 것 같아서 안 됐군요. 전 이렇게 폐를 끼치려고 온 것은 아닌데…" "괜찮아." "지금부터라도 여관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전…" "끝난 이야기는 다시 되풀이하지 말아요." 그것으로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치웠냐?" 클레이포드 부인이 세탁한 새 시트를 가지고 되돌아왔다. "수고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시트 까는 일을 도우면서 로잘리가 말했다. "당치도 않은 소리. 와준 것만 해도 우리는 정말 기쁘다우. 그렇지, 에이드리언?" "네, 그렇다고 해둡시다." 아들은 지극히 관심이 없다는 듯이 말했다. "이애의 버릇 없음을 용서해 줘요." "나는 천성이 정직해서 그래요, 어머니." "정말 할수없는 녀석이군! 아, 그렇지 그래. 베개 커버를 가지고 와야지." 어머니는 또 허둥지둥 방을 나갔다. "죄송해요, 에이드리언. 아침이 되면 곧 나가겠어요." 로잘리는 목소리가 떨리는 것에 신경을 쓰면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는 방을 치우는 데 정신이 팔려서 그런지 대답이 없었다. 그날 밤, 클레이포드 부인은 손수 정성들여 만든 요리를 로잘리에게 대접하면서, 말수가 적은 아들 몫까지 쾌활하게 지껄이며 로잘리도 이야기를 하게끔 유도했다. 이윽고 아들도 어머니의 끈기에 부쳤는지 조금씩 이야기에 끼어들게 되자, 로잘리는 어느 정도 마음을 놓았다. 식사가 끝나자 로잘리는 이 집 주부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주방에서 뒤치다꺼리를 도왔다. 에이드리언은 어머니를 보고 거 보라는 듯 웃고 있었다.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 줘요, 로잘리." 거실로 되돌아와서 느긋하게 쉬고 있을 때, 클레이포드 부인이 로잘리에게 이야기를 걸어왔다. 두 사람은 나란히 소파에 앉고, 에이드리언은 혼자서 안락의자에 앉아서 오디오 관계의 전문 잡지를 열심히 읽고 있었다. "아버님에 대해서는 대충 들어 알지만, 어머님은 어떤 분이우?" "어머니도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대단히 우수한 학자라서 제가 태어나지만 않았다면 반드시 박사 학위를 획득했을 거예요." "그러나 아가씨 같은 따님을 얻었으니까, 박사 학위를 따는 것보다 훨씬 행복하다고 어머님께서는 생각하고 계시겠지요." "네… 아마 그렇게…" "나는 몹시 딸을 얻고 싶었다우… 그러나 그것만은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지. 그래서 아들이 딸 역할을 대신할 사람을 데리고 오겠지 하고, 그것만을 기대하며 지내고 있어요. 데려오겠지, 에이드리언?" "네에! 아아 또 그 이야긴가요! 데리고 오고말고요. 제가 비실비실하는 늙은이가 돼서 독신생활을 즐길 힘만 빠진다면." "그때까지 내가 살아 있을 것 같니, 이 녀석아?" "물론 어머니는 영원히 살아 계셔야 해요." "저런 녀석!" 어머니는 기쁜 듯이 웃었다. "그러나 너는 반드시 착한 애비가 될 텐데…" 다시 책에 눈을 돌리는 아들을 보고 쓸쓸한 듯이 한숨을 쉰 클레이포드 부인은 가라앉은 목소리를 돋우며 로잘리에게 물었다. "내일은 어디를 구경할 참이우?" 로잘리는 내일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곁에 있기만 해도 마음이 느긋해지는 듯한 이 부인과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에게 작별을 고할 때를 생각하면, 당장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분명히 하이 포스 폭포라든가 하는 유명한 폭포가 이 근처에 있다고 들은 일이 있는데, 거기에 가보려고…" "에이드리언, 내일은 할 일이 없지? 하이 포스 폭포로 가는 길은 버스로는 불편하니까, 로잘리를 차로 안내해 드리렴. 가는 김에 다른 곳도 둘러보는 것이 좋겠어. 내가 도시락을 만들어 줄 테니." 책에서 얼굴을 든 에이드리언의 표정을 보고 로잘리는 울음보가 터지기 전에 급히 말참견을 했다. "제발 마음쓰지 마세요, 클레이포드 부인. 적당한 버스가 없으면, 곧바로 달링턴으로 가서 마을 구경만으로도 시간을 보낼 수 있어요." 에이드리언의 어머니가 갑자기 일어서더니, 책장에서 한 권의 책을 끄집어내어 아들의 눈앞에 불쑥 내밀었다. "요크셔의 관광 안내책이다. 로잘리에게 하이 포스 폭포의 사진을 보여 드려라. 그 폭포를 그냥 지나쳤다가는 후회하리라는 것을. 사진을 보면 로잘리도 알게 되겠지. 에이드리언, 나하고 자리를 바꿔. 자, 빨리." 부아가 치밀어오른 듯한 어머니의 목소리에 마지못해 일어선 그는 길다랗게 한숨을 쉬더니, 로잘리의 곁에 털썩 앉아서 책을 펼쳤다. 에이드리언이 책장을 훌훌 넘기더니 페이지 한쪽을 몽땅 차지한 커다란 사진을 가리켰다. "이것이 하이 포스야. 설명문을 읽어 줄까?" 로잘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소리내어 읽기 시작했다.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이에 어깨가 서로 닿을락말락하자 로잘리의 가슴은 애처롭게 뛰놀기 시작했다. "너무 상세한 해설을 들어서 오히려 흥미가 없어지지 않았어?" 그의 갑작스런 질문에, 로잘리는 퍼뜩 얼굴을 들었다. 그의 갈색 눈이 겨우 십여 센티 앞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급히 얼굴을 수그렸다. "아뇨, 더욱더 가보고 싶어지네요. 아주 멋진 곳 같아요." "그렇고말고. 모셔다 드려, 에이드리언." 클레이포드 부인이 열심히 참견했다. "알았어요, 어머니." 에이드리언은 한 팔로 로잘리의 어깨를 두르고, 나머지 한 팔로는 다시 책장을 넘기면서 그 지방에 있는 여러 명소를 소개했다. "훌륭한 곳뿐이네요. 이번 여행에서 모든 곳을 도저히 둘러볼 수 없는 게 참으로 유감스럽군요." 로잘리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면 언제라도 오구려." 클레이포드 부인은 일어섰다. "이젠 늦었으니, 자기 전에 무엇이든지 따뜻한 것이라도 가져다 드릴게, 로잘리. 무엇을 좋아해요? 우유나 코코아?" "이 사람은 우유에 코코아를 약간 탄 것을 좋아해요. 그것도 침대 안에서 마시는 것을." 그의 어머니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떻게 해서 네가 그런 일을 알고 있지?" 에이드리언은 싱긋이 웃으며, 로잘리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그런 표정은 짓지 마세요, 어머니. 로잘리가 조금 병이 나서 제가 간호하는 흉내를 낸 일이 있었거든요." "그랬었나." 맥이 빠진 듯이 말하고, 주방으로 향하는 그녀에게 로잘리가 말했다. "도와드리게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아가씨는 거기서 천천히 쉬고 있어요." 어머니의 모습이 사라진 순간, 에이드리언은 재빨리 일어나서 관광 안내책을 제자리에 꽂아 놓고 안락의자에 앉아서 먼저 보던 잡지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로잘리는 어슬렁어슬렁 창문으로 걸어갔다. 맞은편 집의 창에도 불이 켜져 있었다. 북쪽 마을의 고요한 밤이었다. 창문을 등지고 섰다. 에이드리언의 어머니가 빠져 나간 방은 갑자기 썰렁하게 느껴졌다. 로잘리는 가늘게 몸을 떨었다. "추운가?" 에이드리언이 물었다. 그녀의 존재를 잊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히터를 넣어야겠어. 7월 말인데도 오늘 밤은 몹시 서늘하군. 여긴 북쪽이라서 그래." 우유를 마시면서 잡담을 한 뒤, 클레이포드 부인은 로잘리를 데리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수건은 이것을 써요. 그리고 괜찮다면 잠옷도…" "고맙습니다. 그러나 두 벌을 준비해서 여행을 하고 있으니 염려마세요." "그래요. 그럼 편히 자요, 즐거운 꿈을 꾸면서." 불을 끈 뒤에도 로잘리는 쉽사리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 방에서 에이드리언은 매일 기거하고 있다. 이 책상도, 저 라디오도 에이드리언의 것… 로잘리는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마침내 깊은 잠에 빠졌다. 9 가벼운 노크 소리에 로잘리는 눈을 떴다. 커튼의 틈 사이로 아침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로잘리, 들어가도 괜찮아?" 대답하기도 전에 가운만 입은 에이드리언이 들어왔다. 로잘리가 얼른 일어나자, 그는 두 손에 하나씩 들고 온 홍차 잔 중의 한 잔을 그녀에게 건네면서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막 잠에서 깬 얼굴까지 귀엽게 보이다니, 어떻게 된 것일까?" "마치 꾸중하는 투로군요." "그렇게 들렸어?" 그는 커튼을 젖히고 맑게 갠 푸른 하늘을 쳐다보면서 홍차를 홀짝홀짝 마셨다. "당신은 태양을 벗삼아 여행을 하는 것 같군." "그런 차림을 한 채 여기에 들어오시면, 어머님께서 걱정하시지 않겠어요?" "걱정할 까닭이 없지. 어머니는 우리를 결혼시키고 싶어하시거든. 당신은 눈치채지 못했나?" 에이드리언은 자조에 가까운 웃음을 지었다. "어머니는 성급하셔서 곤란해. 나는 어머니께 손자 얼굴을 보이기 위해서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해야 될 처지에 놓여 있다구." 냉소를 품은 말 한마디가 로잘리의 가슴을 도려내는 듯했다. "그래요, 당신은 결혼을 해야만 해요. 아무리 잘난 체 뽐내더라도 대꾸 한마디 못하고 복종하는 얌전한 여성을 빨리 발견하세요. 여성의 가치 따위는 조금도 인정하지 않고, 오직 머릿속에는 수학 공식만 가득차 있는 그런 남편에게도 기꺼이 시중을 들어줄 여자가 아니면 안 되겠지만." 에이드리언이 천천히 침대 곁으로 되돌아왔다. "나의 성격 분석을 더 계속하시지. 부추김을 받는 것도 그다지 나쁜 기분은 아니니까." "더 이상 어떻게 부추겨요? 새삼스럽게 말하지 않아도 당신의 남성적 매력은…"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 돼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가려고 하는 로잘리의 두 손목을 힘센 그의 손이 맞잡았다. 다음 순간, 그녀는 강열한 키스 공세를 받았다. 굵다란 팔이 목을 껴안고 그의 손가락이 어깻죽지를 파고들어왔다. 뜨겁고 긴 키스가 끝난 뒤에 에이드리언은 조금 얼굴을 들더니 증오라고밖에 볼 수 없는 험한 눈으로 로잘리를 노려봤다. 그 날카로운 눈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자기 몸 속에 사납게 불어대는 거센 바람과 무엇보다도 에이드리언에게 사랑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잔혹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로잘리는 눈을 딱 감아 버렸다. 에이드리언은 천천히 일어섰다. "앞으로는 말투에 좀더 신경을 쓰는 것이 일신상 좋겠어." 로잘리는 눈물에 젖은 눈을 떴다. "에이드리언, 왜 그렇게 저를 미워하세요?" "내가 당신을 미워해? 그러나 만일 그렇다 치더라도, 그것은 피장파장일 텐데? 그렇잖아, 로잘리?" 로잘리는 자기의 눈동자가 진실을 말할까 봐 두려워서 또 두 눈을 감았다. "에이드리언!" 계단 밑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침 인사 키스는 그쯤하고 내려와라. 로잘리가 옷을 갈아입지 못하게 그곳에 있지 말고. 결혼하면 언제든지 같이 있을 수 있잖아?" "내가 말한 대로지?" 에이드리언은 싱긋 웃더니, 그대로 방을 나가 버렸다. 조반이 끝나자 로잘리는 짐을 챙기기 위해 이층으로 올라갔다. 에이드리언은 마루 위에 전기 부품을 늘어놓고 계속 무엇인가를 조립하고 있었다. 그녀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시트를 개고, 대신 어제까지 깔려 있던 시트를 펴서 침대를 정돈했다. 입속으로 무엇인가를 중얼거리고 있던 에이드리언은 갑자기 로잘리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뭘하느냐 말이지? 트랜지스터를 조립하는 중이야. 당신한테도 이게 있어?" "있기는 있지만, 이전에 떨어뜨려서 그때 커다란 금이 가 접착 테이프 덕택으로 겨우 붙어 있어요." 그는 경멸하듯이 휘파람을 불고는 한순간 골똘히 생각하다가 갑자기 말했다. "이걸 당신 줄까?" "그렇지만… 저, 값은 얼마나…" "내가 당신한테 선사하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담아서!" 바보 취급을 하는 듯한 웃음소리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고 로잘리는 말했다. "감사해요. 언제쯤 완성되나요? "삼사 일 후면 돼. 우송해도 좋고, 다음 학기가 시작되고 난 후에 건네받겠대도 좋아. 어느 쪽으로 하겠어?" "마음대로 하세요." 그녀는 배낭을 들어올렸다. "어머님께서 샌드위치와 보온병을 준비해 놓았으므로, 언제라도 출발할 수 있는데…" 에이드리언이 시계를 봤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커퍼를 마시고 곧 출발하지." 옷을 갈아입겠다고 하는 그를 남겨 놓고, 로잘리는 밑으로 내려갔다. 커피를 준비하던 클레이포드 부인은 로잘리의 도움을 단호히 거절하고는 그녀를 주방에 있는 의자에 앉게 하여 가족의 일, 대학의 일, 학생 시절의 이야기 따위를 꼬치꼬치 캐물었다. 묻는 대로 대답하면서, 로잘리는 에이드리언의 모친에게 이상하게 그립고 애처로운 정이 들어 파고들듯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거실로 커피를 나르고 있을 때, 이층에서 에이드리언이 내려왔다. 트위드 차림이 그에게는 매우 잘 어울렸다. "일정은 정했어?" 어머니가 물었다. "윈티 다리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그러고 나서 하이 포스로 갈 예정입니다." "샌드위치도 좋지만, 하이 포스의 호텔에서 제대로 점심식사를 하도록 해라. 로잘리를 점심을 굶긴 채 달링턴에 데리고 가서야 되겠니." 로잘리는 깜짝 놀랐다. "달링턴까지는 버스로 가겠습니다. 그렇게 먼 데까지 데려다 주다니, 그렇게까지 해서는…" "안 돼요, 안 돼. 내가 그렇게 정한 이상 " "그리고,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야." 에이드리언도 무뚝뚝하게 어머니를 편들었다. "하이 포스에서 곧장 달링턴으로 갈 건가?" 어머니가 몸을 내밀면서 물었다. "시간이 없잖습니까. 아무리 차를 타고 간다고 해도 반나절 가지고는 그렇게 여기저기를 돌아다닐 수 없어요." "그럼 남은 장소는 다음 기회에… 에이드리언, 로잘리는 또 찾아와 주겠지?" "네… 아마." 관심이 없다는 듯한 말투에, 그의 어머니는 약간 실망한 듯이 어깨를 떨어뜨렸다. 에이드리언은 재빨리 커피를 다 마시고 일어섰다. "출발하지. 샌드위치를 가지고 오겠어." 에이드리언이 주방으로 들어가자, 로잘리도 따라 일어섰다. "여러 가지로 마음을 써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감사를 표해야 할 사람은 나예요. 모처럼 가깝게 됐는데, 벌써 작별이라니…" 온화한 얼굴에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미소가 감도는 것을 보는 순간, 로잘리는 반사적으로 다가가서 포동포동한 몸을 꼭 껴안았다. 내 아들은 완고한데다 요령이 없어서 저대로 있다가는 인생의 행복을 뻔히 보면서도 놓치고 말 거예요. 나는 그것을 생각하면…" 그 이상은 말하지 않고, 클레이포드 부인은 로잘리의 볼에 키스를 했다. 답례 키스를 하려고 했을 때, 로잘리는 에이드리언과 똑같이 생긴 눈에 반짝이는 눈물을 보았다. "뵙게 돼서 기뻤습니다. 아무쪼록 건강하십시오, 클레이포드 부인." 차를 타고 떠나가는 젊은 두 사람을 에이드리언의 어머니는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있었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로잘리는 에이드리언의 침묵에 가슴을 죄고 있었다. "상상한 대로 정말 훌륭한 분이었어요." 막연히 로잘리가 중얼거리자, 그때서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어머니도 같은 말씀을 하셨어. 마음이 서로 통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 털어내듯이 내뱉는 목소리에, 로잘리는 자기의 인내심에 한계를 느꼈다. "저 때문에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좋아요. 제가 부탁해서 차에 탄 것도 아니니까." 지겹다는 듯이 한숨을 쉰 에이드리언은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고 차를 멈추었다. "분명하게 말해. 당신은 나랑 같이 있는 것이 싫어?" "당신은요?" "묻고 있는 것은 나야. 몇 시간쯤은 참으면서 나와 사귀어도 상관없다면 예정대로 할 것이지만, 그것조차 할 수 없다고 한다면 여기서 헤어지자구. 나는 당신 결정에 따르겠어. 자, 어떻게 할래?" "안내해 주시면 저도 기쁘겠는데…" "그렇다면 그것으로 좋아." 에이드리언은 다시 엔진의 시동을 걸었다. 푸른 초원을 최고 속력으로 달려 빠져나온 차는 차츰차츰 산길로 접어들었다. 나무들의 틈새로 티즈 강을 내려다보며 달려갔다. 눈부신 산뜻한 초록의 숲과 번쩍번쩍 빛나는 수면이 자아내는 풍광에 로잘리는 근심걱정도 잊어버리고 환성을 질렀다. "우리 나라에도 이런 경치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어요!" "조금은 슬기롭게 됐다는 게지." 에이드리언이 농담을 했다. "그러나 장대한 자연의 참모습을 보려면 요크셔의 황야에 가야 할걸." "이번 여행에서 황야도 조금 봤지만, 일정 때문에 겨우 가장자리만 걸어왔을 뿐이에요." "그렇다면 어머니의 말씀도 있고 하니 또 오면 되지 뭘. 단 내가 안내역을 맡는다는 것은 보장할 수 없지만." 로잘리는 입을 다물었다. 뉴비깅이라는 작은 마을의 변두리에서 차를 멈춘 에이드리언은 '여기부터 걸어가야 해' 하더니, 샌드위치가 들어 있는 배낭을 메고 걷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가느다란 내리막길을 내려가니 이윽고 티즈 강을 건너가는 작은 적교(弔橋)가 보였다. 강 하류에 작은 폭포가 있고, 맑은 물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떨어지고 있었다. 다리 곁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적교라는 이 다리의 유래와 함께, 한번에 두 사람 이상 건너서는 안 된다는 경고문을 쓴 나무 푯말이 서 있었다. 약간의 산들바람에도 흔들릴 것 같은 다리를 두려운 듯이 바라보는 로잘리에게, 에이드리언은 웃으면서 말했다. "걱정할 건 없어. 사람이 떨어져 죽은 사고는 이백 년쯤 전에 한 번 있었을 뿐이야. 당신부터 먼저 건너갈래?" "아니예요, 당신이 먼저." "좋았어." 에이드리언은 재빨리 다리를 건너갔다. 다리가 크게 흔들렸다. 로잘리는 숨을 죽였다. 그러나 그는 금세 다리를 건너가서 돌아보며 외쳤다. "자, 이번에는 당신 차례야. 두려워하지 말고 건너오라구!" 로잘리는 미덥지 않은 난간에 의지하며 천천히 걸어갔다. 밑을 내려다보니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두려워서 흠칫거리며 겨우 건너편까지 당도한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에이드리언은 배꼽을 잡고 웃고 있었다. "겁쟁이 아가씨치고는 대단한 모험을 해냈군!" "바람이 거센 날에는 건너고 싶지 않은 다리예요." "그렇지. 그러나 내가 어렸을 때는 일부러 다리를 흔들어서 어머니가 비명을 지르기도 했지." "당신도 예전에 꽤 개구쟁이였던 모양이군요." "옛날에는." 그는 갑자기 상념에 잠겨 버렸다. 로잘리는 배낭에서 카메라를 끄집어내어 강가의 모래밭으로 내려갔다. 시끄스러운 물소리를 내면서 떨어지는 폭포를 카메라에 담고 둑으로 올라가니, 에이드리언은 풀 위에 앉아 다리를 쭉 뻗고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초점을 맞추고 예고도 없이 셔터를 누른 그녀는 깔깔거리며 카메라를 배낭에 넣었다. "아니 저게! 어디 두고 보자." 로잘리는 시치미를 떼고 에이드리언의 곁에 앉으려고 하다가, 그만 배낭의 끝에 발이 걸려 그의 두 다리 위에 넘어지고 말았다. "이거야말로 안성맞춤이군, 나쁜 애는 엉덩이를 때려 주라는 것이겠지." 에이드리언은 손바닥으로 가볍게 그녀의 엉덩이를 때리고 나서 로잘리를 반듯이 눕혔다. "다리 위에 넘어져서 정말 죄송해요." 그녀는 얼굴이 새빨갛게 되어 일어나려고 했으나, 에이드리언은 억누르고 파고들듯이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당신은 남을 볼 때마다 언제나 그런 식으로 키스해 달라는 듯한 얼굴을 해?" "그런 얼굴을 한 적 없어요." "자기는 자기 얼굴을 볼 수 없으니까." 갑자기 에이드리언은 로잘리를 끌어안고 숨이 막힐 것 같은 키스를 퍼부었다. 겨우 그의 팔에서 풀려 나온 뒤, 로잘리는 가만히 몸을 일으켜 흐트러진 머리를 손으로 매만졌다.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대로 있는 것이 더 어울리는데." 놀리는 듯한 말소리를 무시하고 로잘리는 일어나서 에이드리언의 배낭에서 그의 어머니가 만들어 준 점심 꾸러미를 끄집어냈다. 폭포 소리와 새의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면서 두 사람은 말없이 샌드위치를 먹고 보온병에 든 뜨거운 홍차를 마셨다. 점심을 끝내고 나서 로잘리는 풀 위에 반듯이 누워 하늘을 바라봤다. 에이드리언도 옆에 드러누워서 눈을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여름의 태양이 눈부시게 내리쬐고, 물소리도 기분 좋게 귀를 간질렀다. 갑자기 로잘리는 자고 있는 줄로만 여기고 있던 에이드리언의 목소리에 몽상에서 깨어났다. "웰리스 메이슨은 전부터 품고 있던 야망을 마침내 이루었다더군." 로잘리는 일어나 앉았다. "무슨 뜻이죠?" "물론 당신에 관한 일이지." "저는 머리가 둔해서 무슨 말인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자신도 놀랄 정도로 냉정해져 있었다. 에이드리언은 한 팔을 짚고 몸을 일으키더니 분명하고 똑똑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 그놈은 당신 방위선을 뚫고 자기가 바라던 바를 당신에게서 빼앗아 버렸다, 이런 뜻이지. 이만큼 말해도 아직 모르겠다면, 더욱 노골적인 표현을 쓸 수밖에 없지." "당신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군요?" "내가 무엇을 생각하든, 당신에게 책망할 자격이나 있어? 그런 사건이 있은 일주일 뒤에 당신은 벌써 마음도 즐겁게 그놈 집을 드나들고 있다는 말을 들었어. 꽤 그 남자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지. 여행도 가지 않고 줄곧 그놈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고 싶은 것이 당신 본심 아냐?" 로잘리의 침묵을 뒤가 켕기는 증거라고 받아들인 듯이, 그의 말은 더욱더 열을 띠었다. "그날 밤 당신이 모처럼 그와 즐기려고 하는 참에 바라지도 않은 방해물이 나타나 지금도 나를 원망하겠군? 쓸데없는 간섭을 해서 정말 미안하게 됐어." 로잘리는 일어서서 배낭을 어깨에 메고 걷기 시작했다. "버스는 여러 시간 기다려야만 해." 차디찬 목소리를 등으로 받으며 로잘리는 걸음을 재촉했다. 침착한 걸음걸이로 적교를 건너 아까 지나온 둑의 오르막길을 올라갔다. 어디를 가든 상관없었다. 어쨌든 될 수 있는 대로 멀리까지 가야겠다는 결심이 두 다리를 기계적으로 움직이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르막길을 다 올라가서 둑 위에 섰을 때, 그녀는 멍청히 멈춰 섰다. 버스는커녕 고양이 새끼 한 마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름다운 경치가 갑자기 흐릿해지더니 절망의 눈물이 뺨을 적셨다. 로잘리는 풀숲에 몸을 내던지고 하염없이 흐느껴 울었다. 아무리 울어도 눈물과 가슴 쓰라림은 그치지 않고 그녀의 전신을 채찍질했다. 이윽고 로잘리는 어깨에 묵직하고 따뜻한 손길을 느꼈다. "로잘리, 만일 내가 착각을 했다면, 먼저 한 말은 깡그리 취소하겠어. 로잘리, 내가 오해한 거야?" 에이드리언은 조용히 대답을 재촉했다. 엎드린 채 로잘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다면 미안한 말을 했군." 그는 로잘리를 일으키며 뺨에 줄줄이 흐른 눈물 자국을 자기의 손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이 손수건 빌려 줄게. 돌려 주는 것은 언제라도 좋아." 에이드리언은 아직도 떨고 있는 로잘리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가만히 감쌌다. "하나만 더 가르쳐 줘. 그와는 이젠 손을 끊었어?" 로잘리는 조용히 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멜라니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이상 나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어요." "그런가… 어쨌든 좋아. 오늘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즐기기만 하자구. 당신 휴일을 망칠 소리는 이젠 두번 다시 안하겠어. 약속할게, 로잘리." 로잘리는 고개를 끄떡이고 나서 콤팩트를 끄집어내어 얼굴을 매만졌다. 에이드리언은 그녀의 손을 끌고 차로 되돌아와서 짐을 좌석에 밀어넣었다. "여기서 하이 포스까지 이어지는 작은 오솔길이 있어. 나도 아직 걸어가 본 일이 없어서 한번 탐험해 보고 싶었는데, 오늘은 시간이 없군." 짧은 드라이브 동안에 에이드리언은 로잘리의 기분을 돌리려고 계속 지껄여댔다. 온몸에 힘이 빠져 나간 듯한 기분으로 시트에 기대면서, 로잘리는 가냘픈 미소를 띠며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얼마쯤 가자, 하이 포스 호텔이란 간판이 걸린 건물이 보였다. 에이드리언은 주차장에 차를 넣고 통로의 맞은편에 있는 작은 문을 가리켰다. "저것이 폭포로 가는 입구야. 저기서 입장료를 지불하지." 티즈 강을 내려다보는 쪽의 난간이 있는 가느다란 길을 두 사람은 걸어갔다. 길이 크게 구부러지고, 나무숲이 끝이 난 곳까지 온 순간, 로잘리는 크게 숨을 들이쉬면서 멈춰 섰다. 아득히 먼 저쪽에 하이 포스가 웅대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에이드리언은 로잘리의 손을 잡고 웃었다. "꼭 그런 표정이 되리라고 예상했어. 조금 더 가면 폭포소리가 들리고, 더욱 가까이 가면 그 소리는 굉장할걸. 우리는 저 폭포 위까지 가는 거야." "저런 데까지 갈 수 있어요?" "반듯한 길이 나 있어. 날이 가물 때는 수량이 줄어서 바위를 타고 대안까지 건널 수도 있어." 관광객이 드문드문 오가는 길을 한가롭게 걷다 보니 이윽고 폭포의 바로 밑까지 다다랐다. 푸른 하늘에 깎아지른 듯 솟아 있는 낭떠러지 위에 나타난 흰 격류는 도중에 튀어나온 큰 바위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주변의 바위를 진동시키는 굉음을 내며 아득히 아래에 있는 용추로 떨어지고 있었다. 에이드리언이 로잘리의 귀에 입을 대고 큰소리로 말했다. "큰비가 온 뒤에는 튀어나온 저 바위가 물속에 가려져 폭포는 하나로 합쳐져. 아름답다기보다 웅장한 풍경으로 바뀌어져, 보라구." 그는 손을 들어 가리켰다. "위쪽이야. 자세히 보면 사람이 걸어가고 있지? 저기로 가는 거야." "괜찮겠어요? 떨어질 염려는 없어요?" "경솔한 짓만 하지 않으면 괜찮아." 폭포 위로 통하는 계단은 급경사와 커브의 연속이었다. 나무의 난간에 의지하면서 숨을 헐떡거리며 위까지 다 올라간 로잘리의 등에 에이드리언은 웃으면서 팔을 둘렀다. "수고했어! 여기서부터는 평탄한 길이야. 그러나 물구덩이와 울퉁불퉁한 바위가 많으니까 발밑을 조심해야 해." 에이드리언에게 손을 이끌린 채 신중히 바위가 많은 곳을 지나, 로살리는 마침내 폭포 위에 섰다. 숨이 막힐 듯한 광경이었다. 폭포소리는 완전히 주위를 압도하여 다른 모든 소리를 싹 지워 버리고 있었다. 하얗게 소용돌이치는 용추에 거대한 흰 벽이 되어 떨어지는 격류를 보는 동안 불현듯 어떤 생각이 로잘리를 서서히 유혹했다. '여기서 한 걸음만 앞으로 나아가면 저 소용돌이 속으로 영원히 도망갈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악의에 찬 남의 평판에서도, 또한 멜라니를 둘러싼 엉클어진 인간관계에서도 그리고 맺지 못할 괴로운 사랑에서도 해방되고 자유롭게 될 수 있다. 겨우 한 걸음만 앞으로 나아가면…' 최면술에라도 걸린 듯이 로잘리는 상반신을 앞으로 내밀었다. 공포감은 전혀 없고, 소용돌이치는 물도 그녀에게는 달콤하게 유혹하는 상냥한 모습으로 보였다. 그때, 그녀는 굉장한 물소리 속에서 희미한 목소리를 들었다. "로잘리!" 억센 두 팔에 끌리어 돌아본 로잘리는 별안간 에이드리언의 넓은 가슴으로 뛰어들었다. 다음 순간, 로잘리는 부들부들 떨면서 그의 가슴에 매달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녀는 에이드리언의 부축을 받으며 안전한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죄송해요. 저 자신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모르겠어요." 로잘리는 중얼거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부드럽게 말하는 에이드리언의 몸도 미미하게나마 떨리고 있었다. 겨우 기분이 진정되자, 로잘리는 에이드리언의 소매를 끌며 말했다. "저기 있는 두 사람이 아까부터 줄곧 이쪽을 보고 있는 것 같아요." "아아, 나도 눈치채고 있었어. 짐 지루와 그의 부인이야. 우리 집 한 채 건너 이웃에 살고 있어." "전화가 있는 댁이죠? 당신이 병났을 때 어머님께 전화해서 폐를 끼쳤지요." "그렇다면 소개해야 되겠군." 에이드리언이 그녀의 어깨를 안은 채 일어섰다. "손을 떼는 것이 좋겠어요. 괜히 오해받겠어요." "오해하려면 하라지." "그러나 어머님께 엉터리 보고를 한다면…" "상관없어. 어머니는 기뻐하시겠지 뭐." "속사정을 아시게 되면 슬퍼하실 텐데요." 로잘리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에이드리언은 도리어 더 세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안녕하십니까, 짐! 폭포 구경하러 오셨어요?" 상대는 한손을 들어 답하고, 아내에게 손을 빌려 주면서 다가왔다. "야아, 에이드리언, 별고 없는가?" 지루 내외는 로잘리에게 호기심에 찬 눈을 돌렸다. 소개받은 로잘리가 지루 내외와 악수를 교환하는 것을 보면서, 에이드리언은 말했다. "이 아가씨를 기억하지 못하시겠습니까? 요전에 어머님께 전화했던…" "생각났어요! 목소리의 느낌으로 아주 착한 아가씨 같다고 집사람이 말했어. 그렇지, 여보?" 지루 씨는 아내와 마주보며 웃었다. "저 사람 집에 놀러오셨습니까, 미스 팔람?" "여행 도중에 들렀습니다." "어제 와서 오늘 떠난답니다." 에이드리언은 유감스럽다는 듯이 말하며, 로잘리의 몸을 끌어당겨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과장된 연기에 불만스런 로잘리를 외면한 채, 그는 다시 유감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저녁때까지 꼭 달링턴까지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군요." "그렇다면 우리가 방해되었어요, 짐." "그렇지, 그래. 그럼 실례합니다, 미스 팔람. 축하하네, 에이드리언. 어머님도 어깨의 짐을 내려놓게 되어 기뻐하고 계시겠군." 당황하는 로잘리와는 대조적으로, 에이드리언은 유쾌한 듯이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고 그들 부부를 전송했다. 두 사람은 먼저 온 길을 되돌아와서 호텔의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에이드리언은 어머니한테 꾸중을 듣는다는 이유를 대며 잇달아서 차례차례 요리를 주문했다. 로잘리가 '이젠 됐어요, 한 입도 더 먹지 못하겠어요!' 하고 비명을 지를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천천히 휴식을 취한 뒤 두 사람은 주차장으로 가서 차에 탔다. "고마와요, 에이드리언. 오늘 일은 한평생 잊지 않겠어요." 에이드리언은 로잘리를 살피듯이 바라보더니 팔로 꼭 껴안았다. 서로가 녹아서 하나로 된 듯한 긴 키스가 끝났을 때, 로잘리는 에이드리언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면서 속삭였다. "학교에는 언제 돌아와요?" "예정으로는 다음 학기 초에 돌아가게 돼 있어." "아직… 오 주간이나 남았네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리고 엔진의 키를 돌리는 에이드리언을 보고, 로잘리의 가슴에는 얼마 동안 잊고 있었던 쓰라림이 날카롭게 되살아났다. 달링턴까지 기나긴 드라이브를 하는 동안 두 사람은 거의 말이 없었다. 에이드리언은 로잘리가 메리온과 서로 만나기로 약속한 호텔 가까이에서 차를 세웠다. "예정보다 빨리 도착한 것 같아. 내일은?" "더럼에서 이틀 밤 머무르고 요크셔로 나온 뒤에는 곧장 집으로 돌아갈 뿐이에요. 월요일 저녁에는 집에 도착해요." "그럼 그 후의 예정은 정해져 있어?" 로잘리는 에이드리언의 시선을 피하면서 어깨를 움츠렸다. "아직은요! 여러 가지로 해야 할 일도 있고 해서…" "그것은 거짓말이야. 당신은 자신에게 전혀 책임이 없는 남의 문제를 떠맡고 있을 뿐이야." "그럴지도 모르죠. 그러나 그애를 내버려 둘 수는 없어요. 그것도 앞으로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웰리스는 변호사에게 멜라니 어머니의 거처를 찾아 달라고 의뢰했다고 했어요." 에이드리언이 코웃음을 쳤다. "거짓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자기 때문이 아니라, 멜라니를 위해서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에이드리언의 입언저리가 굳어졌다. "적어도 그 점에서는 그를 꼭 믿고 있는 것 같군." 로잘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 이상 말하면 웰리스의 신뢰를 배신하기 때문이다. 에이드리언은 끈질기게 계속 말했다. "아내가 자기를 이해해 주지 않느니, 어떻느니 하는 넋두리를 늘어놓는 바람에 그만 정에 끌리어 버린 것이야. 사람이 좋아도 유분수지, 정말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와." 로잘리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다시 한번만 말하겠어요. 저는 그애를 내버려 둘 수는 없어요. 그뿐이에요." 로잘리는 손을 내밀었다. "안녕, 에이드리언. 오늘은 정말 고마왔어요." 에이드리언은 로잘리의 손을 묵살하고 '물건을 잃지 않도록' 하고 중얼거렸다. 로잘리는 차에서 내려 문을 닫기 전에 다시 한번 말했다. "안녕, 에이드리언." "음, 또 만나지." 성큼성큼 걸어가는 로잘리의 머릿속에 하이 포스의 폭포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되살아났다. 그리고 그 소리에 섞여 희미한 부르짖음을 그녀는 분명히 들은 것처럼 여겨졌다. "로잘리!" 로잘리는 돌아봤다. 에이드리언의 차는 벌써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요란한 폭포소리가 그녀를 덮쳐 왔을 뿐이다. 10 여행의 마지막 사흘 동안, 가슴속에 있는 것을 완전히 감춘 채 쾌활하게 행동해 온 로잘리는 월요일 밤 역에서 메리온과 작별했다.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서 집에 당도했다. 아무도 없는 집 안이 이상하게도 넓게 느껴졌다. 다음 날, 로잘리는 웰리스에게 전화로 멜라니의 상황을 물었다. 지금 할머니 집에 가 있는데 내일 데리러 갈 생각이라고 말한 뒤, 웰리스는 오늘 밤에는 멜라니도 없어서 쓸쓸하므로 꼭 놀러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로잘리는 거절했다. 그리고 아무리 설득당해도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자 웰리스는 모레 멜라니를 바다로 데리고 가는데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로잘리는 쾌히 승낙했다. 전화를 끊고 달리 할 일이 아무것도 없게 되자, 또 에이드리언의 일이 로잘리의 마음을 무겁게 덮쳐 왔다. 가령 오해가 풀렸다고 해도 결혼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그만큼 분명히 선언하고 있는 남자하고는 전혀 미래가 없다. 커다란 절망에 로잘리는 살아갈 힘마저 잃은 것처럼 느껴졌다. 이튿날, 니콜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직 발표하지는 않았으나 젠과 약혼했다고 했다. "축하해요, 니콜. 정식으로 결정되면 연락해 줘요. 두 사람에게 줄 선물을 사야 하니까." 니콜은 고마와하면서 그때는 반드시 연락하겠다고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목요일은 아침부터 쾌청한 날씨였다. 멜라니는 로잘리에게 매달려 바닷가에서 실컷 놀았으나, 웰리스는 짐꾸러미를 지킬 뿐 거의 물에도 들어가지 않고 별로 기운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요?"` 로잘리가 물었다. "고민거리가 있어서." 웰리스는 세운 무릎에 턱을 얹고는 수영복 차림인 로잘리의 전신을 훑어보더니 낮은 소리로 웃었다. "나를 괴롭히는 최대의 원인은 그 매력적인 모습이야." "미안합니다." 둘은 함께 웃었다. 그러자 웰리스는 갑자기 진지한 얼굴이 됐다. "집에 돌아가서 멜라니를 재우고 난 뒤 단 얼마 동안이라도 좋으니 나와 이야기 좀 할 수 없을까?" "저는… 저…" "부탁이야, 로잘리.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하면 돼요. 정말로 그뿐이야. 나를 믿어 줘." 세 사람은 돌아가는 도중에 식사를 하고 밤 늦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하룻동안의 흥분으로 지쳐 버린 멜라니를 잠재운 뒤, 로잘리는 거실로 내려와서 웰리스가 주는 술잔을 받아들고 소파에 앉았다. 웰리스도 그 곁에 앉아 잔 안의 브랜디를 들여다보았다. "아내를 찾아 달라고 변호사에게 부탁한 이야기는 이미 했지?" 로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변호사가 아내의 거처를 찾아냈으니, 나더러 만나러 가라고 했어." 웰리스는 말을 더듬거리면서 로잘리의 손을 쓰다듬었다. 로잘리가 참을 수가 없어서 손을 뿌리치려고 할 때야 그는 겨우 말을 계속했다. "그래서 내일 만나러 갈 생각인데, 될 수 있으면 나 혼자 먼저 가 만나고 싶어. 멜라니에게 충격이 너무 크면 좋지 않으니까. 이야기가 어떻게 되든 집에는 늦게 돌아오게 될 것 같아. 그래서 미안하지만, 내일 하루 멜라니를…" "기꺼이 맡아 드리겠어요. 데리고 런던에 놀러가도 괜찮을까요?" "어디든지 데리고 가요. 든 비용은 내가 지불할 테니. 고맙소, 로잘리. 정말 살 것 같군." 웰리스가 끌어안으려고 하자, 로잘리는 가만히 그의 손을 뿌리쳤다. "믿어 달라고 말씀하셨죠?" "미안해. 그러나 당신 매력에는 어떤 남자라도 거역할 수 없을 거야." 그것과 정반대의 의견을 가지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상기하면서, 로잘리는 일어서서 싹싹하게 작별을 고했다. 그녀를 집 앞까지 바래다 준 웰리스는 돌아갈 즈음에 말했다. "내일 아침 9시에 멜라니를 데리고 오겠어." "알았습니다. 오늘은 감사했어요." "내가 도리어 감사를 해야지. 당신하고는 이제부터 만날 수 없게 될는지도…" 웰리스는 한참 동안이나 로잘리를 바라본 뒤 다시 밤거리로 사라졌다.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집 안으로 들어서자, 하룻동안 억지로 쾌활하게 행동했던 피로가 로잘리를 엄습해 왔다. 집이 너무 조용한 탓인지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나고, 거기서 차디찬 바람이 불어 들어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전화 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이런 깊은 밤에 더더구나 이런 기분일 때에는 입을 여는 것조차도 귀찮다고 생각하면서, 로잘리는 수화기를 귀에 댔다. "로잘리?" 수화기가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질 뻔했다. 한순간의 기쁨은 곧 커다란 실망으로 변했다. 설마, 그가 전화를 할 리가 없다. 언제나 에이드리언의 일만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런 환청까지 들리게 됐으리라. 실망의 눈물이 쏟아지려고 할 때에, 상대가 또 말했다. "로잘리, 듣고 있소?" "여보세요? 저… 에이드리언?" "당연하지. 이런 밤중에까지 어디 갔었어? 몇 시간 전부터 걸고 있었는데." "저는 오늘 하루종일 줄곧…" "로잘리, 나는 지금 하숙에 와 있어. 출판사에 볼일이 생겨서 왔어. 내일 만날 수 있을까? 시간은 당신 형편에 맞추어 정하면 돼." 고르고 골라서 하필이면 내일이라니, 어째서 이렇게도 운이 나쁘단 말인가!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 참 유감스럽게 됐군요. 내일은 멜라니와 런던에 갈 약속을 해버렸어요." "아무렴…" 그의 침묵이 로잘리의 가슴을 깊게 찔렀다. "물론, 셋이서 떠나겠지? 아니면 멜라니와 단둘이서인가?" "단둘이에요. 웰리스는 내일 자기 부인을 만나러 간대요." 그는 다시 침묵하더니, 이윽고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내일 런던의 출판사에 가는데, 같이 간다면 짐이 될까?" 그녀는 한순간 자기 귀를 의심했다. 로잘리의 가슴에 희망이 두려운 듯이 살그머니 다가왔다. "짐이 되다니요, 당치도 않은 말씀이에요. 당신만 괜찮으시다면 꼭…" "그럼, 결정했어. 내 볼일은 두 시간쯤이면 끝날 거야. 그 뒤에 또 합류해서 셋이서 식사라도 하는 것이 어때?" "멋져요." 시간 약속이 끝나자, 로잘리는 에이드리언 어머니의 근황을 물었다. "당신을 만날 생각이라고 했더니, 어머님이 말씀 전하라고 하시더군. 단 직접 만나 전하라는 다짐을 받았지. 그럼 내일 아침까지 잘 자요, 로잘리."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잘 자란 인사를 하고, 로잘리는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놓았다. 음울한 기운이 가득차 있어야 할 집 안이 갑자기 명랑하고 활기에 찬 음악으로 넘쳐흐르는 것처럼 여겨졌다. 로잘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이튿날 아침 일찍 웰리스는 그녀의 집 앞에다 딸을 내려놓고는 차 안에서 손만 흔들었을 뿐 그대로 떠나 버렸다. 기대와 흥분으로 눈을 빛내면서 집으로 들어온 멜라니는 에이드리언도 동행한다는 말을 듣더니 더욱더 신이 나서 온 집 안을 깡총거리며 뛰어다녔다. 로잘리는 소녀를 뜰로 내보내고, 자기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새로 맞춘 핑크빛 원피스를 입고, 핸드백과 신발은 흰색, 그리고 화장은 좀 엷은 듯이… 에이드리언의 마음에 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고 싶은 심경이었다. 약속 시간에 맞추어 찾아온 에이드리언은 맨 먼저 작은 꾸러미를 내밀었다. "약속한 라디오야." "어머나… 뭐라고 감사해야 좋을는지 모르겠군요." "뭐라고, 내가 가르쳐 주지. 그 전에 집에 들어가도 괜찮겠소, 미스 팔람? 거실로 들어온 에이드리언은 라디오의 사용법을 설명한 뒤, 로잘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럼 당신의 감사하는 마음을 받아볼까?" 로잘리는 발돋움하여 가만히 키스를 했다. "약간 부족하지만 관대하게 봐주지. 이번에는 내가 어머니한테서 맡은 용무를 끝낼 차례야. 다음번에 어머니를 만나면 '당신 아드님은 분부를 어김없이 지켰습니다'라고 보고해 줘야 한다구." 에이드리언은 로잘리의 가느다란 몸을 부러질 정도로 힘차게 껴안고 불타는 키스를 퍼부었다. 로잘리는 몸의 중심에서 솟아오르는 기쁨에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이대로 시간이 멈춰 주기를 마음속으로 빌고 있었다. "오빠하고만 키스하지 말고, 멜라니에게도 키스해 줘요, 로잘리 아줌마." 조금 토라진 듯한 귀여운 목소리에 부둥켜안고 있던 두 사람은 돌아봤다. 문간에 서서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고 있는 소녀에게 달려가서 로잘리는 작은 볼에 입술을 댔다. 멜라니는 로잘리의 머리를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멜라니도 오빠한테만큼 사랑해 줄 거지?" "얘는…" "꼬마 숙녀의 질문에 대답해야지, 로잘리." 웃으면서 에이드리언이 말했다. "나는 물론 너를 사랑한단다, 멜라니." 그것으로는 반밖에 대답이 되지 않는다고 에이드리언이 말했으나, 멜라니는 그 답으로 충분히 만족한 듯이 로잘리의 손을 잡아당기며 빨리 떠나자고 재촉했다. 세 사람은 에이드리언의 차를 타고 출발했다. 그리고 역에서 열차를 갈아탔다. 로잘리는 멜라니에게 책을 사주고 자기도 소설책을 펼치고 있었으나, 맞은편에 앉은 에이드리언의 일만이 신경이 쓰여 독서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에이드리언은 간혹 신문에서 얼굴을 들었다. 그때마다 당황하면서 얼굴을 숙이는 로잘리를 유쾌한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후 그는 로잘리의 옆으로 자리를 옮기더니, 그녀의 팔을 자기 팔에 걸었다. "이러는 것이 편하지? 잠들어도 괜찮아." 순순히 눈을 감은 로잘리는 런던에 도착할 때까지의 한 시간 정도를 자는 둥 마는 둥 졸면서 보냈다. 런던 역은 변함없이 바쁘게 오가는 인파로 붐볐다. 개찰구를 빠져 나오자, 에이드리언이 로잘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럼 1시에 타워의 출구에서 만나지." "타워라니, 런던 탑 말인가요? 런던 탑에 데려다 주는 거예요?" 멜라니가 환성을 질렀다. "그래." 로잘리는 대답도 하는 둥 마는 둥 인파에 휩쓸려 가는 에이드리언의 모습을 눈으로 쫓았으나, 멜라니가 줄곧 손을 잡아당기며 재촉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지하철도 런던 탑도, 그리고 탑 안의 전시장에 진열된 호화스런 보석류도 멜라니에게는 온통 처음 보는 것들뿐이었다. 에이드리언과 만날 약속 시간이 가까와져 출구로 갈 무렵이 돼도 멜라니는 지칠 줄도 모르고 힘차게 뛰어다니고 있었으나, 로잘리는 오래간만의 혼잡에 시달리고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소녀를 상대하느라고 녹초가 되어 다리를 질질 끌면서 걸어야 했다. 그러나 출구의 인파 속에서 에이드리언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피로는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세 사람은 즐기는 것과 호주머니 사정에 꼭 알맞는 레스토랑을 발견하여 식사를 한 다음 그곳을 나와, 이번에는 트라팔가 광장으로 갔다. 멜라니는 넬슨 동상에 눈이 휘둥그래졌고, 분수를 보고 환성을 질렀으며, 비둘기와 놀았다. 그리고 커다란 사자상을 향해 무엇인지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밖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어보다니, 몇십 년만의 일인지 모르겠어." 벤치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에이드리언이 중얼거렸다. 멜라니는 자기의 머리너머로 미소짓고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고 방긋이 웃었다. "오빠를 사랑하고 있지, 로잘리 아줌마?" "멜라니, 이분은 내 오빠가 아니야." "하지만 에이드리언 아저씨는 아줌마를 사랑하고 있어. 그러니까, 아줌마의 오빠인 거야." "누이동생이라고 해서 반드시 오빠를 사랑하라는 법은 없어요." "그러나 만일 오빠가 있다면, 멜라니는 반드시 오빠를 사랑해 주겠어. 아줌마도 그렇지? 응, 그렇지?" 소녀는 조바심이 나는 듯이 재촉했다. "알았어, 멜라니. 나도 오빠를 사랑한단다." 로잘리는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숙였다. 소녀는 만족스러운 한숨을 쉬고는 다시 커다란 아이스크림을 먹기 시작했다. "저 그 오빠와 누이동생의 애정이란 것에 대해 나중에 차분하게 토론하지 않겠어?" 부드럽게 말하는 에이드리언의 눈에 담긴 무엇인가가 로잘리의 가슴을 크게 울렁거리게 했다. 돌아오는 열차 속에서, 멜라니는 에이드리언이 사준 인형을 꼭 껴안고 로잘리에게 기대어 푹 잠들고 말았다. 로잘리도 에이드리언의 어깨에 기대어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세 사람은 열차에서 내려 에이드리언의 차를 타고 멜라니의 집으로 향했다. 문 안에는 웰리스의 차가 들어와 있었다. "어머, 아빠가 돌아와 있나 봐." 로잘리가 졸음이 덜 깬 멜라니를 차에서 내려놓고 자기도 뒤따라가려고 하니까, 에이드리언이 불러세웠다. "그애는 아버지가 재우겠지. 당신은 들어가지 말고 그냥 돌아나와. 로잘리, 알았지?" 조용하지만 단호한 말투였다. 멜라니의 손을 끌고 집에 다가간 로잘리는 거실의 커튼이 조금 열려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소파에서 웰리스가 멜라니를 꼭 닮은 여자와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로잘리는 허리를 구부리고 소녀를 꼭 껴안았다. "나는 여기서 돌아갈 거야. 아니야, 안 돼요. 멜라니, 그 대신 집에 들어가보면 멋진 일이 있을 거야. 그럼 잘 가거라, 멜라니." 소녀는 졸리는 눈을 비비면서 키스를 했다. 초인종을 누른 로잘리는 후딱 몸을 돌려 에이드리언의 차를 향해 뛰어왔다. 달리기 시작한 차 안에서 돌아보니, 두 팔을 활짝 펼치고 무슨 소린지 외치면서 집 안으로 들어가는 멜라니가 보였다. 잠시동안 말없는 드라이브가 계속된 뒤, 에이드리언이 중얼거렸다. "불만인가?" "뭐가요?" 로잘리가 도전적으로 얼굴을 돌렸다. "어머나, 보고를 아직 안했네요. 웰리스가 오늘 멜라니의 어머니를 데리고 돌아왔어요!" 에이드리언은 커다랗게 한숨을 쉬며, 이윽고 조용히 말했다. "이로써 당신도 겨우 자유로운 몸이 됐군." 로잘리는 말없이 시트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기쁨의 눈물이 소리없이 눈시울을 적셨다. 그녀의 집 현관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여벌 열쇠로 연 에이드리언은 로잘리의 등을 부축하면서 거실의 안락의자로 데리고 갔다. "몹시 지쳤지? 커피는 내가 탈 테니, 당신은 여기서 쉬고 있어." 그로부터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 두 사람은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빈 커피 잔을 테이블에 놓고 또 힘없이 의자에 기댄 로잘리에게 에이드리언은 짖궂은 시선을 던졌다. "우선 한 건은 해결된 셈이군.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무사하게 해결된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라고 할 만해. 메이슨이 야망을 성취하지 못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거야." "언제까지나 짖궂게만 보는군요." 로잘리는 일어서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이리저리 거닐었다. 그는 여전히 도발적인 말투로 계속했다. "의무를 완수하여 양심은 상쾌하게 됐고, 웰리스 메이슨의 마수에서도 벗어났다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에이드리언의 뜻을 이해할 수 없어서 로잘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는 뭔가 한 가지 해걸되지 않은 것을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 나에게 대해서는 멜라니가 말한 대로 누이동생이 오빠를 생각하는 것 같은 감정뿐이야?" 단정한 얼굴에 암담한 미소 같은 것이 스쳐갔다. "만약 그렇다고 하면 몹시 유감스럽군. 여하튼 내가 당신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오빠가 누이동생을 생각하는 마음과는 전혀 질이 다른 것이니까." 로잘리는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대사는 결혼하자는 프로포즈라고 정해져 있지만, 에이드리언에 한해서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에이드리언이 일어서더니 조용히 말했다. "이리로 와요, 로잘리." 고개를 갸우뚱하며 바로 앞에 선 로잘리를, 그는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훑어봤다. "이제 쇼크는 진정됐어?" 멜라니와의 이별을 말하는 것이라고 알아차리고, 로잘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에이드리언이 갑자기 빠른 말로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나는 지금부터 당신이 다시 한번 깜짝 놀랄 만한 소리를 꺼낼 참이거든." 에이드리언의 두 손이 재빨리 뻗쳐 오는가 싶자 로잘리는 별안간 격렬한 키스 세례를 받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중얼거렸다. "사랑하고 있어, 로잘리. 당신은 어때?" 멍하게 얼굴을 쳐든 로잘리의 눈을 들여다보며, 에이드리언이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눈이 대답을 하고 있어, 달링. 당신도 나를 사랑하고 있지?" "사랑하고 있어요, 에이드리언. 당신을 사랑해요. 사랑하…" 헛소리처럼 되뇌이는 로잘리의 목소리를 에이드리언을 다시 뜨거운 입술로 막아 버렸다. "당신과 달링턴에서 헤어진 후 나는 몸의 일부를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어. 여기로 온 진정한 이유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였어. 당신 없는 생활은 이젠 하루라도 못 참게 됐어." 키스의 폭풍이 부는 틈틈이 에이드리언은 말했다. "당신은 수학자와 결혼하는 것이 싫지 않지?" "가족중에 수학자 한 사람이 더 늘겠죠? 대단한 일은 아니예요. 그리고…" 로잘리는 더욱 몸을 밀착시켰다. "당신 같은 수학자라면 대환영이에요!" "약속한 대로 그동안에 당신한테 수학을 가르쳐 주려고 한다면?" "당신 무릎 위에서 공부한다면 기꺼이." "이런 뻔뻔한 학생 보았나! 그러나 그 제안은 나로서도 바라는 바야." 즐겁게 웃으며 에이드리언은 소파에 앉아서 로잘리를 무릎에 앉혔다. "결혼을 평생동안 하지 않는다고 해놓고, 굉장한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물론이죠. 그러나 저는 온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준다고 해도 당신의 아내가 되는 쪽을 고르겠어요." "좋아. 좋은 일은 서둘러 하라고 했지. 결혼은 내일… 모레쯤이 어떨까?" "그건 당치도 않아요, 에이드리언. 그래도…" "그럼 그 다음 날 어때. 그 이상 기다리게 할 셈이라면 내게도 생각이 있어요. 지금 바로 기정사실을…" 로잘리는 항복하고 말았다. 다음 날, 에이드리언은 관공서에 수속절차를 밟으러 갔고, 로잘리는 거리로 나와 엷은 하늘색의 원피스와 재킷, 그리고 흰 모자를 샀다. 그러고 나서 만난 두 사람은 결혼반지를 사러갔다. 그리고 이틀 후 둘은 마을의 관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 다음 그들은 보증인으로서 입회해 준 니콜과 젠과 함께 마을의 호텔로 가서 최고급 샴페인으로 축배를 들었다. 니콜 일행과 작별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두 사람은 피루즈 부부에게 결혼했음을 알렸다. 피루즈 부인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축복의 키스를 했다. 그리고 떠나가는 두 사람을 언제까지나 손을 흔들면서 바라보았다. 황홀하고 달콤한 신혼생활에 젖어 있던 두 사람은 어느 날, 신학기가 이미 코앞에 다가온 것을 알았다. "슬슬 무슨 수를 써야 할 필요가 있겠지?" 에이드리언이 말했다. "우리가 같이 지내고 있는 것이 알려지면, 사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터무니없는 소문을 퍼뜨릴지도 모르니까." 로잘리는 그의 잘생긴 입술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키스했다. "그럼 어떤 수를 쓰지요?" "전보 작전이 좋겠어. 알려야만 할 곳에다 모조리 전보를 치는 거야." 두 사람은 전화 앞으로 달려갔다. 먼저 남 프랑스에 있는 로잘리의 양친에게 전보를 쳤다. <결혼했음. 귀환과 여행의 무사함을 빌며― 로잘리, 에이드리언> 다음은 에이드리언의 어머니에게였다. <결혼했음. 며칠새 신혼여행 겸 집에 갈 예정임. 에이드리언, 로잘리> 열 몇 통의 전보를 발신하고 수화기를 놓은 에이드리언은 큰 가슴에 신부를 안았다. "이로써 당신에게는 모친이 두 분이 생긴 셈이야. 더욱이 두 분이 모두 당신을 더할 나위 없이 사랑하고 있지. 만족합니까, 클레이포드 부인?" "네, 클레이포드 박사님. 대단히 만족합니다." 로잘리는 남편의 목에 팔을 감고 키스의 소나기를 퍼부었다. < 끝 >